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4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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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대문 관련영상 문화유산채널공공누리 제4유형 by문화유산채널

대한민국 4대문
방향 이름 위치
동대문 흥인지문 종로구 종로
서대문 돈의문 종로구 평동
남대문 숭례문 중구 세종대로
북대문 숙정문 종로구 북촌로

동대문(흥인지문)

설명

서울 도성의 8문 중 하나로 정동에 위치하여 속칭 동대문이라 불리워지나 원이름은 興仁門으로 조선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축조와 함께 건립되고 단종 때 중수되고 고종 6년(1869)에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武砂石으로 아치형의 虹霓門을 만들고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밖에 반월형 壅城을 돌리고 있는데 이것도 고종 개축 때의 것이다. 우진각지붕인 문루의 규모는 상하층 정면 5칸, 측면 2칸이나 치수는 하층이 21.97mx7.3m로서 상층의 19.94mx5.24m보다 조금 크며 하층은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상층은 기둥 사이를 네모나게 구획하여 한짝 열 개의 판문을 달고 누마루를 깔았고 상층 천정은 지붕 構架材가 전부 노출된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공공누리 제 4유형 by:국립문화재연구소

역사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특별히 지(之)자를 넣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흥인지문의 현판은 4대문 중 유일하게 4글자,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 2015년에는 도로를 내면서 끊어진 문 북쪽의 도성 자리에 석재를 포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사고

2018년 3월 9일 새벽 1시 49분경 40대 남성이 흥인지문의 누각에 몰래 침입하여 미리 준비한 종이박스에 불을 붙였으나, 다행히 흥인지문은 담장 일부가 그을리는 데에 그치고 방화범은 당일 체포되었다. 흥인지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동묘, 창의문, 경교장 등과 함께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보물 제1호 서울흥인지문 복원공사(현황) 흥인지문(동대문)배치도 문화재청공공누리 제 1유형 by문화재청

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07년 12월 19일 옛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었고, 2009년 4월 29일 착공해 2014년 3월 22일 개관하였다. 뉴욕타임즈는 2015년 1월 DDP를 '꼭 가봐야 할 세계 명소 52곳'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00년대 이후 침체되어 있던 동대문 일대의 상권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DDP 담당자는 1주년 언론보도에서 "5000억 원짜리 목적없는 공공건축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개관 후 주변 상권 매출이 15~25 퍼센트 증가했다."라고 밝혔다. 2년차 보도에서는 '동대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라고 평가받았으며지역 유동인구가 개관 전에 비해 10% 증가했고 주변에 숙박업소 및 식당이 크게 늘어났으며 건축지 인근의 낙후한 이미지를 고급화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진

영상

흥인지문영상 공공누리 제 1유형 (by한양도성도감)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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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Google Map Public Domain

서대문(돈의문)

설명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대문이다.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신문로)나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말이다.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만든 것이다. 1915년에 철거되었다.

역사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는데, 축성 당시에는 돈의문이 사직동 고개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돈의문을 닫고 서전문(西箭門)을 설치하였는데, 이숙번의 건의로 인덕궁 앞 소동(小洞)에 세워졌다. 1422년(세종 4년) 2월에는 서전문을 막고 다시 돈의문을 열었다.1711년(숙종 37년)에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1915년 3월에는 돈의문을 헐고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여,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염덕기(廉德基)가 목재를 낙찰받았으며 그 외의 귀중한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6월에 강제 철거가 완료되었다. 2009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현재 돈의문 복원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돈의문은 서대문구에 소재하였으므로 그 구명(區名)을 서대문에서 따 왔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중구 관할 지역에 속한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다.

교통, 보상 등 현실적인 복원은 요원한 상황에서 2018년 12월 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우미건설, 문화재청, 서울시, 제일기획이 돈의문의 증강현실 복원을 위해 MOU를 체결했다. 그래서 우미건설 등은 2019년 상반기까지 돈의문을 증강현실로 복원할 계획이다. 복원이 실현되면 돈의문 터로 알려진 정동사거리에 돈의물 조형물을 설치하고 스마트폰의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돈의문을 볼 수 있게된다.


디지털 복원

일제 때 사라진 돈의문, 104년 만에 디지털로 복원 돈의문 디지털로 복원보도공공누리 제 1유형(by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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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터

남대문(숭례문)

설명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이 아니라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주 1]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이[출처 필요] 축성하였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있었다.

역사

1398년(태조7년) : 숭례문 완성 1478년(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짐. 그 시기의 적절성으로 수리를 미룸 1907년 :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08년 9월 :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이 훼철됨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12월 20일 :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재지정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2013년 5월 4일 : 숭례문 공식 개방

사고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70, 경북칠곡)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초기에는 왜 불을 일찍 끄지 못하였나가 주 초점이였다. 하지만 이는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판명되었다.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은 물이 닿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다.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현장을 공개했다.

사진

영상

숭례문 영상공공누리 제 1유형(by:한양도성도감)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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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 4호선 회현역 5번출구 도보 7분
  • 1호선 서울역 4번출구 도보 10분
  • 2호선 시청역 8번출구 도보 10분
  • 경의중앙선 서울역 2번 출구 도보 11분
  • 1호선 시청역 7번출구 도보 12분

숙정문(북대문)

역사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지명 유래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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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교통

지하철

  • 4호선 한성대입구 6번출구에서 1111번, 2112번 상차후 성북동(명수학교 : 종점)에서 하차후 도보로 10분
  • 지하철3호선 안국역 2번출구 - 지선(초록)버스 종로02번 탑승하여 종점(성균관대후문)에

서 하차 - 도보 10분 - 와룡공원 도착 - 와룡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도보 10분

  • 지하철4호선 혜화역 1번출구 - 지선(초록)버스 종로08번 탑승하여 종점(명륜3가)에서 하차 - 도보 10분 - 와룡공원도착 - 와룡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도보 10분

참고문헌/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