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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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신 스포츠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5]

개요

동대문운동장전경.jpg

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 Dongdaemun Stadium)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에 위치해있던 대한민국의 스포츠 시설 단지다. 애칭은 성동 벌판의 들머리라는 뜻의 성동원두(城東原頭)이다. 동대문운동장은 수많은 국내·국제 체육 경기가 벌어졌던, 대한민국 근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장소이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끝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했고, 주경기장의 경우 트랙은 우레탄 포장, 그리고 필드는 천연잔디를 깔았다. 28단의 스탠드는 3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부속 건물로 동대문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배구장 등이 있었다. 경성운동장이라는 명칭으로 1925년 10월 15일 개장, 이듬해 1926년 3월 31일 정식 준공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1985년 서울종합운동장이 개장되면서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 동대문운동장은 축구장과 야구장을 비롯한 모든 체육 시설을 통칭하는 용어이지만 축구장을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은 동대문야구장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시설 노후화로 인해 정상적인 운동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던 시절, 동대문운동장에는 스포츠 용품점과 벼룩시장이 있었으나 철거 이후 기존 스포츠 용품 시장 기능은 2호선 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 방향, 벼룩시장 기능은 인근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으로 이전되었다.

역사

건립 이전

훈련원.jpg[6]

경성운동장 터는 본래 조선시대부터 군사 훈련장의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한양도성과 함께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 화약제조 기관이었던 염초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애칭인 성동원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넓은 벌판을 지형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어 군사 훈련에 매우 적합했다.


하도감.jpg[7]

훈련원 벌판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이곳은 훈련도감에 속한 분영의 하나인 하도감이 위치해있었으며, 경성운동장 건립 당시 야구장 일대를 품고 있는 지역이었다.

건립

당시 경성운동장의 공식 명칭은 ‘동궁전하어성혼기념(東宮殿下御成婚記念) 경성운동장’으로 건립목적에서 공식 명칭의 의미를 알 수 있다. 1925년, 일본 동궁이자 훗날 쇼와 일왕이 되는 히로히토의 결혼이 발표되어 일본 각지에서 기념사업이 한창이었다. 이를 위해 경성부에서도 무언가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실시해야 할 입장이었다. 경성부협의회 다화회에서는 1924년 1월 16일 일본 황실 황태자의 결혼식이라는 일본의 최대 경사를 경축하는 뜻을 담는 동시에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을 건립의 이유로 삼아 결혼기념사업 일환으로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8] 다시 말해 경성운동장의 건립은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경성운동장의 부지가 조선시대의 훈련원(訓練院) 자리와 성벽을 허물고 남은 공터였던 만큼, 한민족에게는 식민통치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굴곡이 뒤엉킨 자리에 그것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명분으로 건설한 것이 바로 축구장, 육상경기트랙,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을 아우르는 '동양 최대의 종합경기장' 경성운동장이었다.


경성운동장성벽위치.jpg[9]

붉은색 선이 성벽의 위치이다. 정확히 가운데를 관통해 지나간다.


경성운동장 설계 개요 (1925.10.15 개장, 총면적 22,700평)[10]
구분 면적 수용관중 비고
육상경기장(500m) 8,500평 15,000명 원설계 400m
야구장 5,500평 7,000명 천막 설치(1926.12)
정구장 1,200평 3,800명 전면개수공사(1935.8)
수상경기장 600평 - 낙성식(1934.6.30)
마장 550평 - -
식수 지생지 도로 6,350평 - -


[11]

경성운동장은 경성부의 토목기사 오오모리 설계, 토목과장 이와시로의 공사지휘로 1925년 5월 24일에 기공하여 같은 해 10월 15일에 개장식이 개최되었다. 총면적 22,700평, 총 공사비 155,000원(약 34억), 총 수용인원 25,800명이며 육상경기장 8,500평(15,000명), 야구장 5,500평(7,000명), 정구장 1,000평(3,900명)의 규모이다.[1]

시설

  • 주경기장 : 개장 당시에는 육상 전용 경기장이었지만 피치를 다듬으면서 육상경기와 더불어 축구경기를 할 수 있는 다목적 경기장으로 기능했다. 주로 축구 경기에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동대문축구장으로 많이 불리었다.
  • 동대문야구장 : 대한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성지였던 장소로, 프로야구 출범 이전 196~70년대까지 고교야구와 실업야구의 중심지로써 한국 고교야구 4대 대회(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실업야구, 대학야구가 개최되었으며, 1982년 출범한 한국의 프로야구 리그인 KBO 리그의 역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 배구장 : 대한민국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이 들어서기 전에 주로 사용했던 체육관으로 지붕이 없는 노천체육관이었다.
  • 수영장 : 미스코리아 대회의 수영복 심사장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 테니스장 : 최초 건립 당시 명칭은 정구장이었다.
  • 동대문운동장역 : 1983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 당시 서울운동장역이었으나 이후 1984년 잠실에 서울종합운동장이 완공된 이후 구별을 위해 동대문운동장역으로 역명이 변경되었다. 동대문운동장 철거이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역명이 변경되었다.

