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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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金起林, 1907년 4월 5일 ~ ?)은 한국의 시인·문학평론가이다.

1933년 구인회에 가담하여, 주지주의에 근거한 모더니즘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였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정치주의적 시를 주장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시집《기상도》,《태양의 풍속》, 저서에《문학개론》,《시의 이해》등이 있다.



약력

학력사항

  • 1915년 ~ 임명보통학교
  • 1921년 ~ 보성고등보통학교(중퇴)
  • ~ 1930년 일본 니혼대학교 - 문학예술학
  • ~ 1939년 일본 토호쿠제국대학교 - 영어영문학



경력사항

  • 1931년 ~ 무곡원 과수원 경영
  • 1931년 ~ 조선일보 기자
  • 1933년 ~ 구인회 동인 활동
  • 서울대학교 강의
  • 중앙대학교 강의
  • 연세대학교 강의
  • 조선문학가동맹 참여



연보

1908년 5월 11일 함경북도 학성에서 출생.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

1930년 일본대학 문학예술과 졸업.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조선일보≫에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발표하며 등단.

1931년 ≪조선일보≫에 평론 <시의 기술, 인식, 현실 등 제문제> 발표.

1933년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구인회> 결성.

1936년 첫 시집 ≪기상도≫ 간행.

1939년 두 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 간행.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1946년 시집 ≪바다와 나비≫와 평론집 ≪문학개론≫ 간행.

1948년 시집 ≪새노래≫, 수필집 ≪바다와 육체≫간행.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납북.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중학[立敎中學, 또는 名敎中學이라는 설도 있음]에 편입했다.

1930년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문학예술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 뒤에 신설된 학예부 기자로 옮겼다.

1933년김유정(金裕貞)·이태준(李泰俊) 등과 구인회(九人會) 결성에 참가하고, 1936년에 재차 도일, 센다이(仙台)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리처즈(Richards, I. A.)론이었다. 귀국 후(1939)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40년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으로 한때 실직했으며,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 때의 제자에 시인 김규동(金奎東)이 있다.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하였는데, 이 때 많은 서적과 가재를 탈취당해 곤궁한 나날을 보냈다.

1946년 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 때 ‘우리 시의 방향’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나, 정부수립 전후에 전향하였다.

월남 후 중앙대학·연희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고, 그가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북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1990년 6월 9일에 동료 시인 김광균, 구상 등이 주도하여 모교인 보성고등학교에 김기림을 기린 시비를 세웠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生活)로」(『조선일보』, 1930.9.6.)·「슈르레알리스트」(조선일보, 1930.9.30.)·「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1.23.)·「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학등』 창간호, 1931.10.)·「고대 고대(苦待)」(『신동아』 창간호, 1931.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관한 단상(斷想)인 「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1.27.)·「시의 기술·인식·현실 등의 제문제」(『조선일보』, 1931.2.11∼14.) 등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주로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문학적 활동

김기림의 문학적 활동은 창작과 평론 활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감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새로움의 추구로 요약된다. 그는 과거의 시들이 감상주의에 사로잡혀 허무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고 명랑한 ‘오전의 시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김기림이 근대화와 그에 따른 물질문명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써, 시에서 역시 밝고 건강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초기의 김기림의 시들은 『태양의 풍속』에 수록되어 있다.

중기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불안사조의 유행과 근대화의 허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보여준다. 김기림은 시각적 이미지 또는 회화성만을 추구하는 시는 또 하나의 순수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시는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산물인 인텔리겐챠로 파악되며, 대중에게 시대의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장시 「기상도」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후기의 작품은 광복을 전후한 시기로서, 이때 김기림은 문학의 사회 참여를 가장 중요한 역할로 꼽고 있다. 그가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고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글을 발표한 것은, 시대정신을 전달하는 것을 시의 목표로 설정했던 중기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광복기를 시인이 공동체 속에서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바다와 나비』에서 보였던 우울하고 개인적인 성향 대신 『새노래』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강하고 희망찬 의지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정부 수립과 더불어 전향을 한 후에는 자신의 시론을 정리하고, 『문장론 신강』 등의 문학이론서를 내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그가 우리나라 문학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주지주의 시의 도입과 그 창작,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시학(詩學)의 정립을 위한 노력, 자연발생적인 시를 거부하고 의식적인 방법에 의한 제작의 강조, 음악이나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지성의 강조, 민족 및 사회현실의 수용과 모더니즘의 극복, 그리고 전체시의 주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학세계

