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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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토미 소호(1863~1957)

생애

도쿠토미소호사진.jpg

↑도쿠토미소호의 모습이다.

일본의 평론가. 구마모토[熊本]에서 출생. 도쿠토미 로카[德富蘆花]의 형. 어릴 때부터 미국풍의 교육을 받고 뒤에 도시샤[同志社]에서 배웠다.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1891년 향리에 오에 의숙[大江義塾]을 개설, 자제의 교육을 노력함과 동시에 후년의 그의 사업의 기초 학력을 길렀다.

소호는 히고 성 미나마타(현 구마모토현)에서 메이지 유신 직전 사무라이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마모토 요가코에서 에이가쿠("영어학")를 공부했고, 이후 교토의 도시샤(이후 도시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졸업하지 않고 학교를 떠났지만, 후에 학교의 교장 조셉 하디 네시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적었다.

구마모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지방 신문을 시작한 소호는 도쿄로 이사했다. 1887년 민유샤 출판사를 설립하여 1887년부터 1898년까지 일본 최초의 종합뉴스 잡지인 고쿠민노토모("국민 친구")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민유샤는 이 뉴스잡지 외에 가족문제 잡지인 카티 자시("홈 저널", 1892–1898), 코쿠민 노 토모의 영문판("극동", 1896–1898), 영향력 있는 신문인 코쿠민 신분(1890–1929)도 발행하였다.

소호는 처음에는 자유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옹호자였는데, 이는 서구 국가들을 전반적으로 모방하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와 정치적 질서가 형성되고 특히 미국은 일본이 가능한 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근대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문과 잡지는 마쓰카타 마사요시 1기 정권 때 당시의 숱한 부패 스캔들을 비판하며 정권 측면의 가시였다. 그러나 제1차 청일전쟁과 삼자개방에 이어 그의 정치적 견해는 정치 스펙트럼의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1890년대 후반까지 메이지 과두정치의 보수파 챔피언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 카츠라 타로 총리의 측근이었다. 1905년까지 고쿠민 신분(神bun)은 정부의 입구로 간주되었고, 이와 같이 그 사무실은 히비야 폭동 때 시위대의 표적이 되었다.

1910년 소호(小 under)는 일본의 지배하에 한국의 주요 일본 신문 중 하나인 니포 게이조( Nipp)를 창간하였다.

소호는 이들 출판물을 총괄 편집자로 감독하면서 국제문제에서부터 역사, 전기, 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350여 편의 기사를 기고했다. 또한 1918년부터 1952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100권으로 출판된 킨세이 니혼 고쿠민 시("초기 근대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1943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Sohō 미국 주둔 세력에 의해 의심을 가지고, 체포에 의거하여 일본의 12월 1945년 8월 1947년까지 A급 전쟁 범죄로 그 직업 중에 열렸다 보았다. 그 혐의들은 결코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고(일부 그의 나이 때문에—그 당시 그는 82세였다) 그는 아타미의 자신의 별장에서 가택 연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아타미에서 계속 살았다.

메이지 시기에서 쇼와 시기의 저널리스트. 1887년대 전반에 소호(蘇峰)가 제창한 평민주의는 맨체스터파의 자유무역주의,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론 등의 영향하에 형성된 것으로 산업 우선의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미유럽을 규범으로 한 사회의 민주적인 개혁과 평화주의를 주장하여 초기 의회기의 민당(民黨)의 민력(民力) 휴양론(休養論)을 지지하는 이론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3국 간섭 등으로 국제사회는 무엇보다 국가의 ‘힘이 우선한다는 인식에 서게 되어 이상론을 배척한 현실주의적인 정치론을 전개하게 된다. 러일전쟁 후에는 미국의 배일(排曰) 이민법 등에 반발, 점차 친미유럽적 자세가 후퇴하고 황실의 존재와 일본 국민의 역사적 기억을 공동체 의식의 핵으로 하여 국가의 단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의를 전개, 자본주의ㆍ공산주의와도 다른 일본 독자의 국가사회 건설의 필요를 주장하였다. 언론계의 중진으로서 그 논의는 정계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전후에는 A급 전범이 되었다.


요약

일본의 언론인이자 비평가. 출판사 민유샤를 설립한 이래 일본 최초의 종합지 《고쿠민노토모》를 발행하였고 이후 《고쿠민 신문》, 《고쿠민 총서》, 《가정잡지》 등을 발행하여 언론계를 주도하였다. 조선총독의 요청으로 《경성일보》의 감독을 맡았다.

활동내역

《고쿠민 신문》, 《고쿠민 총서》, 《가정잡지》등을 집필 한 뒤 조선총독의 요청으로 경성일보의 감독을 맡았다.

도쿠토미는 초기에는 평민주의를 지향하였으나 점차로 정부의 입장에 서서 군비확장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1887년 민유샤 출판사를 설립하여 1887년부터 1898년까지 일본 최초의 종합뉴스 잡지인 고쿠민노토모("국민 친구")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민유샤는 이 뉴스잡지 외에 가족문제 잡지인 카티 자시("홈 저널", 1892–1898), 코쿠민 노 토모의 영문판("극동", 1896–1898), 영향력 있는 신문인 코쿠민 신분(1890–1929)도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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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는 이들 출판물을 총괄 편집자로 감독하면서 국제문제에서부터 역사, 전기, 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350여 편의 기사를 기고했다. 또한 1918년부터 1952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100권으로 출판된 킨세이 니혼 고쿠민 시("초기 근대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1943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전범용의자로 자진 반납하였다)

작품 및 저서

기타(수상내역 등)

근대 일본 제국의 의회로, 입법부의 주축의 하나이며 일본 제국 헌법에 따라 세워진 일본 제국의회 중 하나인 귀족원 의원 에 추대되었다.

일본의 관공서 중 하나로, 문부과학성의 특별 기관인 학사원 회원 에 추대되었다.


1943년(쇼와 18년) 4월 29일 발령된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 역사·정치 평론으로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1946년(쇼와 21년) 반납하였다.

그 이유는 1945년(쇼와 20년) 12월에 A급 전범 혐의로 체포 명령이 나온 것을 고려해 도쿠토미는 언론인으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도쿠토미 구마모토 태어났다
도쿠토미 이광수 대부이다
도쿠토미 경성일보 감독이다
도쿠토미 고쿠민노토모 집필했다
도쿠토미 고쿠민 신문 발행했다
도쿠토미 고쿠민 총서 발행했다
도쿠토미 가정잡지 발행했다
도쿠토미 민유샤 설립했다
도쿠토미 군국주의 지지했다
도쿠토미 A급전범용의자 이다
도쿠토미 승리자의비애 집필했다
도쿠토미 독서구십년 집필했다
도쿠토미 3대인물사 연재했다
도쿠토미 니지마조 세례받았다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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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분류/엮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