건설인 성기철의 역마살ㅡ70년대 해외출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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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성기철(Sung Ki Chul, 1952~, 경기도 부천시) 1952년 경기도 부천시에서 자랐다. 소사농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때까지는 농부의 길을 꿈꿨으나 취업 후 대학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한양대학교 에서경제학 을 전공했다. 1997년 10월 대학 졸업 전 대우건설에 조기 취업한 뒤로는 한국을 떠나 반평생을 중동, 아프리카에서 보내며 건설 시장을 개척했다. 1990년 대우그룹임원이 되었다.

학력

경력

취미

70년대 해외출장 이야기

알제리 건설현장
리비아 건설현장
이라크 건설현장

서문

성기철(건설인)은 70~80년대 중동 국가 건설 붐 시기인 1977년 10월에 대우그룹에 입사한 뒤로 한국을 떠나 반 평생을 중동, 아프리카 등 건설 시장을 개척하며 백개 정도의 국가를 가보았다. 1990년부터는 대우그룹 임원이 되었으나 1998년 대우그룹이 부도하고 부영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지금도 생소한, 이름도 몰랐던 나라, 위험한 지역까지 발자국을 남긴 성기철이 마주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1952년 부천시 중동에서 태어난 기철의 꿈은 농부였다. 정성을 쏟은만큼 보답하는 땅을 일구는 일이 좋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뛰어든 사회는 냉혹했다. ‘대학은 가야겠구나.’ 기철은 그길로 퇴사해 학업에 전념, 한양대학교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흙내를 사랑하던 청년이 경제학과라니. 너무 사람이 급히 바뀐 거 아닌가 싶겠지만 취업난은 당시에도 있었다. 법학과, 경제학과 말고는 취직이 안 되는 시대였기에 선택한 길이다. 전공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고, 1997년 대학교 4학년에는 대우그룹에 조기취업했다.


1980년대 초, 대우건설 플랜트 사업은 조직도 미약하고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신생아와 같았다. 특히 해외 플랜트부 인력이 몇명 되지 않다 보니 기철을 포함해 두세명은 출장으로 한 해를 보내기 일쑤였고, 특히 기철에게 출장 업무가 몰렸는데 그 후 이런 상황이 20년 넘게 지속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무렵 일년에도 몇 번씩 출장을 떠나면서, 기철은 ‘과연 나에게 정말 역마살이라는 것이 낀 것일까 그냥 미신일까’ 자문자답 하곤 했다.


많은 사람이 기철을 부러워하며 여행을 많이 다녀 좋겠다고 했지만 기철은 비행기가 겁났다. 비행기 사고가 나서 추락한다거나 이런 걱정이 아니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좁은 이코노미석에 끼어 앉아 12시간씩 왕복해보면 기철의 말을 뼈저리게 이해했을 것이다. 출장에서 돌아와 본사 사무실에 출근하면 유럽에서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므로 졸리게 되는데, 오전은 어떻게 하든 버티어 내지만 점심을 먹은 직후가 가장 문제의 시간이다. 결국 오후 시간에 잠깐씩 의자를 창가로 돌려놓고 앉은채 쪽잠을 자는 것으로 풀곤 했는데, 하루는 잠시 풋잠을 자고 깨니 부서 직원이 본부장님이 왔다 가셨다고 했다. “그러면 나를 깨워야지!” 그냥 가시게 했나 질책을 하자, 본부장님이 깨우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본부장님이 인정한 “공인 낮잠부장”이 되어 해외 출장 귀임 후 15분에서 20분 정도 엎드려 잘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여행의 기본이자 방문하는 나라의 얼굴인 국제 공항들의 이야기를 몇 개 해볼까 한다. 세계 각국의 공항들을 보면 최신 설비를 갖춘 대도시 공항도 있고, 한눈에 보아도 시골티 물씬 나는 흙길 활주로의 소박한 공항까지 천차만별이다보니, 여행객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비교를 해보는 것이 재미도 있거니와 때로는 다음 여행에 참고할 내용도 있으니, 어찌 보면 일거양득이라 할 수도 있겠다. 동남아 국가들은 공항에서 꽃과 음악으로 환영하는 경우가 많고, 근래에는 국가별로 많이 개방되었지만 독일을 기점으로 동쪽에 있는 동유럽국가 공항의 근무자들은 한결같이 무표정에 미소는 멀리한 차가운 얼굴이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공항 근무자들은 별로 표정은 없지만 손도 빠르고 일처리도 빠른 것을 보면, 모두들 국가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오지 않으시는지?