T. S. 엘리엇에게서 영향받아 주지주의 이미지즘 시를 주로 썼다. 동시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을 뿐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런 결점들은 찿복되었다. 평론 면에서는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한 전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목록

김기림의 작품목록
  • 오후와 무명작가들
  • 시인과 시의 개념
  • 정조문제의 신 전개
  • 최근 해외문단 소식
  •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프로필
  • ‘피에로’의 독백
  • 표절행위에 대한 ‘저날리즘’의 책임
  • 시의 기술‧인식‧현실 등 제문제
  • 식전의 말, 우리의 문학
  • ‘인텔리’의 장래
  • 상아탑에의 비극
  • ‘홍염’에 나타난 의식의 흐름
  • 문예시평
  • 1932년의 문단전망
  • 네게 감화를 준 인물과 그 작품
  • 신민족주의 문학운동
  • 청중없는 음악회
  • 현문단의 부진과 전망
  • 김동환론
  • 신문소설 올림픽 시대
  • 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적 태도
  • 비평의 재비판
  • 협전을 보고
  • 스타일리스트 이태준을 논함
  • ‘무기와 인간’ 단평
  • ‘포에지’와 ‘모더니티’
  • 최근의 미국 평론단
  • 현대 예술의 원시에 대한 욕구
  • 문단시평
  • 모윤숙씨의 리리시즘-시집 ‘빛나는 지역’을 읽고
  • 예술에 있어서의 ‘리알리티’, ‘모랄’문제
  • 1933년도 시단의 회고와 전망
  • 입춘 풍경
  • 1934년을 임하여 문단에 대한 희망
  • 문예시평
  • 현대시의 발전
  • 문학상 조선주의의 제양자
  • 신휴매니즘의 요구
  • 장래할 조선문학은
  • 신춘조선시단 전망
  • 시에 있어서의 기교주의 반성과 발전
  • 현대시의 기술
  • 오전의 시론
  • 현대시와 육체
  • 현대시의 난해성
  • 오전의 시론-기초편 속론
  • 객관에 대한 시의 ‘포즈’
  • 시대적 고민의 심각한 축도
  • 오전의 시론-기술편
  • 현대비평의 딜렘마
  • 사슴을 안고
  • 시인으로서 현실에 적극적 관심
  • 을해년의 시단
  • ‘정지용시집’을 읽고
  • 걸작에 대하야
  • 기상도
  • 과학과 비판과 시
  • 고(故) 이상의 추억
  • 오장환씨의 시집 ‘성벽’을 읽고
  • 여행
  • 현대와 시의 르네쌍스
  •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
  • 푸로이드와 현대시
  • ‘촛불’을 켜놓고
  • 시단의 동태
  • 태양의 풍속
  • 문학의 제문제
  • 언어의 복잡성
  • 조선문학에의 반성
  • 감각‧육체‧리듬
  • 과학으로서 시학
  • 문단불참기
  • 시인의 세대적 한계
  • 시와 과학과 회화
  • 이십세기의 서사시
  • 시의 장래
  • 과학과 인류[멘돌라 작]
  • ‘동양’에 관한 단장(斷章)
  • 우리 시의 방향
  • 건국과 지식계급-좌담회
  • 시단별견
  • 새로운 시의 생리
  • 민족문화의 성격
  • 바다와 나비
  • 문학개론
  • 전진하는 시정신
  • 민족과 문학의 융성에 필히 성공되기를 염원
  • 정치와 협동하는 문학
  • 민족문화의 수립
  • 시론
  • 문학의 전진
  • 새 문체의 확립을 위하야
  •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과 기술
  • 낭독시에 대하여
  • 분노의 미학
  • I. A. 리챠즈론
  • T. S. 엘리어트의 시
  • 바다와 육체
  • 기상도[재판]
  • 새노래
  • 체험의 문학
  • 이상(李箱)문학의 한 모습
  • 민족문화의 성격
  • 시의 이해
  • 문화의 운명
  • 소설의 파격
  • 시조와 현대
  • 문장론 신강
  • 김기림 전집
  • 새나라 송(頌)



