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공업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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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高等工業專門學校)는 1916년에 서울에 설립되어 조선총독부가 운영된 관립공업전문학교이다.

상세

1895년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專習所)를 설립한 정부는 다시 1899년 6월 상과와 공과를 갖춘 상공학교(商工學校)를 설립하였다. 1904년 일본 제국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상공학교에 농과를 가설하여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로 다시 개교하였다. 농상공학교는 예과 1년에 본과 3년제로, 교원 10인에 직원 2인을 두었으며, 80명의 학생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대한제국 정부가 농상공학교에 예산을 편성해주지 못하게 되자 정상적인 운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80명이었던 학생은 둘째해에 18명, 셋째해에 15명으로 감소했고, 결국 졸업생을 배출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이후 1904년에 농상공학교로 개편, 농과·공과·상과로 나누고 예과 1년, 본과 3년으로 수업 연한을 정하였다. 1906년 통감부와 대한제국의 공업고문인 히라가 박사의 기획에 따라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분리ㆍ확대되어 1907년 2월 1일 공업전습소 관제가 반포됨으로써,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로 개편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 4월 21일에 개교하였으며, 1908년에는 공업전습소 교사가 완공되었다. 공업전습소 설립 당시에는 조선인 교관이 있었으나 이후 모두 일본인 교관으로 교체되었다.

1915년에는 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됨에 따라 이듬해에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편됐다. 교육목적은 공업에 대한 전문교육을 시켜 공업의 진보·발달에 필요한 기술자 또는 경영자를 양성하는 것에 있었다. 1916년 4월 1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관립 전문학교가 되었다. 이후 1922년 4월 1일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고 부속공업전습소는 분리되어 경성공업학교라고 칭하였다. 1944년 4월 6일 다시 경성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이 해 4월 방직·응용화학·토목·건축 및 광산의 5학과를 두고 응용화학과에 요업·염색·응용화학의 3부를 두게 되었다.

1939년 4월에는 광산학과가 분리, 경성광산전문학교로 이관되었으며, 1941년 3월에 이과양성소(理科養成所)를 부설하였다.1946년 8월에 서울대학교가 발족됨에 따라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대학 이공학부 등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통합, 흡수되었다.

특징

대한제국 말기 일본은 공업전습소를 일본의 도쿄고등공업학교와 같은 수준의 학교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일본의 직공학교와 같은 단기 실습 위주의 기술전습기관과 같았다. 하지만 공업전습소에서는 한반도에서 유사이래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공업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학교에 입학하자하는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1907학년도제1기 모집에서는 50명의 학생을 모집했는데 원서출원자가 1,200여명이었고, 2회 모집에서는 80명 모집에 2,000여명, 4회 때는 55명 모집에 2,500여명이 응시했다. 당시 재학생들은 조선 최초의 공학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공업연구회’라는 모임도 결성했다. 또, ‘공업업계’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기술잡지를 발간하였다. 공업전습소 1회 졸업생 배출은 1909년 4월 20일 하여 2년제 공학도를 최초 배출하였다. 당시 졸업생은 염직과 8명 도기과 9명 금공과 7명 목공과 7명 응용화학과 3명 토목과 12명이며 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에 실렸다. 공업전습소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에도 동일한 체제로 운영되었다,

졸업생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

참고

경성공업전문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성공업전문학교, 위키백과

작성자

정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