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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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혜석(1896.04.28.~1948.12.10.)은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몇 안되는 여성 근대 작가로서 여성 인권에 관한 논설, 조혼과 가부장제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을 꾸준히 발표하며 그 당시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을 세상에 알렸다.
대표 작품으로는 경희, 모된 감상기, 구미만유기, 이혼고백서 등이 있다.
최초의 한국 근대 여성 문학을 쓴 작가로 현 시대에서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를 받는다.

생애

부모님과 형제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나혜석은 아버지 나기정과 어머니 최시의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형제는 아버지가 첩을 두면서 이복 언니도 존재했다.
나혜석의 아버지 나기정은 양반으로 한일합방 전후 군수를 지낸 개관 명료로 용인 군수를 역임하며 부유한 가정을 만들었다. 또한 자녀들에게 차별 없이 신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혜석은 다양한 경험을 하였고 사회, 여성 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듯 나기정은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될 수 있는 행동을 많이 했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나기정은 딸들이 태어난 후에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아명으로 딸들을 불렀다. 더하여 나기정은 본처인 나혜석의 어머니 최시의를 두고 여러 명의 첩을 두었다. 많은 첩 중에는 기생 출신으로 나혜석과 또래인 어린 첩도 존재했다. 또한, 이 어린 첩은 나기정의 총애를 받아 본처인 최시의에게 많은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나혜석은 당시 첩을 두는 사회에 반감을 느끼며 축첩제도를 기반으로 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나혜석은 어린 시절을 이름 없이 보냈다. 그녀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후 ‘나혜석’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이름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혜석은 1910년 삼일여학교를 입학하여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그녀는 일본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 전공에 입학하여 유학 생활을 하였다. 그년는 유학 생활을 하던 중 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학우회에서 최승구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웠다. 하지만 최승구는 폐렴과 결핵으로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나혜석과 사별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3.1운동에 여학생들의 참가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일본 경찰이 알게되어 5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결혼 및 세계 여행

최승구와 사별한 후 나혜석은 김우영을 만나게 되었고 집안의 결혼 압력으로 인해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결혼 조건으로 4가지의 조건을 들었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김우영은 이러한 결혼 조건을 받아들였고 그녀의 결혼은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좋은 부부관계를 이어나갔고 딸 김나열과 아들 김선과 김진을 낳았다. 또한 그녀는 결혼 후 다양한 작품활동과 항일, 독립, 여성 운동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이렇게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하던 중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이 주는 해외여행 포상자가 되었고 나혜석은 남편과 세계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혜석 부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여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서양을 여행하였다. 그녀는 세계여행을 통해 자신의 작품 사상과 세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혼

나헤석은 세계 여행 중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던 친일파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나혜석과 최린은 세계 여행 기간 동안 계속해서 만남을 지속해왔고 이를 본 파리의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이다.”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김우영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김우영은 나혜석과 최린의 관계를 조사하고 두 사람의 연애를 목격하게 된다. 이후 김우영은 나혜석이 있는 파리로 돌아오면서 최린과 나혜석은 헤어지게 되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 김우영은 새로운 여성과 교제하며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나혜석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김우영은 나혜석을 간통죄로 고소했고 둘은 1930년에 부부의 연을 끊었다. 나혜석은 이후 1934년에 최린에게 정조유린위자료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각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소송의 내용은 나혜석의 정조를 최린이 유린하여 이혼의 원인이 되었는데도 나혜석을 돌봐 주지 않아 손해를 입어으니 위자료를 내놓으라는 내용의 사건이었다.

작고

이혼 이후에 그녀의 삶은 더없이 피폐해져 갔다. 당시 사회에서 간통죄는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다. 더하여, 아이들의 양육권도 남편이었던 김우영에게 넘어가 자식들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후에는 파킨슨병도 앓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많은 강연도 진행하였다. 그녀의 몸은 더욱 안 좋아져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948년 그녀는 다른 이의 이름으로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립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고 위 죽음에 관한 내용도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문학 활동

나헤석은 그림 활동 쁀만이 아닌 다양한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세상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남성중심의 사회에 대한 계몽문학으로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이 많아 부담스러워 하는 단체즐이존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의 작품은 여자계, 매일신보, 동아일보. 삼천리 등의 단체에 많이 실려있다.

