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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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1900년~1951년)

소개글

김동인(1900년 10월 2일~1951년 1월 5일)은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으로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 김시어딤이 있고, 일본식 이름은 가네히가시 후미히토(金東文仁), 히가시 후미히토(東 文仁)이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創造)』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고, 중풍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다. 대표 소설로는 <배따라기>, <감자>,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 <광염소나타>등이 있다. 김동인 소설에는 탐미주의, 자연주의 등의 다양한 경향성이 드러나며, 여러 양식을 작품 속에서 실험하여 성과를 거뒀다.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활동을 하여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광복 이후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하고, 일제 말기 문학인의 친일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1955년에 사상계사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에서 주관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생애와 문학활동

문학활동 이전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 평양에 농토를 많이 소유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사상을 지닌 김 대윤(大潤)이고 어머니는 그의 후처인 옥씨(玉氏)였으며 김동인은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부유한 집안 태생답게, 김동인의 유년시절은 상당히 유복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또한 관대한 아버지와 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어머니의 과보호로 인하여 원하는 것은 모두 없는 절제 없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았다. 이러한 그의 성장 배경은 김동인으로 하여금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유아독존적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선이라 여기는 신념까지 챙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검출되는 유교적 윤리의 제약이나 도덕적 갈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은 결국 사회성 결여로 이어져,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어머니의 과보호 역시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역할을 했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김동인은 어머니 이외의 여자를 사랑한 일이 없었으며, 이성보다는 동성애에 가까우리만큼 남성의 육체나 기질에만 탐닉하게 된다. 어머니처럼 완벽하게 헌신적인 여인이 없었기에 여자에게도 정착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김동인을 남성우월론자로 만들어버리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아가 그의 작품에까지 영향을 끼쳐, 그의 작품에는 긍정적인 여성상이 나타나지 않고,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김동인은 1912년에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원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나, 동경학원 폐쇄로 인해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하였다. 이때 주요한(朱耀翰)과의 경쟁의식 속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당초 목표와는 달리 많은 독서를 통해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메이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화학교(川端画学校)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문하생이 되었으나 이 역시 중퇴했다. 이 사이 부친상으로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고 김혜인과 혼인하였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월 26일 풀려났다. 1919년, 김동인은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문학활동

1920년대 #자연주의 #동인활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동인은 그의 가세가 몰락함에 따라 경제적인 이유에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햇다. 1923년, 김동인은 그의 첫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발간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8월에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이 당시 김동인은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923년 이광수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 되자 김동인은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와 같이 독설을 퍼부었다.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은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되는 일은 변절이라 하며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30년대 #탐미주의 #장편역사소설

김동인은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인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2년에 김동인은 동아일보 기자가 되는데 이는 앞서 그가 기자활동을 하는 것은 변절이라고 한 그의 발언과는 상반되는 일이었다. 그 해에 김동인은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하는데 이는 염상섭을 모델로 하여 그를 조롱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실제로도 소설을 읽은 염상섭과 동인이 설전을 하였다. 이 일로 인해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후 15년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일간 활동하였다. 이후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
김동인은 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며 친일적인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39년 4월부터 5월까지 ‘북지(北支) 황군(皇軍)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1939년,김동인은 「김연실전」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는 신여성의 자유 연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그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소설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뿐만 아니라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소설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 #친일 #광복

1942년 1월 23일, 김동인은 『매일신보』에「감격과 긴장」을 기재해 태평양전쟁을 지지하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본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했다가 불경죄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輔國會)에 참가해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하여 학병권유를 하며 선동했다. 1945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생활 수감」을 게재했다. 이 밖에 잡지 『조광(朝光)』, 『신시대』 등에 친일소설 및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1945년 8월 15일, 김동인은 조선총독부 정보과장을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움을 요청하나 그 날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김동인의 요구를 거절한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7년 3월 『백민』에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문단 30년의 자취」 등을 게재했다.

