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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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1912~1994)

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였다.

1948년 9월 9일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28일부터 1994년 7월 8일 사망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출생 및 가계

김일성 생가 - 만경대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 (平壤府 龍山面 下里)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 1894~1926)과 강반석(康盤石, 1892~1932)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萬景臺)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집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 남동(平壤府 古順和面 南洞)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지역은 평양부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대동군(大同郡)에 속하게 되어 주소가 친가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古平面 南里) 만경대, 외가는 대동군 용산면 하리(龍山面 下里) 칠골로 바뀌게 된다.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 만경대구역에 편입되어 있다.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 ~ 1943)과 모친 강반석이 다니던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지시로 1992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흔히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라고 하나, 그의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金聖柱)가 맞을 가능성이 크고, 김성주(金誠柱)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

김일성은 3가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맞다고 했다 한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 1845~1878)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李平澤)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지어낸 것이다.

조부 김보현은 평범한 농부였고, 부친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만경대와 평안남도 강동군 봉화리에서 서당 교사를 하다, 장일환(張日煥, 1886 ~ 1918) 등이 주도한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무렵 중강진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5월에 압록강 대안(對岸)인 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피신한다.

만주에서는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내걸고 무면허 한의원을 개업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활동사항

보통학교인 창덕학교(彰德學校)를 거쳐 1926년 부모가 있는 만주로 건너가 길림(吉林)에 있는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다.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재학중에 타도제국주의동맹·반제청년동맹·공산주의청년동맹 등을 조직하고 1929년에는 만주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활동했다.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 기사.

같은 해 10월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32년 4월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장백산맥과 송화강 유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에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있는 항일유격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제1로 2군의 지휘간부로 활동하였다.

제2군은 주로 조선사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도 하였다.

1936년에는 통일전선 조직이며 지하혁명 조직인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를 조직하고 ‘10대 강령’을 발표, 국내에 광복회 지하조직망을 구축하는 공작을 전개하였으며, 1937년 6월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하였다.

두만강 일대의 국경지대에서 유격활동, 그 뒤 소조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일본토벌군의 추격으로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대원들을 인솔하고 원산으로 상륙하였다.

이렇게 입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유격대들은 북한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그리고 김일성은 처음부터 당과 국가, 군의 수위(首位)에 있으면서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주도하였다.

1945년 10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되었는데 11월에 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10월 14일에는 평양에서 ‘김일성장군 개선환영 군중대회’가 열렸다.

1946년 2월 각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바탕으로 정권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인민위원회가 밝힌 11개조 당명과업과 20개조 정강에 기초하여 반제·반봉건과제인 지주제를 청산하는 토지개혁과 일본인 소유인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실시, 「남녀평등권 법령」과 「노동법」을 발표하였다.

1946년 4월 김일성은 기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창당해 조선공산당 중앙(서울 박헌영)과의 관계에서 벗어났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은 북측 신민당(이칭: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대중정당인 북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같은 해 말에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되어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일성(가운데), 좌우로 최용건, 박헌영과 홍명희가 서 있고, 뒷줄 오른쪽 두 번째에는 김원봉이 서 있다.

이 때부터는 사회주의 과도기 과업을 수행하는 길에 들어섰으며, 1948년 3월에 개최된 제2차 당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에는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한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남북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되자 당의 위원장이 되었고, 남북의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통합하여 출범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일명 조국전선)의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한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6·25전쟁 당시에 군사위원회위원장과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군사작전과 전시동원체제를 통괄하였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동 협정의 당사자로서 서명을 하였으며, 다음날인 28일에는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인 영웅칭호를 받았다.

휴전 후부터는 전후복구 건설과 함께 농업집단화와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화 등 사회주의 개혁이 본격화되었는데 1956년 4월에 개최된 3차 당대회에서 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차 당대회를 전후해서 권력내에 잠재해왔던 각 계파간 대립과 갈등이 한층 표면화되자 김일성중심의 실권파는 ‘반종파투쟁’을 전당적으로 전개하여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말았다.

1961년 9월에 개최된 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 중심의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수령의 유일적 지도체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중심, 통일과 단결의 중심을 의미한다.

1972년 12월에 채택한 「조선사회주의헌법」은 김일성을 국가주석으로 추대함으로써 수령중심의 권력체제를 확립, 모든 권력이 주석인 김일성에게 집중되었다.

1974년 2월 당5기 8차 전원회의에서는 혁명 1세대들의 제의에 의해 김정일(金正日)을 수령(김일성)의 후계자로 추대하고 당의 정치위원과 비서를 겸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김정일은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 10월에 개최된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의 당적지위가 공식화되었다.

1980년대는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정책을 김정일이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제수호에 모든 것이 복종되었는데,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여 국방위원회를 신설하여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군중시체제로 전환하였다.

