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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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52년(철종 3) ~ 1919년. 조선 제26대 왕


개설

재위기간은 1863년에서 1907년까지다. 아명은 이명복(李命福), 초명은 이재황(李載晃)이었으며, 후에 이희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성림(聖臨)이고, 후에 명부(明夫)로 고쳤다. 고종의 호는 성헌(誠軒)이다.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일생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익종비 조대비의 전교로 즉위했다. 당시 왕의 나이 12세였으므로 생부인 흥선군이 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사를 결정했다. 대원군의 집정 10년 후, 친정(親政)케 되었으나, 왕비 민씨의 일족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대원군 때의 보수 및 쇄국 정책을 배제(排除), 일본을 비롯한 구미 열강과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정에 있어서의 개화당과 수구당과의 알력을 격케 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 제반 문물의 시찰, 군제의 개혁, 일본식 군사 훈련 등을 시행하여 결국 임오군란(壬午軍亂 : 1882) · 갑신정변(甲申政變) 등 양당의 격쟁을 야기시켰다. 1894년 동학란을 계기로 청일 전쟁을 유발, 일본측의 승리 후는 차츰 일본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 종래의 청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국으로 행사하는 듯했으나, 이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억제하에 비롯된 것이다.


한 때 일본 세력의 미약함을 알아 일본 대신 러시아와 결탁한 민씨 일파를 통하여 일본의 세력을 구축하고, 1897년(고종 34) 8월에는 국호를 대한(大韓),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으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 후, 일본의 강압을 받게 되었다. 1905년 제2 한일 협정을 반대하고, 1907년 제2회 만국 평화회의이준 등에게 신임장을 주어 제2 한일 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밀파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결국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퇴위했다. 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 기거하다가 일본의 간계로 독살되었다.

고종의 사망

사망 당일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갑자기 뭔가를 마시다가 쓰러졌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 때에도 심하게 부풀어져 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었고, 혀가 닳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했다.

대한제국 선포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 '광무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갑신정변을 주도한 일파 중 한명)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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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종 환구단 A는 B에서 대한제국의 개국 전에 제사를 올렸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고진

기여자 : 김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