모더니즘의 성과

구인회와 모더니즘

새로움을 향한 변혁의 열정과 함께 ‘구인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은 처음 얼마 동안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현대성 이론에 압도되어 서구 모델의 모방에 그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모더니즘 문학은 이윽고 내용 편중의 리얼리즘 문학이 판치던 우리 문단에서 기교의 복권을 실현하고,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울러 구인회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스트 진영은 국내의 혼미한 정치 상황 속에서 현실을 간과한 예술 지상주의에 빠지고 지나치게 기교에 매달려 “소외, 퇴폐성, 도피의 징후”를 보인 것에 대해 반성하고, 저마다 그동안의 문학 노선을 점검·보완·수정한다.2) 이로써 모더니즘의 영역은 더욱 다양하고 포괄적인 문학 양식을 낳으며 1930년대를 한국문학의 새로운 르네상스라 불리게 할 만큼 다채롭게 장식한다.

1930년대에 활동한 ‘구인회’의 발생론적 근저를 살펴보면, 식민지 체제에서 발양된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획득이라는 새로운 물적 토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사회는 식민지 치하에서도 조금씩 “개인의 존재와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현대 사회로 이행한다. 그런데 이렇듯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서 성립된 현실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다 보면 이전의 방법론으로는 미흡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문학의 새 패러다임으로 채택된 것이 모더니즘이고, 그 중심에 선 것이 구인회다. 모더니즘은 서준섭이 지적하는 것처럼 퇴폐성과 문학의 물신주의라는 병폐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더니즘이 다채로운 실험적 양식을 낳으며 우리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1930년대 문학의 전위였다는 사실이다.

김기림은 1930년대에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던 ‘구인회’ 회원 중에서도 대부로 꼽히곤 한다. 정지용, 김광균, 이상 등이 스스로 모더니스트를 자처하거나 창작으로만 앞 세대에 반발하며 문학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 데 비해 그는 이론 또한 아우른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을 소개하고 이의 정착을 시도할 뿐 아니라 자기 나름의 시론까지 창안한다. 이 가운데 하나가 1935년에 나온 「오전의 시론」이다.



시론과 시

「오전의 시론」은 1920년대 초의 과잉된 낭만과 1930년 전후에 세를 떨친 프로 문학의 내용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모더니즘 성향의 문학이론이다. 1936년에 들어 김기림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이라도 하려는 듯 장시집 『기상도(氣象圖)』를 펴낸다. 「기상도」는 파시즘의 확산과 함께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 속에서 짚어낸 현대 문명의 징후를 태풍 전의 일기 예보에 빗대어 풀어놓은 작품이다. 장시 「기상도」에서 김기림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이미지를 충돌시켜 사전적 언어와 다르게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는 감각과 기교로 과연 모더니즘의 기수다운 면모를 보인다.

시인은 시를 제작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한 개의 목적=가치의 창조로 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도된 가치가 시로써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표현주의적 방법에 대립하는 전연 별개의 제작상 방법이다. 흔히 그것을 주지적 태도라고 불러왔다. - 김기림, 「시의 방법」, 『시론』(1947)

이 무렵 <조선일보>를 나온 김기림은 잠시 고향 성진에 가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시와 시론의 연구에 몰두해 <조선일보>와 《신동아》에 「시의 모더니티」, 「현대시의 표정」, 「포에지와 모더니티 요술쟁이의 수첩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티, 모랄 문제」, 「1933년도 시단의 회고와 전망」, 「시평의 재비평」 같은 논문을 발표한다. 김기림은 이 글들을 통해 시는 자연 발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제작 의식과 방법론에 따라 가치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여태껏 현대성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 시에 반성을 촉구하고, 과학적 비평에 입각한 주지주의적 문학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울러 정지용 등과 함께 ‘구인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조선일보>와 《삼천리》, 《신동아》와 《신가정》 등에 「훌륭한 아침이 아니냐」, 「꿈꾸는 진주여 바다로 가자」, 「출발」, 「3월의 프리즘」, 「살수차(撒水車)」, 「날개」, 「고대(苦待)」, 「아침 송가」, 「가을의 과수원」, 「십오야」, 「고전적인 처녀가 있는 풍경」, 「커피잔을 들고」, 「나의 탐험선」, 「임금 밭」, 「일요일 행진곡」, 「가거라 너의 길을」, 「어둠의 흐름」 등 많은 시편을 발표해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로 활약한다.