처음에는 김일성을 위원장, 김정일이 제1부위원장, 오진우(吳振宇) 부위원장, 그리고 혁명1세대들을 위원으로 하는 국방위원회를 구성하여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군중시체제로 전환하였는데 1993년부터는 김정일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군사지도권을 주석(김일성)의 권한으로부터 분리시켜 국방위원장(김정일)이 갖도록 하였다.

1991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가입이 이루어졌다.

이는 김정일이 군중시체제의 실질적인 관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렵 김일성은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한편, 북한은 1991년 9월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안전보장을 확보하게 되었고, 미·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서둘렀다.

그리고 남북간에는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어 1991년 12월에는 「화해와 협력 및 불가침에 관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는데 1992년 2월 2일 발효를 위한 비준 서명을 하였다.

1993년 6월부터는 북미간에 북한의 핵개발문제를 가지고 고위급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쌍방의 이해관계의 차이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전 미국대통령인 카터(Carter,J.)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의 회담을 통해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이 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에 합의, 부총리급의 실무접촉을 통해 모든 실무적 문제에 합의하였으나 김일성 사망으로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1994년 7월 9일 정오 북한은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 2시에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음을 보도하였다.

이 날 김정일·오진우·강성산(姜成山) 등 273명으로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의식(7.11)과 영결식(7.19)에 이어 영구를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하였다.

1997년 7월 만 3년상 탈상 후 북한은 김일성이 출생한 1912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는 ‘주체’연호를 쓰게 하고 생일날인 4월 15일을 태양절로 정하였다.

이는 김일성이 1950년대 중반에 주체의 확립 문제를 강조하고, 그 후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노선을 견지 하였으며, 또한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여 그를 구현해나가는 ‘주체의 나라’·‘우리식사회주의’를 확립하였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黨) 기관지 아키하다(赤旗) 평양 특파원을 지낸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 기자는

  "북한은 나라 전체가 허위에 쌓인 사회이며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 부자는 희대의 사기꾼이다" 

라고 토로하였다.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더 보탠다면 김일성은 일생동안 북한인민들을 기만해온 인물이고, 그 아들 김정일도 전문적인 거짓말쟁이였다.

또 북한의 김일성 일족 정권은 자유선거를 통해 창출된 인민의 뜻이 반영된 정권(政權)이 아닌 스탈린과 소련군이 만들어준 불법 괴뢰정권(傀儡政權)이다.

김정일에 의해 1978년 납북되었다가 1986년 부인 최은희 (崔銀姬, 1926 ~ 2018)와 함께 탈출하여 자유세계로 돌아온 신상옥(申相玉, 1926 ~ 2006) 감독은 수년간 북한 권력 핵심부의 행태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는데, 그가 내린 평가는 더욱 정곡을 찌른다.

'마적단이죠.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여 주민들을 굶겨 죽이면서도 하나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파티를 즐기는 마적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를 강탈해간 마적 두목에 지나지 않는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시절에도 항일투쟁을 빙자하여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하던 마적단의 일원에 불과했다.

김일성 사망 후에는 북한체제의 마적단 속성에 수령이 영생한다는 사교(邪敎)의 성격이 추가되었다.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해방 당시 그는 국내에서 완전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 알려져 있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항일투쟁 경력 조작

크게 내세울 만한 공적도 없는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조작하여 남의 공적을 가로채고, 북한을 소련군이 아닌 자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하였다.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되어 집권하여 인민의 주권을 강탈

만주에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친 도망자가 소련군에 들어가 동료를 밀고하는 프락치 노릇으로 상관에게 잘보여 스탈린에 의해 일약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고,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해 갔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이후 단 한번도 체제나 지도자 선택권을 가져본 적이 없고, 소련군이 김일성에게 쥐어 준 주권은 김일성 일족에게 세습되고 있다.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

남한을 적화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삼겠다는 망상으로 남침 전쟁을 벌여 수백만의 사상자와 수천만의 이산가족을 양산하였다. 한 인간의 헛된 욕망이 민족 전체에 미증유의 재앙을 불러온 사례이다.

무자비한 정적 숙청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아 해방 후 북한을 택했던 수많은 유무명의 항일투사, 독립운동가들이 김일성의 손에 숙청, 처형되고 유배되었다. 김일성 직계 빨치산들을 제외하면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 말살과 노예화

북한 주민들의 언론의 자유, 여행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고, 수시로 주민들을 무임금의 강제 노역에 동원하며, 인명을 경시하여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힌 사람들은 정당한 수사와 재판 과정도 없이 마구잡이 처형을 자행해 왔다.

수용소를 만들어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수십만을 감금하고 강제노동을 시켜왔다.

무수한 대남 도발로 수많은 인명 살상

해방 후 지금까지 북한의 대남도발은 셀 수 없이 많고, 무자비한 도발로 인해 희생된 인명도 수 천명 수준이다.