공항에서 대마초 걸리면

지금은 나이지리아에서 우리나라로 올 때 항공편이 매우 다양하지만,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던 80년대 후반 나이지리아 현장 근무를 마치고 귀임할 때의 이야기이다. 귀국하는 항공편은 나이지리아 라고스로부터 런던을 거쳐 파리에서 대한항공으로 환승하는 여정이었다. 영국의 공항들은 예나 지금이나 입국 수속이 끝나면 짐을 찾아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곤 하는데, 세관 직원들이 제복에 모자를 쓰고 근엄하게 입국자들을 주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워보여도 할일은 다 한다고 했다.


런던에 도착하고 밖에 나와 지사 직원을 만나서 인사하고 뒤이어 나오는 사람들을 집결시켜 인원점검을 하는데, 30분이 지났지만 모두 같이 움직인 일행 중에 두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지사 직원이 입국장 문 앞에 있는 공항 경찰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안의 상황을 알아보아 주기를 부탁했는데, 그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세관원으로 보이는 제복 한 사람과 같이 기철의 일행에게 다가와 “Mr.Sung”을 찾았다.


기철은 가방을 맡기고 그를 따라 방금 나왔던 입국장 문 안으로 다시 들어가 어떤 조그만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두 사람이 커다란 귀국 가방의 내용물을 대형 탁자위에 모두 쏟아 놓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기철을 보자 벌떡 일어나며 반색을 했다. 기철은 세관원에게 나이지리아 건설 현장에서 귀국하는 일행의 리더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러자 그가 기철에게 두 사람이 수입 금지된 물품을 휴대하여 체호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체포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문제가 된 수입 금지 물품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마약과 입국시 신고하고 검역을 받아야 하는 식물류라고 하였다. 식물류는 그렇다 치고 마약이라니, 기철은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꼬였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우선 체포되었던 두 사람들로부터 상황을 들었는데, 한 사람은 귀국하는 가방속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열대 과일만 한가득 담아 오다가 적발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물소 뿔 두개에 대마초를 가득 넣어서 가방에 넣어 왔는데 발각되었다고 했다. 열대과일을 담아 오던 친구는, 현장은 끝났는데 가진 돈도 넉넉치 않은데다 나이지이아에서는 특별히 살 것도 없고 런던과 파리에서는 공항 외에 둘러볼시간도 없으므로, 주변에 선물이나 하자는 생각에 바나나와 파인애플, 희귀한 열대과일 몇 가지를 요령껏 가방에 가득 담아 억지로 기내에 들고 탑승했다고 했다. 80년대 우리나라의에서는 바나나가 낱개에 3천원이었다.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고급 과일인 것이다. 그런데 나이지리아에서는 커다란 한송이에 우리 돈 2천원 정도에 살 수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세관원들의 말에 의하면 과일을 가진 사람은 모두 몰수하고 석방할 수 있지만, 대마초를 가진 사람은 마약단속반에 인계하는 것이 세관 운영의 원칙이라고 운을 떼었다. 마음속으로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영어도 안 되는 기능직 사원을 영국 구치소에 두고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강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이 나이지리아 본부와 런던 지사, 그리고 서우루 본사 인력 선발팀에 미치게 될 영향 등이 줄줄 떠오르며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다행히도 세관원이 기철과 옆에 있던 법무팀 H대리의 명함을 보더니 두 사람의 여권과 명함을 보니 두 사람은 신분이 확실하고 귀국팀의 지휘자들이므로 믿고 이야기한다며, 자기들에게 각서를 써준다면 체포한 친구들의 훈방을 고려해 보겠다고 하며 두 사람이 구금된 친구를 위해 마치 보증처럼 각서를 제출하겠는가 물었다. 상황을 보면 무조건 “Yes”라고 해야 하지만 어떤 각서인지 물어보니, 체포된 사람이 법을 어겼으나 영국을 벗어날 때까지 추가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보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서를 검토하는 중 기철의 일행이 세관원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 일행이 30여명인데 어떻게 저 두 사람을 골라서 잡았나”물었는데,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7~80퍼센트 정도는 알 수 있단다. 열대과일은 가방 모양을 보고 조사했고, 대마초를 가지고 있던 친구는 얼굴 색깔이 마약을 사용한 사람이라고 특정할 수 있어서 가방 조사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들이 하는 일이었고 말에 자신감이 묻어 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추후에 들어보니 그 때 벌써 대마초 정도는 약한 마약으로 분류될 정도로 영국에서는 강한 마약이 성행하여, 그들의 석방판단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말라리아와의 싸움

많은 분들이 말라리아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말라리아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아니고 충, 즉 벌레에 의해 발병한다. 모기에 의해 옮겨지고 약 2주까지 잠복기간을 가지므로 모기에 물리면 증상이 없어도 2주까지는 주의해서 관찰해야하고, 발병하면 초기대응이 매우 중요하다. 개중에는 가벼운 증상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으나, 감기 정도로 알고 치료하지 않고 있다가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면 후유증이 만만치 않고 간혹 뇌로 전이하면 사망하는 사례도 있으므로 초기에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둘째, 의외로 많은 분들이 말라리아는 한 번 걸리면 면역이 되어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면역성은 없다. 2년반 동안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같은 사람이 20번이상 말라이아에 걸린 경우도 보았다.