대표 작품

경희

경희는 부르주아 계몽문학으로서 동시대 남성들의 소설보다도 사실성이나 구성력, 인물의 성격화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나혜석은 경희에서 삼종지의라는 가부장적 도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남성들의 이중성을 비판하고 자각한 신여성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한다.

모된 감상기

나혜석은 당시 남성들에 의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묘사된 분만시의 고통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여성의 육체에 대한 논의를 기피하는 금기를 깨뜨렸다. 출산 후에도 아기를 보살피느라 엄청난 괴로움을 겪었고, 그런 고통들 때문에 무조건적인 모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미만유기

 구미만유기는 나혜석이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약 21개월간의 세계일주 삼천리에 연재한 산문이다. 구미만유기는 여행 경로를 따라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여행일자 및 시간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한눈에 여행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이혼고백서

 이혼 후 여성의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 조선 사회를 비판한 글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놀라워했던 것은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도 똑같이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남녀 평등의 주장이었다. 나혜석은 정조를 지키는 것은 취향의 문제라고 하며 여성도 그런 성욕과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품세계와 평가

작품 세계

나혜석 작품 세계의 특징은 미술과 문학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지성과 감성이 합쳐진 그녀는 자유로운 지성인이었으나, 그녀는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슬픈 결말을 맞이했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글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그녀의 갈등과 고통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p 216 ,『나혜석 이혼고백서』 오상출판사, 1987. 

나혜석의 불행은 전통사회의 축첩제도와 같은 유교적 가치관과 신여성의 개화사상의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녀의 작품세계가 자신의 페미니스트 의지를 모두 반영하였다고는 볼 수 없으나, 여성으로서 전문적인 화가, 작가의 길을 택하였다는 점이 그 당시 상황에서는 기존사회에 대한 반항이고, 페미니즘 문학의 시작이었다.

나혜석은 수필, 시, 소설등 다양한 장르를 통하여 신여성으로서의 자유평등사상과 여성주의를 보여줬지만, 그림에서는 그러한 메시지 전달보다는 예술적인 가치 추구를 우선시했다. 그녀의 그림은 인상주의 화법의 전통적인 초상화나 풍경화에서 그칠 뿐 여성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혜석은 여성주의자이며 페미니스트 문학가였지만, 페미니스트 미술가는 아니였다고 볼 수 있다.

나혜석이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아니었다고 해서 그녀의 미술사적 공헌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녀는 여성의 근대적 의식을 드러내 보인 최초의 선구자이다. 선구자의 행동은 봉건제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작가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그 선구자의 패배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또 다른 가치를 전달한다.

평가

나혜석의 평가는 1990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90년대 이전

나혜석의 삶 초반에는 작가와 화가로서 보인 역량과 지식인층에 속한 집안의 여성으로서의 진취적인 행보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당시 나혜석 평가의 핵심은 당대의 인습에 도전한 신여성이다. 신여성 이외에도 시대를 앞선 선구자라는 평가와 전근대적이고 봉건제적인 봉건윤리의 희생자, 또는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찼던 한국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평가 등이 있다.

하지만 구미여행 이후 김우영과의 이혼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부정적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과 작품들로 점차 고립되어 1930년대 이후로는 평가 자체를 받지 못했다. 나혜석을 이르는 말은 혼외정사녀, 이혼녀 등 정조를 지키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평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1948년 12월 나혜석 사망 이후, 19990년대부터 서구의 페미니즘 문학이 수입되기 시작한다. 여성의 인권과 양성평등이 사회의 주요한 이슈로 떠오르면서 선구자 였던 나혜석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 연구가 시작되었다.