역사

경성운동장 (1925~1945)

건립후 광복 전까지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조선자전거경기선수권대회 등 각종 대회의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근대적인 경기장으로는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과 평양이 축구로 겨루는 경평축구대회(경평전)의 서울측 홈구장이기도 했다. 제2회 경평축구대회에는 2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하기도 하였다

서울운동장 (1945~1984)

또한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수많은 A매치가 열려 한때 한국 축구의 성지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와 1988년 하계 올림픽 당시 브라질 대 아르헨티나의 8강전을 비롯한 국제축구대회들의 경기들이 개최되었다.

동대문운동장 (1984~2000)

대한민국 축구의 클래식 더비 매치인 경평축구대항전을 비롯하여 한국 프로축구 수퍼리그의 역사적인 원년 출범 경기를 비롯해서 일화 천마 (현 성남 FC)가 1989 시즌부터 1995 시즌까지, LG 치타스 (현 FC 서울)가 1990 시즌부터 1995 시즌까지,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가 1991 시즌부터 1995 시즌까지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였다.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들이 지방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는 K리그의 중립 경기와 특정 리그컵 경기들이 벌어졌으나 2000년 10월 22일 성남 일화 천마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리그컵 (아디다스컵) 결승전 경기를 마지막으로 프로축구 경기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한편, 1996년 연고지를 천안-안양으로 각각 이전한 일화 LG는 당시 홈구장으로 쓰인 천안오룡경기장 안양종합운동장에 야간조명시설이 없어 그 해에 대부분 동대문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뤘으며 안양종합운동장은 1997년 5월 야간조명이 설치됐고 일화는 앞서 본 것처럼 1996년 연고지를 천안으로 옮기면서 홈구장으로 사용한 천안오룡경기장에 조명시설이 없어 야간경기가 불가피한 혹서기에 접어들자 1999년 동대문운동장에서 4번 홈경기를 치렀다.

용도변경 (2001~2008)

8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온 만큼 낡은대로 낡아서, 안전상의 이유로 정상적인 운동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가장 단적인 예로 동대문야구장의 철거 직전이었던 2007년에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가 정규시즌 일부 경기를 고별경기 형식으로 치르려 기획했다가 노후된 경기장 시설 때문에 철회됐던 적이 있었다.

2001년 일부 부지가 체육공원과 도로로 조성되면서 수영장, 씨름장, 테니스장은 소멸하게 된다.

이로 인해 2003년에 주경기장은 폐쇄되었으며, 철거전까지 주차장과 풍물시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청계천 공원화 사업으로 청계천 등지에서 노점상이 장사할곳이 없어지자 동대문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겨 장사를 하기도 한다. 경기장 안에 시장과 주차장이 있는 기묘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많았다.

철거

서울의 디자인을 시정의 핵심 가치로 설정한 오세훈 시장은 2006년 서울시장 선거 공약으로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고 그곳에 새로운 패션사업의 허브를 조성하기 위해 디자인과 문화의 옷을 입히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 10월 야구장과 축구장을 포함한 동대문운동장 전 시설에 대해 전면 철거 및 재개발이 결정되었다. 철거가 임박한 2007년 여름 체육시민연대 문화연대, 전국노점상총연합, 프로야구선수협의회 등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반대 투쟁에 나섰으며[12],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와 대한야구협회 등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 단체는 같은 해 10월 25일에 공동 성명을 발표해 철거 반대의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12월 18일 구장의 철거 작업이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에 발파하여 완전히 철거되었다.

2007년 3월 19일 서울시와 야구계는 아마추어 야구를 위한 대체구장 확보를 핵심내용으로 한 '동대문야구장 철거에 따른 합의서'를 체결함에 따라, 서울 지역 내에서 양천구 신월동과 광진구 구의동 등지에 대체 야구장이 건립됐다. 이후 대한민국의 아마추어 야구의 주요 대회는 목동야구장과 수원야구장 등지에서 개최되고 있다.


고척돔.jpg[13]

구로구 고척동에 하프 돔 구장 형태로 동대문야구장의 대체 야구장을 지으려고 했으나, 완전 돔 구장으로 설계가 변경되었고, 지금의 고척 스카이돔이 되었다.

야구장 1층에서 운영되던 스포츠 용품 전문점의 대부분은 잠실 서울올림픽주경기장 인근으로 이전됐고, 인근의 노점상 역시 다른 지역으로 이전됐다.


한편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된 자리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서면서 사거리 이름, 버스 정류장명도 이에 따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거리로 변경되었다. 인근의 2호선과 4호선, 5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인 동대문운동장역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개명하였다.[14] 철거 이후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이 인근에 신설되었다.


이간수문.jpg[15]

또한 이 지역의 일부는 서울성곽이 있던 곳으로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인 이간수문도 있었는데, 당초 신축과정에서 이간수문과 주변 성벽이 헐려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서울특별시에서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DDP 및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던 중 발견되었다.[16] 처음에는 홍예 및 교각 상부 일부만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바닥까지 발굴하여 그해 11월에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당시 80년 넘게 땅에 묻혀있었는데도 홍예 일부를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평가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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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작성자

정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