국내 건설사들이 해외에서 일하는 현장이 열대 지방에 많아서 건설회사 소속의 말라리아 환자가 자주 발생하는데, 특히 아프리카가 말라리아 주 발생 지역이고 동남아가 뒤를 잇고 있다. 열대 말라리아는 종류만도 2백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기철 역시 두어번 말라리아에 걸려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지만, 극심한 통증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닌데 독감에 걸렸을 때처럼 오한이 생겨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 도저히 일을 하거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열대지방 주민들은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이 다반사이므로 치료약의 강도도 점점높아져서, 처음 발병한 한국인들에게 현지 수준의 약을 투여하면 몸이 약한 사람들은 바로 기절할 정도다.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 근무했던 회사 직원들 수가 연 인원 약 천명 정도인데, 드물기는 하지만 말라리아에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사람도 있고 수십번 걸려 고생한 직원도 있다. 오래 가면 뇌로 전이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약간의 후유증이 남은 사람이 몇 명 있었고, 단 한 명 말라리아로 운명한 직원이 있다.


H과장은 나이지리아 현장에 정식 부임한 것도 아니고, 본사에서 근무하던 중 늪지대의 공사현장에서 연말 이전에 공사를 끝내기 위해 증원을 요청하여 단기간 현장에 파견되었다. 그가 파견된 현장은 그의 노력을 더하여 예정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고, 크리스마스 이전에 공사를 마쳐 H는 즐거운 마음으로 본사에 귀임하였다. 회사는 그의 귀임을 모르고 있다가 월요일 아침에 그의 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H는 수유리에 있는 그의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이틀전부터 혼수상태라는 것이다. 혼수상태라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보고를 듣다 보니 불현듯 말라리아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말라리아 검사를 해 보도록 전해 놓고, 회사에서 보관 중이던 말라리아 치료제를 챙겨서 H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렇게 된 과정 중에 바뀔 수 있는 경우를 집어내며 꼭 그렇게 될 길로만 갔다고, 운명이라고 흔히들 말하곤 한다. 부인으로부터 H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시간을 꼭 그렇게 맞춘 것 같았고, 대상도 없이 무턱대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현장 직원들 환송을 받으며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귀국길에 오른 H과장은 중간 기착지인 암스테르담에 새벽에 도착했고, 저녁에 출발하는 서울행 비행기 시간까지 약 12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즐거운 마음으로 시내로 나갔다고 한다. 3개월에 걸친 파견 기간동안 못 본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선물이라도 살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비 내리는 암스테르담 시내를 우산도 없이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바쁘게 시간을 보낸 H는 목요일 낮에 서울에 도착하여 가족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으나, 열이 나고 오한이 생겨 동네 약방에서 감기약을 사 먹고 잤는데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H는 다음날 병원에 진료 차 갔다가 몸 상태가 심각하여 입원을 했고, 저녁부터 혼수상태가 되었다. 병원에서는 가족들에게 암스테르담 상황을 듣고 잠정적으로 폐렴으로 인한 혼수상태로 보았고, 주말이 되어 당직 의사만 있는 상태에서 해열제 위주의 치료를 했다. 월요일 아침에 회사로 연락한 후에 말라리아에 대한 권고를 듣고 즉시 검사를 하여, 우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말라리아에 대한 정확한 치료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병원에 치료제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회사에서 가져간 말라리아 치료제도 약품 설명을 읽어보고 처방을 할 정도였는데 설상가상 H의 혈압이 너무 낮아 치료제를 투여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H과장은 이틀 후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 일은 한 사람의 직원을 잃는 것을 떠나, 해외 현장에서는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주변에서 흔히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들을 보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기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하고 돈을 못 받으면