1995년 나혜석기념사업회와 나혜석학회가 설립되었고, 나혜석의 문학, 여성학과 미술학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나혜석에 관한 객관적 사실로서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작가, 최초의 여성 여류화가, 최초로 구미여행을 다녀온 여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나혜석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삶으로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된 인물이라는 시각과, 정조취미론과 혼외정사등이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혜석의 행보를 개인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시선이 공존한다.

나혜석의 미술활동에 대해서는 그가 페미니스트 화가였다는 것을 긍정하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이 대립하였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의 미술 작품 목록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혜석의 여성 운동이 급진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1920년대 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등의 신여성운동이 실패를 하게 된 동기를 단지 그들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다. 여성사 학자들은 한국적 상황과 그들이 일본을 통해 간접 수입한 북유럽의 여성운동의 경제·사회적 배경에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활동 작품

그림 목록

유채

작품 제목 작품 출간 시기 작품 유형 작품 참고 사항
<농가> 1922 선적도록 유채 제1회 입선
<春춘(봄)이 오다> 1922 선적도록 유채 제1회 입선
<滿洲만주 봉천 풍경> 캔버스에 유채 27*39 개인소장
<농촌 風景풍경> 1923 합판에 유채 23.5*32.5 개인소장
<봉황산> 1923 선적도록 유채 제2회 입선
<봉황성의 남문> 1923 선적도록 유채 제2회 4등 입상 개인 소장
<秋추(가을)의 庭정(뜰)> 1924 선적도록 유채 제3회 4등 입상
<初夏초하(초여름)의 오전> 1924 선적도록 유채 제3회 입선
<娘娘廟낭랑묘> 1925 선적도록 유채 제4회 3등 입상
<天后宮천후궁> 1926 선적도록 유채 제5회 특선
<支那町지나정> 1926 선적도록 유채 제5회 입선
<봄의 오후> 1927 선적도록 유채 제6회 무감사 입선
<金雨英김우영 초상> 1927 유채 개인소장
<舞姬무희> 1927~1928 캔버스에 유채 39*33.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파리 風景풍경> 1927~1928 목판에 유채 23*33 개인소장
<스페인 國境국경> 1928 목판에 유채 23.5*33 개인소장
<불란서(프랑스) 마을 풍경> 1928 유채 30*5.5 개인소장
<스페인 해수욕장> 1928 캔버스에 유채 32.5*43 개인소장
<仁川인천風景풍경> 합판에 유채 15*22 개인소장
<自畵像자화상> 1928 캔버스에 유채 65*50 개인소장
<녹동 풍경> 1929~1930 유채 개인소장
<어린이들> 1930 선적도록 유채 제9회 입선
<畵家村화가촌> 1930 선적도록 유채 제9회 입선
<裸婦나부> 1931 선적도록 유채 제10회 입선
<庭園정원> 1931 선적도록 유채 제10회 특선, 제12회 제전 입선
<芍藥작약> 1931 선적도록 유채 제10회 입선
<소녀> 1932 선적도록 유채 제11회 무감사 입선
<창가에서> 1932 선적도록 유채 제11회 무감사 입선
<金剛山금강산萬相亭만상정> 1932 선적도록 유채 제11회 무감사 입선
<善竹橋선죽교> 1933 목판에 유채 23*33 개인소장
<다솔사> 합판에 유채 54*69 개인소장
<화령전 작약> 1934 목판에 유채 34*23 리움삼성미술관
<水原수원 西湖서호(서쪽 호수)> 1934 목판에 유채 30*39 개인소장
<별장> 1935 목판에 유채 22.5*33 개인소장
<海印寺해인사 石塔석탑> 1938 즈음 합판에 유채 32*33 개인소장
<불란서 교외 풍경> 캔버스에 유채 8호 개인소장