김일성 일족 세습 전제 왕조를 만들어 국가를 사유화

소련의 꼭두각시로 집권하여 점차 권력을 강화해 김일성 일족의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어 국가를 사유화하고, 인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사교(邪敎) 전체주의 체제의 교주로 타락

김일성의 영생을 믿고, 호화 궁전에 모신 김일성 미이라를 숭배하는 북한의 주체사상교(주체교, Juche-ism)는 신도 수 면에서 세계 10대 종교 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김일성 진위 논쟁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김일성 가짜설은 많은 의문이 되고 있다.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교수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1945년 10월'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해방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이날은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날 평양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도 이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김성주는 데뷔 첫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한홍구에 의하면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

이어 한홍구는 "그러나 5·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출신으로서 관동군 중위로 복무했던 박정희로서는 분단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성공회대 한홍구 대학교수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홍구는 이를 두고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고 반박하였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김일성의 10촌으로 1994년 탈북한 강명도는 종편 채널A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김일성은 김일성 장군의 이름과 업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김일성이 해방후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자기 가족도 김성주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근래에 발굴된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을 근거로 한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든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나돌았다.

북한 김일성이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거나, 평양에 왔더라도 아직 남한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시기에 이승만, 김구와 나란히 거명되던 이 김일성은 풍문으로 떠돌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인 것을 당시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관해(鄭觀海)의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에는 동진공화국 외무대신이 김일성이라는 소문을 기록하면서 "김일성군은 말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데 없다고 한다.

또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는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한 일이지만 일반에서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는 1921년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례 김일성 장군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해방 후 공개적으로 귀국하여 곧바로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김성주가 9월 19일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하여 한 달 가까이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다 10월 14일에야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도 본인이나 소련군정이 그가 국내에서 사실상 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대중앞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 1938년 이후와 소련군에서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되나, 러시아어로는 김일성 아닌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

해방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에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 또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행세했으므로,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본명 대신 김일성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그의 이름을 이전의 진지첸에서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대로 북한 김일성은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김일성 가짜설이 진실이라면,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에는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

가계도

출처:뉴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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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민우1.jpg

연보

연도 활동 내용
1919 팔도구 소학교에 입학
1923.03 칠골의 창덕소학교로 전학
1925 만주 푸쑹 소학교로 전학, 졸업, 길림성 유원중학교로 진학
1926.06.05 아버지 김형직 사망.
1929 불순사상 혐의로 중국 군벌에 체포
1929 수감 중 유원중학교에서 퇴학, 화성의숙에 입학
1930.05 출옥
1931 화성의숙 졸업,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
1936.06 항일 통합조직 조국광복회 결성에 참여
1937.06.04 보천보 전투 지휘
1940.03.25 훙치허 전투 지휘
1940 소련군 입대, 소련 인민군 육군 소위로 임관
1945.08 '조선공작단' 결성에 참여
1945.08 소련군 소좌로 진급, 귀국
1945.09.22 평양 도착
1945.10 소련군 소좌에서 예편
1945.10.08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
1945.10.10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
1945.10.13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 집행위원에 선출
1945.12.18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2대 책임비서로 선출
1946.02.08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02.15 민족주의민주전선 북조선지부 위원장
1946.6.14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지부 산하정당 소집,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논의
1948.02.08 조선인민군 창건, 최고인민회의 조직, 대의원에 선출
1948.03 김구의 남북협상 제안에 수용
1946.08.28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을 합당시켜 북조선로동당으로 재편
1946.08.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수상에 선출
1949.06.30 통합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장
1950.06.25 한국 전쟁 발발
1950.07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
1953 박헌영을 실각, 남로당 출신들을 처형함
1956.0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을 실각시킴
1958.11 김원봉을 숙청, 처형함
1972 남북고위급회담을 박정희에게 제안, 사절단 교환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1972.10 국가 주석 취임, 동시에 국방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선출
1989.01.01 남북정치협상을 제의,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를 평양에 초청
1989.06.21 한국외국어대학교 임수경과 면담
1990.05.2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
1992.04.13 조선인민군 대원수로 진급
1994.07.08 사망

참조자료

"김일성," NAVER 지식백과, 2019년 6월 14일 접속, 사이트

"김일성," 위키 백과, 2019년 6월 14일 접속, 사이트

"김일성," 우남 위키, 2019년 6월 14일 접속, 사이트

김은정, "김일성 사후 북한 혁명전설의 수령형상화 연구", 2010.,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기관성,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통치유형 비교", 2015.,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일성 김정일 A는 B의 아버지다.
김일성 김형직 A는 B의 아들이다.
김일성 강반석 A는 B의 아들이다.
김일성 항일유격대 A는 B를 조직했다.
김일성 부위원장 A는 B를 맡았다.
김일성 보천보 A는 B를 공격했다.
김일성 훙치허 A는 B를 공격했다.
김일성 6.25 A는 B를 일으켰다.
김일성 박헌영 A는 B를 숙청했다.
김일성 김원봉 A는 B를 숙청했다.
김일성 내각수상 A는 B를 맡았다.
김일성 위원장 A는 B를 맡았다.
김일성 대원수 A는 B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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