제목만 보면 임금 체불을 당해 고민하는 근로자를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런 스케일을 확 넘어서 발주처 대 계약자 심지어는 국가 대 회사의 공사비 지급 지연에 대한 해결 이야기이다. 받을 권리가 있다고 무조건 받아지는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일을 해주고 당연히 돈을 받아야 할 채권자가 독촉과 설득하는 노력을 다하고도 종종 원치 않는 협상과 채무조정까지 참여하는 불합리한 경우가 생기곤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리비아 미수금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대우건설은 리비아에서 일도 많이 했지만 워낙 수십년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전국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여러개 프로젝트에서 지금이 지연되었으나, 만성이 되어 위기감도 없었다. 회사에 수금을 하는 조직도 있고 여러 곳의 발주처에 10여년 적체된 미수금 합계가 수억불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 국영인 리비아 발주처들은 공사시간 지연이나 공사의 하자등을 구실삼아 대우건설에 오히려 패널티를 물려야 한다며, 수억불의 청구서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양측 서류를 비교 검토한 결과, 서로 인정할 수 있는 청구 금액을 상쇄하고도 대우건설이 약 5억불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대우는 리비아 시장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으니, 정부를 상대로 강경 조치를 취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90년대말 때마침 불어 닥친 국제적 금융위기와 그룹의 해체 등으로, 회사의 재정 상태도 어려워 어떤 식이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새로운 경영진에서 해외사업을 맡게 된 L사장님은 별도로 리비아 미수금 회수팀을 구성하여 정면 돌파하기로 작전을 짜고 당시 지도자(가다피)와의 직접 만남을 추진하였다. 관련된 곳이 너무 많고 실세인 지도자의 아들들까지 연계된 곳도 있어서 지도자 외에는 해결해줄 사람이 없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기다리던 L사장님에게 지도자 측에서 연락이 왔고, 사막에 수십개 천막을 치고 주둔하던 지도자와 정무 인사들을 면담하였다. 미리 보고를 받고 있었던 지도자는 통 크게 미수금 지급을 약속했고 실무 장관에게 지시하여 세부 계획을 세워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L사장님을 Chairman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대우그룹 회장님과 혼동한 것인지, 자기와 만나니 당연히 회장급이라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것이 결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리비아 정부와 협의한 지급 방식은 서로가 유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적절한 수준의 타협이었다. 전체의 25%는 탕감해주고, 25%는 리비아에 재투자 하며, 50%는 2년에 걸쳐서 3개월마다 현금으로 분할 상환하는 방식이니 기약도 없던 미수금의 75%를 회수한 것이다. 재투자분 25%는 트리폴리시의 요지에 대우호텔로 건설 되어 운영했고, 50%는 2천년대 초반에 2년동안 3개월마다 분할 입금되어 회사의 현금 흐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외국인 일꾼 특징

해외 건설 공사를 수행하려면 한국인 기능직원도 같이 일하게 되지만, 그보다는 현장이 있는 국가 인력이나 제3국 기능직원들 숫자가 훨씬 많아서 현장 인력관리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문화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모두 다른 여라 나라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이들에 대한 이해가 작업 관리는 물론이고 공동으로 살아가는 캠프 운영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해외 현장에 근무하며 같이 부대끼고 살아본 경험과, 현장 운영을 위해 그나들며 느낀 기억들, 그리고 현장 인력을 채용하기위해 7~8개국에서 만명이 넘는 인력의 면접을 보며 30여년간 보고 듣고 기록한 국적별 특성을 잠깐 정리해 보았다.


이 내용은 많은 자료들을 특징으로 요약한 것이고, 같이 일한 사람들 의견도 일부 가미되어 있긴 하나 거의 주관적 판단이며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쓴 내용은 절대 아니라고 하므로 보는 분들 생각과 다르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나라 이름을 쓰기는 어려운데, 아무리 경제 수준이 낮다고 해도 현장에서 나갈 때 누구든지 '돌멩이 하나라도 들고 나가지, 절대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한바탕 소동이 난 기록적 도난의 현장 기억도 있다.

필리핀

그들의 고유 언어인 타갈로그어가 있기는 하지만, 타갈로그어와 함께 국가 공용어가 영어이므로 직원이나 기능직 공이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강점이다. 7~80년대의 해외 현장을 보면 한국인이 반장과 주력 직종을 맡고, 필리핀이나 인도인 기능직들이 일반직종과 보조직으로 작업조를 구성하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그 이후 한국인 임금이 급히 오르면서 한국인이 주력이었던 특수 직종들의 위치를 대부분 필리핀인들이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 국내에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해외 진출자들이 증가하고 전체적인 기능도 향상되어 중동과 아프리카의 대부분 현장에서 주력 기능직 역할을 하며, 자기들끼리 연대도 강한 편이다. 전반적 인성이 민주주의 절차를 따르고 싶어하며 과격한 언행을 거의 ㅎ지 않아, 차츰 건설사 현장 인력에서 발주처에도 취업을 확대하고 있고, 요즘은 사무직까지 진출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2천년대 들어 필리핀 인력도 임금이 많이 올라 후발 국가들에게 일반 기능직 자리를 상당 부분 잠식당하고 있지만, 전체 인원수도 크게 줄지는 않고 중요한 직종과 위치도 유지하고 있다.