만필

작품 제목 작품 출간 시기 작품 유형 작품 참고 사항
<섣달대목> 1919. 01. 21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섣달대목> 1919. 01 30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섣달대목> 1919. 02 01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초하룻날> 1919. 02. 02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초하룻날> 1919. 02. 03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초하룻날> 1919. 02. 04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초하룻날> 1919. 02. 06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초하룻날> 1919. 02. 07 만필 『每日申報』매일신보
<경성역에서>, <전동식당에서> 1932(?) 만필
<계명구락부에서> 만필
<총석정 어촌에서> 1932 만필


기타

작품 제목 작품 출간 시기 작품 유형 작품 참고 사항
<裸婦나부(벌거벗은 아내) 습작> 1927 유화
<早朝조조> 1920. 01 판화 『공제』
<개척자> 1921. 07 판화 『開闢』개벽 13호
<저것이 무엇인고> 1920. 04 만화 『신여자』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1920. 06 만화 『신여자』
<廉想涉염상섭(1897~1963) 작품집> 1924 표지화 『견우화』
<인형의 家가> 1921. 03. 02 ~ 05 삽화 『每日申報』매일신보
<이상을 지시하는 계명자> 1932. 12 삽화 『계명』


저작 목록

여성비평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理想的이상적 夫人부인」 『學之光』학지광 1914. 12 여성비평
「雜感잡감」 『學之光』학지광 1917. 03 여성비평
「雜感잡감-K언니에게 與여(주다)」 『學之光』학지광 1917. 07 여성비평
「부인문제의 일단」 『曙光』서광 1920. 07 여성비평(미확인)
「婦人부인衣服의복改良개량問題문제-金元周김원주兄형의意見의견에對대하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1. 09. 29 ~ 10. 01 여성비평
「百結生백결생에게答답함」 『東明』동명 1923. 03. 18 여성비평
「『부인』의 탄생을 축하하여」 『婦人』부인 1923. 04 여성비평(미확인)
康明花강명화의 自殺자살에 對대하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3. 07. 08 여성비평
「歐米구미(유럽+미국) 女性여성을 보고 半島반도 女性여성에게」 『三千里』삼천리 1935. 06 여성비평
「獨身女性독신여성의 貞操論정조론」 『三千里』삼천리 1935. 10 여성비평
「倫敦윤돈(런던의 음역어) 救世軍구세군(기독교의 한 파) 託兒所탁아소(아동복지시설)를 尋訪심방하고」 『三千里』삼천리 1936. 04 여성비평
「英米영미 婦人부인 參政權참정권 運動者운동자 會見記회견기」 『三千里』삼천리 1936. 01 여성비평
「靈영(영혼)이냐, 肉육(육체)이냐, 靈肉영육이냐, 靈肉영육이 合합(+)한 戀愛연애라야한다」 『三千里』삼천리 1937. 12 여성비평


소설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夫婦부부」 『女子界』여자계 1호 1917(미발굴) 단편소설
경희 『女子界』여자계 2호 1918. 03 단편소설
「回生회생한 孫女손녀에게」 『女子界』여자계 3호 1918. 09 단편소설
「閨怨규원(버림받은 부녀의 원한)」 『新家庭』신가정 1927. 07 단편소설
「怨恨원한」 『朝鮮文壇』조선문단 1926. 04 단편소설
「玄淑현숙(겁고 맑은)」 『三千里』삼천리 1936. 12 단편소설
『김명애』 미간행 1933. 12 장편소설(원고일실)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光」광 『女子界』여자계 1918. 03
「내물」 『廢墟』폐허 제2호 1921. 04
「砂사(모래)」 『廢墟』폐허 제2호 1921. 04
「人形인형의 家가」 『每日申報』매일신보 1921. 04. 03
「中國중국과 朝鮮조선의 國境국경」 『時代日報』시대일보 1926. 06. 06
「앗겨 무엇하리, 靑春청춘을」 『三千里』삼천리 1935. 03