문학적 반성

일찍이 엘리엇의 「황무지」에 매혹된 바 있는 김기림은 영문학에 대한 소양과 보기 드문 현대 감각을 과시한 「기상도」를 내놓아 최재서로부터 극찬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때마침 임화와 박용철 사이에 벌어진 ‘기교주의’ 논쟁에서 비판의 표적이 된다. 임화는 장시 「기상도」가 서구 문명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이국 취향, 지나친 기교, 현란하고 추상적인 관념어의 남발 등으로 치장한 채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작품이라고 공격한다. 이와 같은 신랄한 비판에 대해 김기림도 자신의 시가 더러 세부 묘사나 기법에 치우쳐 문명 단위의 총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 반성하게 된다. 이후 김기림은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엘리엇식의 주지주의에서 벗어나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중시한 스펜더식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더니즘 기법과 사회의식을 아우른 ‘전체 시론’을 창안하게 된다.

1939년 9월 김기림은 그동안 여기저기 발표한 시편을 묶어 두 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을 펴낸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그는 ‘동양적’ 감상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오후의 시에서 벗어나 건강한 아침의 시로 태양의 풍속을 배울 것을 다시 한번 권고한다.

1940년 <조선일보> 폐간 이후 같은 계열의 잡지사 <조광사>에 잠시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경성공립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문학적 공백기를 갖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는 해방 뒤 서울대, 중앙대, 연희대 등의 전임교수를 지내는 한편 동국대, 국학대 등에 출강한다. 1946년 4월 김기림은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과 문학적 방황을 보여주는 시집 『바다와 나비』를 <신구문화사>에서 펴낸다.

김기림은 방향 전환 이론인 ‘전체 시론’을 내놓은 뒤부터 꾸준히 시의 현실 참여를 부르짖지만, 정작 스스로 창작한 시편들에서는 이것이 별로 실천되지 않는다. 1947년 그는 좌익 성향의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고, <백양당>에서 시론집 『시론』을 펴낸다. 1948년 4월에 내놓은 시집 『새노래』에서 그는 시의 현실 참여 문제와 관련한 반성 끝에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속담대로 죽어가면서도 제정신만은 잃지 말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건저 내놓고 보니 그것은 청결하기는 하나 피가 흐르지 않는 한낱 ‘미이라’였다. 시의 소생을 위하야는 역시 사람의 흘린 피와 더운 입김이 적당히 다시 서꺼야 했다. - 김기림, 「새노래에 대하야」, 『새노래』(어문각, 1948)

시집 『새노래』에는 광복을 맞은 감격과 새 나라 건설에 따른 격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시편들이 실려 있다. 추상성에서 벗어난 이 시편들은 그의 예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새노래』에 묶인 시편들은 감정의 토로가 지나친 나머지 시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초기의 주지주의적 시에도 못 미치는 느낌이 든다. 감격과 격정에 가려진 현실의 모순과 어둠을 직시하지 못한 것 또한 현실참여 문제와 관련한 김기림 문학의 한계를 보여준다. 실생활에서도 그는 사회주의 단체인 ‘문학동맹’에 가입하긴 하지만 지주 집안 출신의 지식분자로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 끼여 방황하게 된다. 김기림은 동국대 교수 재직 당시 발발한 한국전쟁 때 정치보위부에 연행,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다.

시와 시론 외에도 김기림은 「떠나가는 풍선」, 「천국에서 왔다는 사나이」, 「어머니를 울리는 자는 누구냐」, 「미스터 뿔떡」 등의 희곡과 「어떤 인생」, 「번영기」 등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문에서 모더니즘 문학의 성과를 남긴다.