말년과 사후

김동인은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해오며 방랑한 삶을 살아왔고, 10년도 되지 않아 부친이 남겨준 막대한 유산을 기생놀이에 탕진해버리게 되는 등, 20대부터 김동인의 몰락의 조짐은 시작되었다. 경제관념이 지독하게 없던 그는 언제나 최고급 옷과 구두를 맞춰 입고 백금 시계에 백금 시곗줄을 달아 차고 다녔으며, 갖은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 수집을 취미로 삼았다. 경마, 마작 등 도박에도 몰두했으며 낮에는 고급 요정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명을 부리고, 밤에는 프린스 호텔에서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 그렇게 선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까먹던 김동인은 보통강 수리사업에 아무 것도 모른 채로 투자했다가 쪽박차고 그 많은 재산은 물론, 선친이 남겨준 400평짜리 대저택도 모조리 날려먹는 일도 겪게 된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김동인은 순수문학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통속소설로, 끝내는 야담작가로까지 전락해버리고 만다.
가뜩이나 난잡한 김동인의 오입질에 생활고까지 겹치자,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동인의 아내는 궁핍한 생활과 남편의 여성 편력을 견디다 못해 출분하고, 이로 인해 김동인은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1년에 200일은 수면제를 복용해야만 잠이 들 수밖에 없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이는 또 김동인에게 모르핀 중독이라는 암담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그러다 그는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중풍을 앓게 되면서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도 찾아왔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서울의 쪽방에서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수면제와 술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다.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났으나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북한 인민군에게 심문을 받았다. 1.4 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결국 그는 가족들이 피난 가고 없는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혼자 처참하게 숨을 거두게 된다. 그의 시신은 동네 이웃사람들이 묻어 주었다. 한국 전쟁 직후, 그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지게 된다.
1955년에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그는 2002년에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김동인은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하였다.

대표작 및 평가

김동인에 관한 연구는 크게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첫째, '고백체'와 기타 김동인 소설에서 나타나는 소설기법을 통해 근대적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 둘째, 자연주의, 탐미주의 등의 문예사조를 통해 김동인 소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 셋째, 김동인의 비평을 중심으로 김동인의 미의식과 문학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1] 후대에 친일 행적으로 남은 문학 작품에 대한 연구는 적은 편이다. 한편 이광수자유연애사상, 신여성에 대한 공격 역시 김동인의 작품과 떨어트려 볼 수 없는 요소다.


근대적 단편소설

김동인이광수로 대표되던 당대의 계몽주의 소설을 비판하였으며, 문학의 순수성을 강조한 인물이다. 순수한 문학을 강조하는 김동인의 경향은 그의 소설과 평론 모두에서 드러난다. 「약한 자의 슬픔」(1919),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등의 초기 단편소설에서 돋보이는 심리묘사와 ‘고백체’는 근대적인 단편소설 확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약한 자의 슬픔」(1919)

문예사조 연구

한편 김동인의 문학을 자연주의, 탐미주의와 같은 문예사조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움직임도 꾸준하다. 김동인의 대표작으로 뽑히는 「감자」(1925)를 비롯, 같은 해에 발표한 「명문」(1925)과 「시골 황서방」(1925) 등의 작품에서는 자연주의적인 시각이 두드러진다. 김동인 소설의 자연주의는 그가 근대 소설의 핵심을 리얼리즘으로 보는 것과 연결된다. 또, 자연주의의 해부적 표현을 잘 활용한 작품으로 「발가락이 닮았다」(1932)가 꼽힌다.

배따라기」(1921), 「광염소나타」(1929), 「광화사」(1935)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탐미주의 소설로 분류된다. 자연주의탐미주의 경향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나, 한편으로는 순수 예술을 강조하는 김동인의 가치관이 탐미주의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동인의 탐미주의 소설에서는 경멸받고 냉대받는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경향이 보이며, 이런 영웅주의적 가치관은 후기에 집필한 장편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보인다.