수필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四年4년前전의日記일기中중에서」 『신여자』 1920. 06 수필
「만주의 녀름」 『新女性』신여성 1924. 07 수필
「一年1생만에 본 京城경성의 雜感잡감(온갖 감성)」 『開闢』개벽 1924. 07 수필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朝鮮日報』조선일보 1926. 01. 03 수필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新女性』신여성 1926. 06 수필
「京城경성 온 感想감상 一片일편」 『東亞日報』동아일보 1927. 05. 27 수필
「愛兒病看護애아(사랑하는 아이)병간호」 『三千里』삼천리 1930. 01 수필
「끽연실」 『三千里』삼천리 1930. 05 수필
「巴里파리에서 본 것 늣긴 것-사람이냐? 학문이냐?」 『大潮』대조 1930. 06, 07 합병호 수필
「젊은 夫婦부부」 『太朝』태조 1930. 09 수필
「모델-女人日記여인일기」 『朝鮮日報』조선일보 1933. 02. 28 수필
「원망스런 봄밤」 『新東亞』신동아 1933. 04 수필
「연필로 쓴 편지」 『新東亞』신동아 1933. 10 수필
「영원히 이저주시오」 『月刊海新』월간해신 1934. 03 수필
「날러간 靑鳥청조(파랑새)-연애와 결혼문제」 『中央』중앙 1934. 05 수필
「女人여인 獨居記독거기(혼자 사는 기록)」 『三千里』삼천리 1934. 07 수필
「哀話애화 叢石亭海邊총석정해변」 『月刊每申』월간매신 1934. 08 수필
「異性間이성간의 友靑論우청론-아름다운 男妹남매의 記기」 『三千里』삼천리 1935. 06 수필
「나의 여교원 시대」 『三千里』삼천리 1935. 07 수필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時代동경여자미술학교시대」 『三千里』삼천리 1937. 05 수필
「海印寺해인사의 風光풍광」 『三千里』삼천리 1938. 08 수필

미술 관련 문학(에세이, 비평, 관계 편지)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繪畵회화와 朝鮮조선 女子여자-新進신진(새로 나서다) 女流여유의 氣焰기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1. 02. 26 미술에세이
「洋畵양화(바다 그림) 展覽전람(펼쳐 봄)에 對대야」 『每日申報』매일신보 1921. 03. 17 미술에세이
「美展미전 出品출품 製作제작 中중에」 『朝鮮日報』조선일보 1926. 05. 20 ~ 23 미술에세이
「巴里파리의 모델과 畵家生活화가생활」 『三千里』삼천리 1932. 03 미술에세이
「巴里畵家生活파리화가생활」 『三千里』삼천리 1932. 04 미술에세이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남회-西洋畵總評서양화총평」 『三千里』삼천리 1932. 07. 01 미술비평
「美展미전의 印象인상」 『每日申報』매일신보 1933. 05. 16 ~ 21 미술비평
「羅女史나여사의 書翰서한」 『三千里』삼천리 1935. 03 미술관계편지