장시집 『기상도』

김기림(金起林, 1908~?)은 모더니즘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지만, 특히 이론적으로 관심을 두고 파고든 분야는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다. 더러 그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기도 한다. 그는 1933년 7월 《신동아》에 발표한 「시의 모더니티」에서 모더니즘에 대해 언급한 데 이어, 1935년 2월 《시원》 1호에 게재한 「현대시의 기술」에서 파운드(Pound, E.)의 이미지즘 이론을 소개한다. 이미지즘의 특징으로 그가 꼽은 것은 감정의 배제, 영상성, 조소성, 회화성 등이다. 그는 또 20세기 시의 회화성 형태를 외형적인 미와 내용성의 미로 크게 나누고, 전자는 문자가 활자로 인쇄될 때의 자형 배열 등으로 나타나며, 후자는 개인의 의식 속에 가시적인 영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서, 후자에 더 중점을 둔 이미지즘 문학이론을 소개한다.

그는 이미지즘을 추구하는 국내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정지용김광균 등을 들고, 원론적 비평을 넘어 실천적 비평으로 문학이론의 영역을 확대해나간다. 이미지즘을 강조한 그의 또 다른 글로는 1939년 《인문평론》 12월호에 실린 「시단의 동태」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김기림은 흄의 사상과 이론을 바탕으로 시의 음악성과 회화성을 비교하며, 회화성을 고정적이고 영구적인 것으로 규명한다. 따라서 무기적·기하학적 회화성이야말로 혼란과 동요를 극복할 수 있는 요소며 안정을 찾는 현대의 소리라고 주장한 그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기림은 1935년 <조선일보>에 투고한 「오전의 시론」과 《신동아》에 게재한 「포에지와 모더니티」, 「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 등을 통해 기술 과학문명의 현저한 발달 속에서도 여전히 감상적 낭만시나 읊조리는 센티멘탈리즘은 물론, 정치·사상성에 편중된 내용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그는 현대문명의 발달에 따라 문학도 새로운 양식 실험으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주지주의다. 김기림은 “실로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사상과 논의의 의견이 거의 선인들에 의하여 말해졌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능한 최대의 일은 선인이 말한 내용을 다만 다른 방법으로 논설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 방법으로 지성을 강조하고 표현 면에서 형식이나 언어의 기교를 중시하는 모더니즘 이론을 펼친다.

이윽고 김기림의 이론에 대해 프로 문학 진영의 임화를 비롯한 비평가들이 공격을 가한다. 그들은 김기림이 내용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으며, 표피적 기교주의에 함몰된 이론가라고 몰아붙인다. 김기림은 프로 문학 진영의 반론을 받아들여, 프로 문학에서 중시하던 내용과 자신의 기교주의에서 발양된 형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전체 시론’이라는 변형된 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은 1933년에 발족한 ‘구인회’를 중심으로 1930년대 문단을 주도한다.



구인회

1930년대 초반 문단에서 맹위를 떨치던 리얼리즘 문학만주사변과 경제 공황 그리고 카프 맹원 검거 등으로 침체기에 빠져들자, 모더니즘은 한국 문단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다. ‘구인회’는 국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모더니즘 중심의 문학 모임이다. 그러나 구인회는 발족 당시 문인들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한 이종명과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감독을 겸하고 있던 김유영이 순수 예술에 뜻을 같이하는 이태준, 이무영, 이효석, 유치진,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을 모아 구인회를 꾸린 것이다.

영화감독과 극작가 등의 가담으로 알 수 있듯이, 구인회는 문학만이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친 관심을 내포한 채 출발한다. 구인회의 아홉 회원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정치성이나 목적성에 회의를 품고 있던 만큼 조직의 경직성에서 탈피, 강령과 규약 없이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모임을 이끌어간다.

구인회는 이후 몇 차례 회원 교체를 거치면서 점차 시인과 소설가, 비평가들로 이루어진 문학 모임으로 성격이 바뀐다. 결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족 당시의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 세 사람이 나가고 박팔양, 이상, 박태원이 들어오며, 조금 지나서 다시 유치진, 조용만이 나가고 김유정, 김환태가 들어와 비로소 회원이 확정된다.