인도

듣기 훈련을 따로 해야 발음을 제대로 알아들을 지경이지만, 인도 인력들도 역시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8~90년 때부터 필리핀 인력과 동원 숫자면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 왔으나, 낮은 임금을 무기로 많은 인력이 동원되면서 현장의 중요 직종보다 보조직과 일반직으로 활용되었다. 한국인 기능직 숫자가 빠르게 감소하면서 필리핀 인력이 그 자리를 대체해 가는 동안, 인도 인력은 중요한 위치를 거의 점유하지 못했고 보조직이나 일반직 등에 그대로 머무른 편이었다. 현장에서는 운영 전략상 반장과 작업자를 국적이 다른 인력으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한데, 필리핀 반장에 인도 작업자 구성이 많고 인도인 반장에 필리핀 작업자 구성도 볼 수는 있지만 극히 제한적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부정적 느낌의 영악한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다. 워낙 임금이 낮은 편인데 채용을 위해 너무 많은 수수료를 지불했기 때문에, 살아남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기본적 전제를 헤아린다고 해도,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너무 많았다. 90년대부터 방글라데시나 네팔과 베트남 인력 등에 밀려 숫자가 감소되자, 더욱 임금이 낮은 인력 동원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나 수준 저하라는 결과로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었다.

방글라데시

90년대부터 인도인보다 임금이 싼 방글라데시 인력이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매년 급격히 증가하였고, 아마도 현재는 제3국인이 투입되는 공사에는 국적별로 가장 숫자가 많을 것으로 본다. 방글라데시 인력도 송출회사를 통해서 공급되는데 송출회사들이 외국에 소재하기도 하며, 회사에 따라 수수료 차이가 많아서 실제 개인 소득은 계약 내용보다 훨씬 적다고 보면 된다. 이유는 다른 나라 인력보다 직종이 분명한 기능직이 적고 보조직이나 일반직이 많아서, 채용회사가 별도의 면접을 해서 직접 사람을 선발하지 않고 현지 송출회사가 선발 송출한 인력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철이 보기에 방글라데시인들은 평균적으로 상황 판단력과 언어 습득능력이 탁월한데, 어찌 보면 이런 종류의 능력들은 일맥상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회사에서 일하는 많은 3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소통하려 하지만, 방글라데시인 정도로 빨리 배우고 뜻과 느낌까지 이해하는 타국인은 본적이 없다. 그들과 일하고 만나며 깜짝 놀랄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사례 몇개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느날 방글라데시 기능직 한 사람이 자기가 속한 시공팀 과장에게 와서, 분명한 발음의 한국어로 말했다. "과장님, 저 리비아에서 대우 현장 소장님 따까리 했어요. 과장님 숙소에 도우미 필요 없어요?" 그는 때마침 형편없던 숙소 도우미와 대체되어 숙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는데, 그후 현장이 종료될 때까지 계약도 연장해가며 숙소를 지켰다. 기철에게 말한 현장 직원의 설명으로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본다. "아침에 간단하지만 개인 접시에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과일 한두개씩 직원수만큼 준비해요. 현장에서 흙 묻은 안전화와 안전모도 닦아서 현관에 정리해 놓습니다. 퇴근하면 청소와 빨래 다 되어 있고, 커피와 간식, 과일도 준비했다가 언제든지 달라면 줍니다. 직원들이 TV를 보거나 다른 일을 해도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모두 잠들면 그 때 치우고 가서 자요. 무엇보다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숙소 도우미로 최고입니다."