구미여행기, 구미유기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아오 秋溪추계에게」 『朝鮮日報』조선일보 1927. 07. 28 구미여행기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東亞日報』동아일보 1930. 03. 28 ~ 04. 02 구미유기
「歐米구미 시찰긔」=구미만유기 『東亞日報』동아일보 1930. 04. 03 ~ 10 구미여행기
「쏘비엣 露西亞行노서아행」 『三千里』삼천리 1932. 12 구미유기 1
「伯林백림의 그 새벽」 『新家庭』신가정 1933. 01 구미여행기
「CCCP」 『三千里』삼천리 1933. 02 구미유기 2
「伯林백림과 巴里파리」 『三千里』삼천리 1933. 03 구미유기 3
「의 巴里行파리행」 『三千里』삼천리 1933. 05 구미유기 4
「巴里파리의 어머니날」 『新家庭』신가정 1933. 05 구미여행기
「伯林백림에서 倫敦윤돈(런던)지」 『三千里』삼천리 1933. 09 구미유기 5
「西洋서양 藝術예술과 裸體美나체미」 『三千里』삼천리 1933. 12 구미유기 6
「밤거리의 祝賀式축하식(歐구)」 『中央』중앙 1934. 02 구미여행기
「多情다정하고 實質的실질적인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婦人부인-歐米구미 婦人부인의 敎養교양잇는 家庭生活가정생활」 『中央』중앙 1934. 03 구미여행기
「情熱정열의 西班牙行서반아행」 『三千里』삼천리 1934. 05 구미유기 7
「巴里파리에서 紐育뉴욕으로」 『三千里』삼천리 1934. 07 구미유기 8
「太平洋태평양 건너서(故國고국으로)」 『三千里』삼천리 1934. 09 구미유기 9
「伊太利이태리 美術館미술관」 『三千里』삼천리 1934. 11 구미여행기
「伊太利이태리 美術紀行미술기행」 『三千里』삼천리 1935. 02 구미여행기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三千里』삼천리 1936. 04 구미여행기


페이니스트산문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母된感想記」모된감상기 『東明』동명 1923. 01. 01. ~ 21 페미니스트 산문
夫妻間부처간의 問答문답 『新女性』신여성 1923. 11 페미니스트 산문
「나를 잇지 안는 幸福행복」 『新女性』신여성 1924. 08 페미니스트 산문
「생활 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 『東亞日報』동아일보 1926. 01. 24 ~ 30 페미니스트 산문
「나를 잇지안는 幸福행복(帝展入選後感想제전입선후감상)」 『三千里』삼천리 1931. 11 페미니스트 산문
「아아 自由자유의 巴里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구미만유하고 온 後후의 나」 『三千里』삼천리 1932. 01 페미니스트 산문
「畵家화가로 어머니로-나의 十年間10년간 生活생활」 『新東亞』신동아 1933. 01 페미니스트 산문
「離婚이혼 告白狀고백상-靑邱氏청구씨에게」 『三千里』삼천리 1934. 08 ~ 09 페미니스트 산문
「新生活신생활에 들면서」 『三千里』삼천리 1935. 02 페미니스트 산문


기타 및 미발굴

작품 제목 작품 발표지 작품 출간시기 작품 유형
「노라」 『노라』(영창서관) 1922. 06 노래가사
「예술가의 생활」 『青年』청년 1927. 06 (미발굴)
「名流명유 婦人부인과 産兒制限산아제한」 『三千里』삼천리 1930. 08 설문응답
「안데팬당式식이다-설문·混迷低調혼미저조의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님회를 批判비판함」 『東光』동광 1932. 07 설문응답
「떡 먹은 이야기」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 1934. 01. 14 콩트
「朝鮮조선에 태어난 것을 행복으로 압니다」 『三千里』삼천리 1934. 05 설문응답
「내가 서울 여시장이 된다면」 『三千里』삼천리 1934. 07 설문응답
「巴里파리의 그 女子여자」 『三千里』삼천리 1935. 11 희곡
「애정에 우노라······」 『三千里』삼천리 1937. 04 (미발굴)


관련 항목

관련 장소

출생지

나혜석의 생가터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5번지)에서 호조 참판을 지낸 나영완(羅永完)의 손녀이며, 시흥군 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교육을 받은 지역

