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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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생애 및 활동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녔다. 김소월은 같은 오산학교 후배인 백석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朔州龜城)」·「가는 길」·「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健康)한 잠」(1934)·「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 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김소월의 죽음

소월의 ‘한’은 그의 성장기적 배경과 삶의 고단에서 오는 우울, 그리고 시인이 말하듯 ‘남의 나라 땅’에서의 서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를 따라다니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허무의식과 슬픔에서 연유한 것에 더 직접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곧 그의 생애의 비극적 결말과도 연결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다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김억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보며 당시 그의 허무를 짐작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龜城)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놓아 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소월이 자신에게 상속된 전답을 팔아 식솔을 끌고 처가인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 것은 1924년이다. 그곳에서 <동아일보> 남시지국(南市支局)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배포, 수금, 경영을 모두 책임지고 경영한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전무하고 세속적인 처세에 서툴렀던 그는 곧 파산해버리고, 생계를 위해 어울리지 않게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보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조선문단> 1927년 2월호 ‘문단소식’ 난에 의하면 그때까지 소월이 남시지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문학도, 생활도,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도 놓아버린 소월은 술에 기대 세월을 보낸다. 소월이 술꾼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문중에서조차 그를 ‘불량자’로 낙인찍고 천시한다. 잦은 통음(痛飮)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먹고 서른세 해의 생을 마감한다. “민족의 토속어·토착어를 가림새 있게 시적으로 승화하는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송희복)한 지난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민족시인이었던 김소월은 식민지 변방의 소지식인으로 회의와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가 그렇게 덧없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유장한 슬픔과 한의 시편들을 빚은 소월이 죽은 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그의 민요적 가락과 민족적 설화, 정한을 담은 시편들은 오랫동안 시름 많고 흠집 많은 우리 겨레의 심사를 달래주며 널리 애송되고 있다.

김소월의 작품

김소월의 작품리스트
발표연도 제목
1920 스승 김억의 소개로 <창조> 5호에 시 '낭인의 봄', '그리워' 등 5편을 발표하며 데뷔, <학생계>에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등으로' 발표
1922 배재고보 편입 후 <개벽>지를 통해 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소설 [함박눈] 등을 발표
1924 <영대>에 시 '밭고랑 위에서', '무신' 등, <동아일보>에 시 '나무리벌노래'를 발표
1925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간행, 시론 '시흔' 발표, <동아일보>에 시 '옷과 밥과 자유', <조선문단>에 시 '물마름' 발표
1939 스승 김억에 의해 [소월시초] 발행
1968 남산에 소월시비 세워짐


수상내역

  • 1981년 - 금관문화훈장
  • 1999년 -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 김소월

네이버 인물검색 - 김소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김소월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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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백석 A는 B의 선배이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