감자」(1925) #자연주의발가락이 닮았다」(1932) #자연주의배따라기」(1921) #탐미주의광염소나타」(1929) #탐미주의광화사」(1935) #탐미주의

여성혐오 시각

광염소나타」(1929), 「광화사」(1935)와 같은 탐미주의 소설에서 김동인은 노골적으로 여성을 강간·살인하는 잔혹한 범법 행위로 예술을 완성하는 유약한 남성 캐릭터를 앞세우고 있다. 냉대받고 경멸받는 주인공 남성이 비틀린 미의식과 잘못된 사상을 실현시키며 영웅으로 추앙받는 구조다. 현대에 와서는 김동인의 위 작품들처럼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방조되었던 여성혐오와 비윤리적 행위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 김동인은 자유연애사상신여성에 대해 특히 보수적인 의식을 보였다. 실제 문인 김명순을 소재로 한 「김연실전」(1939)에서 김동인은 김명순을 성적으로 공격했으며, 평론에서 역시 문인 여성들을 깎아내리고 있다.

광염소나타」(1929) #탐미주의광화사」(1935) #탐미주의김연실전」(1939)

통속소설과 역사의식

동인지활동을 중심으로 하던 김동인은 1930년대부터 연재소설에도 관심을 두었고, 기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젊은 그들」(1930)을 시작으로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의 장편역사소설을 여럿 연재한다. 「운현궁의 봄」(1933)에서는 흥선대원군을, 「대수양」(1941)에서는 수양대군을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내는 등,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소설보다는 통속소설의 경향이 짙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한 단편, 「붉은 산」(1933)에는 특히 작가의 민족의식이 잘 드러난다고 회자된다. 초기에 문학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계몽주의 소설을 비판했던 김동인이었던 만큼, 이러한 후기의 경향성은 곧잘 비판받는다.

한편 일제 말기 김동인은 여타 문인들처럼 일제에 동조하는 글쓰기를 하였다. <매일신보>에서 꾸준히 내선일체황민화를 선동하는 산문을 썼고, 「백마강」(1941), 「아부용」(1942) 등의 소설에도 그러한 의식이 드러났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문인의 친일 행위, 특히 이광수를 비판하는 다양한 글을 썼다. 광복을 전후로 나온 김동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운현궁의 봄」(1933) #장편역사소설붉은 산」(1933) #장편역사소설

비평가

비평가로서 김동인은 문학사적 의의가 뛰어난 작품을 쓴 동시에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비평문으로는 조선 근대 소설들에 대한 비평문인 「조선근대소설고」(1929),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춘원연구」(1956)가 있다. 근대소설의 확립과 춘원 이광수 소설에 대한 집중 조명으로 회자될 만하나, 자신의 소설사적 공로를 과장하거나 이광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엿보인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춘원 이광수에 대한 반발심과 자기우월적인 성향으로 비평의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평이 많다.

조선근대소설고」(1929)
 「춘원연구」(1956)

작품 목록




관련 장소

김동인 관련 장소는 대표적으로 6가지로 나눌 수 있다.

  • 본관
    • 전라북도 전주시
  • 출생지와 교육을 받았던 지역
    • 평안남도 평양부
    • 승덕학교
    • 숭실학교
    • 도쿄학원 중학부
    • 메이지학원 중학부
    • 카와바타 화숙
  • 항일 장소
    • 히비야 공원
  • 친일 장소
    • 경기도 경성부
  • 광복 이후
  • 주요소설 관련 장소

1. 본관

전주시.png

김동인은 전주 김씨로서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2000년을 기준으로 전라북도 전주시는 57, 979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이다. 유명인은 김동인 작가 이외에 김경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김광섭 등이 있다.

2. 출생지와 교육을 받았던 지역

평안남도.png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에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인 승덕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메이지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 해 9월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카와바타 화숙에 입학했다.