매향중학교 초창기















1910년 6월 수원 삼일여학교(수원 매향중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매향중학교(梅香中學校)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있는 사립 중학교로, 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이 1902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 내에 ‘사립삼일여학당’으로 설립하였다가 1909년 삼일여학교로 변경하였다. 나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 중 한 명이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1910년 9월 1일 경성부에 있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했다가 1913년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1905년 설립자 엄준원이 사저인 달서위궁에 사숙을 설치한 것이 시초로, 1912년에는 초대 이사장으로 자리하여 진명여자고보와 진명여자보통학교를 나누어 경영하였으나, 1928년 경성여학원 폐지와 함께 진명여자보통학교를 폐지하였다. 해방 이후 진명여자중학교와 진명여자고등학교로 개편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피난 학교를 세워 임시로 수업을 이어나가다가 1953년 서울에서 다시 개교하였다. 1987년에는 진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 진명여자고등학교로 통합되었다.
  • 여자미술학교
여자미술학교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여자미술학교(여자미술대학의 전신) 유화과(油畫科)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여자미술대학(일본어: 女子美術大学 죠시비주쓰다이가쿠, Joshibi University of Art and Design)은 도쿄도 스기나미구에 있는 사립 미술대학이다. 도쿄 5대 미술대학(東京5美術大学)에 속한 명문 미술대학으로 흔히 조시비라고 부른다. 역사가 깊은 학교이며 일제 강점기에 신여성들이 많이 유학하여 한국에서도 동경여자미술대학으로 알려져있다. 


여행을 다닌 지역

나혜석 부부는 1927년 6월 19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경성역에서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모스크바를 거쳐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김우영이 법률 공부하러 독일 베를린으로 간 사이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 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 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또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의 밀라노, 피사의 사탑,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독일의 베를린,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을 두루 견학하였으며 알프스 산맥을 오르기도 했다. 1928년 12월 넉 달 만에 다시 만난 나혜석 부부는 여행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을 관광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 필라델피아, 나이아가라 폭포, 시카고, 그랜드 캐니언, 로스앤젤레스, 마리포사 대삼림 등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하와이, 요코하마, 도쿄를 거쳐 1929년 3월, 21개월간의 세계 일주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항일장소

나혜석은 2.8독립선언에 참석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귀국,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한다. 3·1 운동이 터지자 당시 이화학당 교사였던 박인덕을 찾아가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서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다니며 지인을 만나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를 권유하여 3월 5일 아침 이화학당 식당에서 만세운동을 한다.
  • 서대문 형무소 및 경성 법원
3·1 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입수, 비밀리에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된다. 나혜석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3월 5일 만세운동 참여, 사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 뒤 3월 25일 다시 이화학당에서 만세 사건이 터지면서 ‘3·25 이화학당 학생 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면서 경성 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김마리아 등과 함께 3·1 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교사로서 일한 장소

  • 여주공립보통학교
1915년 1월 여자미술학교 2학년의 3학기가 시작되기 전, 아버지의 결혼 강요와 학비 송금 중단에 맞서 휴학을 하고 일시 배편으로 조선에 되돌아와 일자리를 구하던 중, 여주공립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 진명여학교
1918년 4월 귀국한 이후 모교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울에서 첫 번째로 개인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민중의 삶을 표현한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를 발표하였다.
  •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영생중학교
1918년 경성과 함흥을 오가며 경성부의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미술 교사와 함흥의 영생중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곧이어 정신여자중고등학교와 영생중학교의 교사직도 사직하였다.
  • 미술연구소, 여자미술학사, 이화여자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1933년 2월 고향인 수원에 내려가 미술연구소여자미술학사를 운영하였다. 서울 수송동 46번지 15호 목조 2층 건물에 개설한 여자미술학사(女子美術學舍)는 나혜석이 졸업한 여자미술학교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또, 이화여자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의 미술 강사로 강의하였다.

