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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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1876~1949)

개요

김구(金九) 1876~1949.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했다.

생애 및 활동

1876년 황해도 해주 출생. 본관은 안동, 호는 백범, 아명은 창암. 본명은 창수였으나 구로 개명했고 법명은 원종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았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5세에는 정문재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하였다. 후에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였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활동 요약

연도 활동
1876 황해도 해주 출생
1895 동학농민운동 지휘하다 만주로 피신
1909 신민회 회원으로 구국운동에 가담,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투옥 후 석방
1911 안명근사건(안악사건)의 관련자로 17년형 선고
1914 감형으로 가출옥
1919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1929 한국독립당 창당
1931 한인애국단 조직
1932 이봉창의거, 윤봉길의거 주도
1940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취임
1948 남한 단일 총선 반대
1949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작품 및 저서

김구의 자서전. 1947년 12월 15일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김구의 아들 김신이 펴낸 초판본이 지금까지 나오는 여러 판본의 필두이다.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다.

수상내역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구 독립운동가 A는 B이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