기철도 현장에 갈때마다 그를 보았지만,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레 미소짓는 인상이 좋았다. 기철은 직원의 말을 생각하면서 혼자 바쁘지 않은가 물었는데, 할 일과 순서를 적어놓고 하면 혼자서 감당할 수 있고, 낮에는 책도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자기도 만족한 처지로 근무를 하고 있으니, 미소도 인위적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초반부터 나이지리아에 현장을 운영하던 대우건설은 초기에는 대다수 현장에 한국인 주방장이 근무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젊은이는 없고 대체로 나이 지긋한 주방장들이 부임하다보니 현장의 젊은 직원들을 하대하는 경우가 많고, 건설 현장이기에 조금은 열악한 환경인데 이에 적응하기보다는 불만을 토로하며 행동이 거칠어지는 사례가 생기곤 하였다. 또한 한국인 주방장들은 메뉴도 잘 작성하지 않고, 직원들 전체의 기호나 영양을 챙기기보다는 자기가 잘하는 음식 종류를 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중국식당 출신이 현장에 주방장으로 오게 되면 싫든 좋든 시도 때도 없이 볶음밥이나 엉터리 짜장면을 먹기도 했고, 일식당 출신이 주방장으로 오면 각종 탕 류의 음식이나 튀김 등을 일년 내내 먹게 되는 식이다.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계속되던 중에 한국인 주방장 한 사람이 불시에 중도 귀국하게 되었는데, 후임을 채용해 현장에 부임하려면 2개월은 소요될 것이었다. 회사는 해결책으로 주방 보조로 근무하고 있던 방글라데시 요리사 K에게 한식 레시피를 주고 요리하도록 했는데, 직원들이 대부분 합격점을 주었고 그를 그대로 주방장으로 쓰기로 하였다 그 이후 여러 현장에서 한국인 후임으로 K가 추천한 방글라데시 주방장을 채용했고, 몇 년 사이에 나이지리아 전체 대우 현장에 방글라데시 주방장이 근무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이나 거주지에서 지인들을 불러 오기도 하였고 현장에 송출된 인력 중에서도 선발하는 등, 방글라데시 요리사 그룹이 생겨 새로운 현장이 개설되어도 자체로 인계 인수가 될 정도였다.


그들 대부분이 몇년씩 나이지리아에 근무하며 경험도 풍부해지고 한국말도 상당 수준 할 수 있게 되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뿐더러, 주어진 레시피 대로 요리하므로 식당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은 줄고 원가관리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제법 여러 명의 현장 출신 방글라데시 주방장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귀국한 후 현지에서 한국식당을 개업하여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현재는 많은 한국 건설사들이 해외 현장에서 한국인 주방장은 배제하고 주로 방글라데시 주방장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태국

태국 인력은 직원들은 거의 본적이 없고 기능 인력 비율이 높은 편이며, 동남아 인력들 중에서는 비교적 고기능 인력이 많은 편이었다. 태국 인력은 7~80년대에 비해 많아 감소했는데 주 이유는 인건비 상승이지만, 자존심이 높은 민족으로서 처우에 불만이 있으면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사유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않는 편이고, 개인이건 단체건 뒷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바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해 어려운 상황이 됙도 한다. 법보다 종교적 규율에 더 집착하고, 수긍이 안 되면 자유 허용도가 낮은 중동 국가에서도 파업을 강행하며, 발주처와 소속 회사만이 아니고 해당국가 주재태국대사도 힘들어 할 정도였다. 속된말로 표현하면 깡이 센 것인데, 반면에 타협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소문이 잘 퍼지고 보수적인 발주처들이 기피할 정도가 되어, 어려운 공종에 투입 가능한 고기능 인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수가 감소했다. 국가 간에 해결해야 할 정도의 문제를 자주 일으키자, 태국 정부에서 자국 인력 보호를 위해 조건을 강화하여 공기나 품질이 중요한 공사에서 차츰 배제되었다. 그동안 태국 인력과 일을 해 본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스마트하고 일을 잘 하는편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데, 기철은 전체 숫자가 계속 감소하여 아쉽고 한다.

베트남

해외에서 건설공사를 해 오면서, 가능하면 성향이나 기능도를 상세히 알 수 있는 한국 기능직을 많이 투입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비용을 감안하다 보니 차츰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해외 건설에 활용하는 여러 나라 기능직 인력들은 현장에 투입하면 기능은 즉시 드러나지만, 인성 즉 책임감과 소통 능력은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현장에서 일정한 테스트를 한 후에 자료를 수집하여 통계화 해보았다. 테스트는 간단한 업무 완수 여부에 대한 것이고, 통계를 위해 가능한 여러번 시도를 하였다. 테스트 종류는 두 가지였는데 가장 숫자가 많은 보편적 직종들을 선택했다.

 1. 목수에게 20개의 못을 박아야 완성될 업무를 주고, 못은 10개만 지급하여 결과를 본다.
 2. 기계와 배관, 전기 보조공들에게 3m길이의 파이프 2개를 주고, 1m 길이 파이프 10개를 준비하도록 한다.