생애 후반에 머무른 장소

  • 안양 양로원, 청운 양로원
나혜석은 작품 활동을 계속하려 했으나 파킨슨병과 우울증이 악화되었고, 주변에서는 파킨슨병으로 장애를 겪는 그에게 폭언과 조롱을 퍼부었다. 그 뒤 주변에서는 그를 부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했고, 한때 안양 양로원에 가 있다가, 1944년 10월 22일 오빠 나경석에 의해 ‘최고근(崔古根)’이라는 불교명으로 인왕산 근처 청운 양로원에 맡겨졌다.
  • 경성 기독보육원
1945년 정신이상이 심하고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양로원에서 퇴소하고 1945년 해관 오긍선(海觀吳兢善)이 운영하는 경기도 시흥군의 안양 경성 기독보육원의 농장으로 옮겨진다.
  • 서울시립남부병원, 서울시립자제원
1946년 행인에 의해 발견되어 서울의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입원되었다. 그 뒤 병원에서 나와 1948년 공주의 마곡사(麻谷寺)에 갔으나 병세가 악화하자 스스로 마곡사를 나와 그해 11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는 서울시립자제원(慈濟院)으로 갔다.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그 외 관련 장소

  • 조선연합교회
기독교 신자가 된 나혜석은 1917년 12월 동경 고치마치 구(麴町區) 이이다 정(飯田町) 조선연합교회 교회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 정동제일교회
1920년 4월 10일, 나혜석이 제시한 4가지 조건(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을 받아들인 김우영과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하였다.
  • 수덕사, 수덕여관
수덕사.jpeg


















1935년 10월의 소품전 실패와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충격을 받고 방황하다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 생활에 매력을 느껴 이혼의 아픔을 안고, 동갑에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는 충남 예산의 덕숭산 자락을 찾아갔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홍성 수덕사 근처에 머무르며 승려가 되는 결심을 굳혔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충남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백제 때에 창건되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며 내포 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이기도 하다.
  • 해인사
1938년 기행문인 해인사의 풍관을 발표하였다. 관광지를 소개하면서 총독부의 행태를 꼼꼼하게 적었다. 해인사를 다녀온 뒤 조선총독부에서 문화재를 복사하는 것까지도 일일이 검열한다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림 해인사 풍경은 이때의 작품인데, 그는 해인사 방문 당시 홍도 여관에 묵은 기념으로 여관주인에게 해인사의 풍경을 그려 선물하였다.
  • 나혜석거리
나혜석거리.jpg
















나혜석거리는 수원 태생인 최초의 한국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약 300m 가량의 문화 거리로 경기도 문화의 전당, 효원공원, 야외음악당 등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행자 전용 도로로서 거리 공연과 같은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거리이다.


관련 미디어

생애관련 미디어

  • 꼬꼬무 11회 요약 "정조는 취미일 뿐" 경성을 뒤집어 놓은 세기의 스캔들,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모던걸 나혜석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 公공연한 시리즈 나혜석 그는 누구인가?ㅣ2화(세종문화회관 공공연한시리즈)]


작품관련 미디어

관련 기타 사항

RDF

주어 목적어 관계
나혜석 경희 집필하다
나혜석 모된감상기 집필하다
나혜석 이혼고백서 집필하다
나혜석 구미만유기 집필하다
나혜석 인상주의 화법 구사하다
나혜석 삼일여학교 재학하다
나혜석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하다
나혜석 이화학당 항일운동하다
나혜석 김우영 결혼하다
나혜석 김우영 이혼하다
나혜석 최승구 사별하다
나혜석 최린 외도하다
나혜석 신여성 평가되다
나혜석 2.8독립선언 참여하다
나혜석 여자계 참여하다
나혜석 삼천리 이용하다
나혜석 동아일보 이용하다
나혜석 축첩제도 비판하다
경희 삼종지의 비판하다
경희 계몽문학 부문이다
경희 페미니즘 문학 부문이다
이혼고백서 페미니즘 문학 부문이다
모된감상기 페미니즘 문학 부문이다
여자계 경희 발표하다
구미만유기 동아일보 발표하다
나경석 김우영 소개하다
나경석 최승구 소개하다
나기정 최시의 부부이다
나기정 나혜석 자녀이다
나기정 나홍석 자녀이다
나기정 나경석 자녀이다

네트워크 그래프


작성자 및 기여자

인문콘텐츠와 정보기술(20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인정해조, 작성자 김지수, 안솔, 유민정, 천성현, 홍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