구인회는 다달이 한두 번 시 낭독이나 문학 강연회를 하는 정도로 모임을 꾸리고, 기관지 《시와 소설》도 단 한 번밖에 펴내지 못한다. 지난날 잡지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던 유파들에 비하면 구인회는 이념적 구심점도 없고 활동도 미미해 지리멸렬한 단체로 비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나머지 의견 불일치로 몇 번의 회원 교체가 있었을망정, 이상과 김유정의 죽음으로 불가피한 결원이 생길 때까지 이 모임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예고하는 역량을 드러내며 아홉 명의 정원을 철저하게 지켜나간다.

박승극이 <동아일보> 1934년 6월 5일 자에 기고한 「문예와 정치」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의 결성의 근거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명확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말하자면 회원을 얽어매는 이념과 목표가 따로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정신적 부담을 덜어줘 아홉 명의 민감한 예술가로 하여금 제 빛깔을 잃지 않고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만든 측면도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해체 이후까지 구인회 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행적이 한국 문단사에 여러 갈래로 자취를 남긴 것으로도 입증된다.

구인회는 초기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구심점 구실을 한다. 그러나 구인회 회원 모두를 모더니스트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구인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수법은 회원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해 “주지주의,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심리주의, 신감각파 등 잡다한 경향”을 포괄한다. 구인회는 이런 여러 경향에 그치지 않고 때로 전통적 소재와 모더니즘 기법을 접목시켜 갖가지 형태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펼치며 모더니즘 문학의 경계를 한껏 넓히는 한편, 어찌 보면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인회
창립 회원 김기림 · 이효석 · 이종명 · 김유영 · 유치진 · 조용만 · 이태준 · 정지용 · 이무영
대체 회원 박태원 · 이상 · 박팔양 · 김유정 · 김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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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

김기림. (2016). 태양의 풍속 1939년 학예사 오리지널 디자인,김기림 시집,초판본. 소와다리.

김기림. (2004). 김기림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9. 돌베게.

이숭원. (2008). 김기림 그들의 문학과 생애. 한길사.

김용직. (1997). 김기림 모더니즘과 시의 길,문학의 이해와 감상 100. 건국대학교출판사.



관련 학술자료

윤대석. (2006). 김기림 시론에서의'과학'. 한국근대문학연구, 7(1), 227-251.

이미순. (2007). 김기림의 시론과 풍자. 한국현대문학연구, 21, 143-174.

오세영. (2002). 김기림의'과학으로서의 시학'. 한민족어문학, 41, 259-294.

김진희. (2005). 김기림의 전체시론과 모더니즘의 역사성. 한국근대문학연구, 6(1), 24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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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김기림 구인회 A는 B의 소속이다
김기림 서울대학교 A는 B에서 강의하였다
김기림 조선문학가동맹 A는 B의 소속이다
김기림 모더니즘 A는 B의 경향을 띈다.
김기림 조선일보 A는 B의 소속이다
김기림 기자 A는 B에 속한다
김기림 가거라 새로운 세상으로 A는 B를 발표하였다
김기림 시인 A는 B에 속한다
김기림 박태원 A는 B와 친밀하다
김기림 기상도 A는 B를 저작하였다
김기림 주지주의 A는 B의 경향을 띈다
김기림 문학평론가 A는 B에 속한다
김기림 조용만 A는 B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
김기림 함경북도 함성 A는 B에서 출생하였다
김기림 시의 이해 A는 B를 저작하였다
김기림 김광균 A는 B에게 추모를 받았다
김기림 T.S 엘리엇 A는 B의 영향을 받았다
김기림 이상 A는 B과 친밀하다



네트워크 그래프

김기림시각화.PNG


  • 김기림에 관련된 개체들을 네트워크 그래프로 시각화한 이미지 파일이다.

“Network graphs in this work were created using Vis.js Network Library (Copyright (C) 2010-2017 Almende B.V. )

and MakeGraph Simple Ontology Script Converter (Copyright (C) 2017-2018 Center for Digital Humanities,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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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및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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