3. 항일 장소

히비야.jpg

김동인은 1919년 2월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인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

  • 히비야 공원

히비야 공원은 일본 도쿄도 치요다 구에 있는 공원이다. 1903년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공원의 토지 중 일부는 국유지이다. 도쿄도 건설국이 관리하는 도립공원으로 도쿄도 공원협회에 관리를 위탁하고 있다. 카스미가세키, 유라쿠초 등과 인접한 도심부에 위치한 도립공원이다. 넓이는 약 161,636.66m²이다. 원내 주요 시설은 시설로 시정회관, 히비야공회당, 크고 작은 야외음악당, 히비야도서문화관, 숲과 물의 시민대학, 히비야 그린 살롱, 펠리체가든 히비야, 테니스코트, 마츠모토루 등이 있다. 원내에는 크고 작은 화단들이 있다. 호세 리살 상, 루파 로마나, 고대 스칸디나비아 비석, 남극의 돌 등 각종 기념비 및 기념물들이 기증되어 공원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4. 친일 장소

조선총독부.jpg

김동인은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하여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을 위문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왔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이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운영하였고, 본부의 소재지는 당시 경기도 경성부(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위치하였다.

5. 광복 이후

적산가옥.jpg

김동인은 1945년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중구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하왕십리동.jpg

1946년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성동구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으로는 광진구, 서쪽으로는 중구와 용산구,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 북쪽으로는 동대문구와 접한다. 한양도성의 동쪽이란 뜻에서 구명을 정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강남,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2호선, 3호선, 5호선, 경의중앙선, 분당선이 통과하며, 동호대교, 성수대교를 축으로 강남, 강북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이다. 청계천, 중랑천, 한강 등 총 14.2km의 수변과 접하고 있는 물의 도시로, 성동구는 수변구간의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수변도시로 발전을 꾀하고 있다. 2.17km2의 성수 준공업 지역의 생산 기능과 용답동 중고자동차 매매시장, 마장동 축산물시장의 유통 기능, 금호동, 옥수동, 행당동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주거 기능을 고루 갖추고 있다. 신당동이라는 동명은 옛날 마을에 신을 모시던 당집이 있어 붙었고, 다산로 동서쪽에 위치한 흥인동의 동명은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지문'에서 유래되었다. 신당동 사거리 남서쪽의 무학동의 동명은 도로교통공단 남쪽에 위치한 무학봉(92m)의 산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이 산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6. 주요소설 관련 장소

1921년 6월에 동인지 『창조(創造)』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이 평안도 지방의 민요인 배따라기에서 따온 것이다. 배따라기는 평안도 지방의 뱃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노래[3]이다.

평양에서는 고구마를 사투리로 감자라고 불렀다. 소설 속의 감자가 고구마를 뜻한다는 증거로는 수확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감자의 수확시기는 6월 무렵[4]이고, 고구마의 수확시기는 9월 하순부터 10월 상중순[5]이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 히비야공원 잔디광장

관련 멀티미디어

(ASMR)EBS 라디오 문학관 – 광염소나타, 김동인作

영화 감자(1968) / Potato ( Gamja )

뮤지컬 광염 소나타 Sonata of a flame 제3악장 The Murder

김동인 소개영상

관련 항목

주어(S) 목적어(O) 관계:A는 B를 ~하다(P) 비고
김동인 감자 창작하다
김동인 광화사 창작하다
김동인 광염소나타 창작하다
김동인 배따라기 창작하다
김동인 붉은 산 창작하다
김동인 운현궁의 봄 창작하다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창작하다
김동인 김연실전 창작하다
김동인 김명순 공격하다
김동인 탐미주의 가지다
김동인 자연주의 가지다
김동인 『창조(創造)』 발간하다
김동인 전조선문필가협회 조직하다
김동인 문단사절(위문사) 조직하다
김동인 적산가옥 불하받다
김동인 『야담(野談)』 참여했다
김동인 『조선문단(朝鮮文壇)』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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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김동인론 - 김동인의 생애와 문학. 곽근. (2011). 문예운동 2011년 여름호, 59-75.

2. 김승옥˙김동인 소설의 여혐을 비판하다 한겨례. 2017.03.13. 2019년 6월 12일에 확인함.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인문정보콘텐츠(2019)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상부상조, 작성자 임빛찬, 송준섭, 김유정(14), 정민정, 박지훈, 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