두 개의 업무에 일을 끝내고 꼭 직접 보고하라는 입무를 주었다. 1번과 2번 업무를 끝내려면 못이나 자재가 더 필요한데,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가 보려는 목적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한국 기능직들은 신입이라도 국내이건 해외이건 100% 부족한 자재를 찾아서 일을 끝내고 직접 보고했다. "지시 받은 일은 끝내는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기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숫자가 많아 일반적으로 테스트를 한 국가의 인력도 있고, 통계치라 할만한 수치를 얻지 못한 국가도 있는데, 8~9개국 인력에 대해 결과를 정리했다. 이들 중 한국인과 같이 스스로 자재를 구해서 일을 끝낸 사람이 동일국가 전체 인력의 20%를 넘은 국가는 베트남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 부르기 전에 스스로 와서, 자재가 부족하여 일을 끝내지 못했다는 보고를 했던 사람의 비율이 30%를 넘은 국가도 베트남 외에는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베트남 인력들이 자재를 구해서 일을 끝내거나, 자재 부족으로 끝마치지 못한 것을 보고하는 등 지시대로 결과 보고를 한 사람이 80%에 달했다. 베트남 인력 외에는 보고도 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왜 일을 안 하는가 물으면 자재가 없다고 대답하고 그만이었다.


결국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있는 인력은 한국인 외에는 유일하게 베트남 인력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외 건설현장에 베트남 인력을 동원하기 시작한 시기가 오래되지 않았고, 직업 훈련도 걱정하게 되지 않아 숙련공은 차치하고 훈련된 기능인이 부족했다. 최근에는 베트남 국내에 일자리가 증가하여 해외를 선호하는 사람도 줄고 있는 추세이다.

네팔

네팔 인력들이 건설 현장에 나타난 것은 90년대 중반 무렵인데, 물론 그 전에도 활동은 했겠지만 대규모로 송출된 것은 90년대 들면서이다. 특정 공종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초기에는 주로 보조 역할로 일했고, 경험이 어느정도 쌓인 2천년대에 와서는 특수 기능직 외의 일반직에 부분적으로 채용이 되었다. 네팔 인력의 최대 강점은 충성심이 강해서 고용주에게는 절대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인데, 비상시에 돌관 작업을 하면 2주일 후에는 한국인과 네팔인만 남을 정도였다. 네팔 인력이 해외현장에 나타난지 10년이 넘고 평가도 좋아 숫자가 많아지자, 그들 임금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개인적 충성도 보다는 단체 의견을 따르는 추세가 되어갔다. 장점이 가려지고 임금이 상승하자 그들의 치명적 단점인 기능부족 부분이 부각되고, 결국 현장 인력들도 감소하기 시작하여 반 이상이 기국했다. 그러나 네팔 국내에는 건설공사가 별로 없어서 귀국한 기능 인력들의 경력이 단절되고, 네팔 정부가 정책으로 해외 취업을 권장하지는 않는 상태이며, 별도의 긴으 훈련이나 경험을 쌓을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근엄한 얼굴로 뚟ㅁ 있게 일하는 네팔인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국토 면적도 넓지만 인구가 세계 4위의 대국이다. 전체 인구의 90% 정도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서 세계에서 이슬람교인이 가장 많은 나라다. 글나 다른 나라의 이슬람 교도들과 같이 일상 생활을 종교에 맞춰서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외국인들은 평소에 이슬람 국가라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자국 인력은 별로 없고 제3국 인력이 대부분인 중동국가 건설현장에,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고 무슬림이라는 동질성을 가진 인도네시아 인력이 적은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로 본다. 첫째는 당연히 기능 인력의 부족이다. 인구도 많고 청년 인구도 많지만 기술직업 훈련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고 경험자도 없기 때문에 해외 현장의 건설인력으로 채용되지 못했다.


2천년대가 되며 정부 차원에서 해외 진출을 원하는 청년층의 의사를 받아들여, 중앙정부와 지방 정부 협력으로 직업 훈련소를 설치하고 훈련을 시켰다. 젊은이들은 필리핀 사례를 들며 기능훈련 유무가 미래를 좌우한다는 슬로건 아래 직업훈련을 받고 있는데 과정이 군대식인데도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과정 중 "현장에서의 행동 요령"이라는 과정이 있는데, 상사의 눈치와 분위기를 잘 살피라는 내용이 들어있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였다. 또 하나는 국내 경기가 많이 살아나서 훈련된 인력들이 국내 현장에 취업하는 사람들이 전보다 증가한 것인데, 해외에 진출하기 위해 훈련을 하고 상당수가 국내 현장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는 아니더라도, 해외 현장에 인도네시아인들이 차츰 늘어가는 추세이다.

중국

80~90년대까지 해외 현장에서 중국 인력을 채용하면, 어김없이 일년만 채우고 바로 귀국했다. 통상 다른 나라 인력들이 2년을 계약해 달라고 요구하고, 공사가 계속되는 한 계약을 연장하려고 하는 것과 비교할 때 의문이 생겼다. 후에 조사를 통해 알게된 이유는 세가지였다.

