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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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백석의 연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영한은 "진향"이라는 기생명(妓生名)을 가진 기생이었다. 그녀를 사랑한 백석은 "자야"라는 이름을 직접 붙여주었다고 한다. 백석과 헤어지고 난 후에는 고급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화라는 법명을 얻었다.

소개 및 생애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본래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사업에 빠진 친척의 반 강제적인 빚보증과 사업실패로 가정이 파산하게 됐다. 집안이 몰락한 후 1931년에 15살의 어린 나이에 어린 신랑에게 팔려가게 된다. 그러나 우물 옆에서 빨래하는 사이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는 비운을 맞았다. 1932년 친구의 언니 김수정이 기생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본 김영한은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된 김영한은 한국 정학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전국적인 문예지인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문재를 겸비해 노래와 춤만이 아니라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는 미모의 기생이었다.

1936년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인 해관선생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의 교도소까지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여자고등학교)교사들의 회식자리인 함흥관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의 옆자리에 운명적으로 앉게 된다.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1937년 김영한이 홀로 서울로 떠나자 백석은 교사생활조차 버리고 김영한을 쫓아 서울 청진동 그녀의 집으로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약 3년 동안 부부처럼 살았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됐는데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으며,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 김영한은 199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백석과의 관계

1936년 영생여자고등학교 교사들의 회식자리에서 영어교사로 와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백석 또한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 김영한에게 첫눈에 반하여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나의 마누라입니다, 죽기 전에 우리에게 이별은 없습니다.”하면서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 젊은 시절의 김영한과 백석

김영한 젊은시절.jpg 백석 1937년.jpg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1937년 김영한이 홀로 서울로 떠나자 백석은 교사생활조차 버리고 김영한을 쫓아 서울 청진동 그녀의 집으로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약 3년 동안 부부처럼 살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강제로 결혼을 시켜 자야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끝끝내 백석의 부모는 기생출신과 동거하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백석은 1938년 함께 만주로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자야를 설득한다. 오랜 설득 끝에 함께 숨기로 약속했던 며칠 전, 너무나 사랑하는 백석의 장래와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걱정했던 자야는 만주에서 서울로 홀연히 짐을 싸고 만다. 다른 얘기로는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됐는데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약 3년 동안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김영한은 가슴 속에 묻어둔 백석의 이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당시 기준으로 1,000억이 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으며 1,000억이 아깝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는 "1,000억이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97년에는 창작과 비평사에 2억원을 기증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1997년 10월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하는데 제1회는 이상국·황지우 시인이 수상했다.

저서

김영한은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몇 편의 수필과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책이 『내 사랑 백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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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야의 에세이 『내 사랑 백석』.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저자 김영한(김자야)이 백석과의 만남과 이별을 기술한 회고 수필집이다. 백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한 여인의 짧은 사랑과 긴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저자인 김영한이 원래 노래와 춤, 시와 글에 재능이 있었기에 청초하고 깔끔한 문체로 백석 시인과의 만남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저자인 김영한은 이 『내 사랑 백석』을 '내 나이 열여섯에'라는 목차로 시작하고 '당신 곁으로'라는 목차로 끝을 끝맺었다. 그녀의 삶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백석 시인과 함께했던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도 백석 시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가 백석과 함께 한 시간은 겨우 3년 남짓이지만, 그 이후 60여 년을 서로 보지 못한 채 그리워 하기만 한 백석과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내 사랑 백석』을 통해 보는 백석 시인은 아주 매력적인 남자이다. 실제로도 백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뽑힌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백석 시인 특유의 감성과 말, 행동들이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다. 사진관에 진열되어있는 여자 사진을 외면하며 "나는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 싫어!" 라고 말하는 모습이나 <자야오가>라는 책을 보고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라고 하는 로맨티스트로서의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 연구자들 사이에서의 논란

2부인 "당신의 '자야'"를 보면 '나와 나타샤'라는 소단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이 1938년에 지은 시로서 백석이 연인인 자야와의 사랑을 아름다운 감성으로 풀어낸 시라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다. 또한 김영한씨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한다. 1938년에 백석이 김영한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가자고 하였을 때 김영한은 백석을 남겨두고 홀연히 서울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인 1938년,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김영한을 뒤따라왔고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백석은 없고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편지봉투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있었다고 한다. 백석과의 관계와 이러한 상황이 김영한씨 스스로가 나타샤가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이것저것 전부 따져보니 나타샤는 김영한씨가 아니라 1935년 6월 친구 '허준'의 결혼식장에서 만나 한 눈에 반한 박경련(박경란, 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길상사와의 관계

김영한은 1996년,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부지 7,000평)을 법정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였다. 사찰은 일 년 뒤 완성되었고, 그녀는 시주하고 3년 뒤인 1999년 83세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길영한은 노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주시기를 청하였다. 그 후 10여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주시기를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그 아름다운 법석에서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그저 염주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만을 받았고 7천여 평의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 하나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어 마디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그녀는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워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 10월 7일에는 기재를 모셔 그녀를 추모한다. 또한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명 안팎의 고교생을 선발, 학비를 자원하며 그녀의 뜻을 잇고 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영한 백석 A는 B의 옛연인이다


참고자료

길상사 홈페이지

네이버 - 내 사랑 백석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양준

기여자 : 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