 1. 임금 문제   2. 가족 중시 문화   3.음식

우선 임금 문제인데, 초기에는 중국인 임금이 매우 낮아서 해외 현장에 가더라도 중국내에서 일할 때와 별로 큰 차이가 없고, 고생하며 해외에 가는 실익이 없었다. 또 하나는 중국인들이 가족을 중요시해서, 계약한 일년보다 더 헤어져 사는 것은 모두가 기피했다. 세번째로 중국인들이 지적한 것은 음식인데, 먹는 것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해외 현장에서 주는 일률적이고 열악한 음식은 절대 기피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중국 인력들은 일년 이상 경력을 가진 숙련공이 절대 부족했다. 하지만 인력을 공급하는 중국의 건설사들에게 요청을 하면, 5천명 정도의 인력은 일주일 이내에 동원할 수 있다고 해서 놀라기는 했으나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중국에는 인력만 공굽하는 회사는 없고, 건설회사가 인력 공급을 하나의 엄역으로 삼고 있다. 그 후 중국회사들이 이들에게 해외 근무에 대한 차별대우로 유인책을 삼았고, 음식과 후생도 국내와 별로 차이가 없어 중국회사에는 장기 근무자도 생겨났다.


최근에는 한국 건설사나 외국 건설사가 중국 인력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많은 인력이 있어도, 중국 건설사가 많아지고 계약 조건이나 임금 체계가 외국 건설사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즘은 중국회사들이 플랜트 공사도 수주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으나, 새천년이 되기 전 까지만 해도 장비는 별로 동원하지 않고 웬만한 공종들은 인력만으로 인해전술 식으로 해치웠다. 싼 인건비를 이용해서 대규모 인력으로 장비가 할 일을 대체해 나갔던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 국력 신장과 함꼐 팽창한 회사 규모에 기술력까지 가미한 중국 국영 회사들이 해외건설 시장에 나타나자, 해외 건설공사 수주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국가가 운영하는 초 대형 회사들이 저가 공세를 펴면 금액 등 계약 경쟁력으로는 감당할 방법이 없다. 중국 회사들 수주가 늘다 보니 외국 회사에서 예전과 같은 임금으로 일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가나

가나에도 현장이 있었고 서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가나인을 활용해 보았는데, 보편적으로 가나인들은 많은 아프리카 국가 인력들 중 가장 지능이 우수하고 순박한 성품으로 판단된다. 사회 분위기가 그래서인지는 정확한 판단이 어려운데, 대부분 인력들이 원칙대로 일 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같은 서부 아프리카 권역에도 많은 나라에 진출해 있다. 국외로 진출한 가나의 기능 인력들은 상당수가 반장이나 조장으로 일하는데, 아프리카 인력들이 다른 나라에서 반장과 조장을 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기본적으로 처음 일을 배울 때 제대로 배운 것이 주 이유일 것으로 판단된다. 지역적으로 토착어가 있으나 국내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스는 것도 강점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가끔 가나인들이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현장의 현지인 기능직들이 시기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어서 밀고로 인해 경찰이나 이민국의 표적 단속이 되기도 한다. 나이지리아나 카메룬 등의 건설 현장에서 경찰의 불시 단속으로 많은 가나의 기능직 인력들이 검거되어 추방당하는 광경을 보았는데, 대부분 반장이나 주요 직종 숙련공들이었다.


그 외에 파키스탄과 소말리아처럼 일상적인 동원 인력은 많지 않고 특수 지역에 있는 현장 등 경우에 따라 고려하는 국가들도 있는데, 이 두 나라 인력은 묘하게 힘쓰는 일에 동원되는 사례가 많았다. 아마도 힘들 잘 써온 전례까 있을지도 모르나, 기골이 장대해보이는 첫 인상 떄문이 아닐까 한다. 발주하는 공사가 많아 현장이 다수 개설되는 나이지리아, 리비아, 이란, 알제리 등은 현지인 기능직이라고 분류하여 제3국 인력과는 별도 분야로 보아야 한다. 이들 국가에서 현지인을 채용하면 해당 국가 노동법과 시장의 관레등을 상세히 알고 프로젝트만 아니라 제3국인들에 대한 반대 여론이 형성되는 것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성기철은 해외에서 일하며 성취를 이룬 적도 있고 실패한 사례도 있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문제를 만나지 않고 은퇴할 수 있던 것도 하나의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원래는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진행자는 교통사고에, 구술자는 코로나로 인한 자가격리중이니 사람일은 알수 없는 듯 하다. 더불어 성기철씨는 “더 할 얘기가 많으니 자가격리 끝나면 놀러오라”며 구술기록을 꺼려하던 처음과는 달리 한결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