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독립문

개요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7년에 걸쳐 완공된 기념문이다.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기념비로서 만든 것으로 "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다른 외세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지도를 불러오는 중...

역사

건립 과정

독립문의 최초 건립 과정에서 당시 청일전쟁을 벌였던 일본의 의사가 반영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박영효와 유길준의 개입이다.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그 필립 제이슨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당시 청이 꾸준히 압박당하는 상황에서 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은 전방위적으로 퍼져있었고,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인 동시에 오로지 독립문 건립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서재필은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세레딘 사바친이 설계를 했으며, 조선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실제로 건축을 하게 된다.

다만 서재필의 귀국과 실제 독립문 건축 시작의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다. 바로 1896년 2월에 벌어진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일본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일본의 의도로만 독립문이 건설되었다는 것이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이 와중에 기존의 친일에 기울었던 정부 관료는 다 죽어나갔지만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꾸준히 독립문 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게 설득력을 얻으면서 독립이란 표현이 들어간 최초의 단체가 등장하는데 바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이다. 이 독립 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갈 정도로 친정부적 성향으로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 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취임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가 창설되었는데 회장이 안경수, 위원장이 이완용이었다.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독립 협회건 독립 신문이건 죄다 친정부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의 주도로 독립문 건립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건설 비용은 독립 신문과 독립 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0월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독립 신문과 독립 협회는 충실하게 이 과정을 지지한다. 이 덕분에 완성된 독립문은 대한 제국의 문이 되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다.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기가 소위 말하는 '독립문 태극기'이다.


영은문 주초.jpg

이러한 이유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기묘한 돌기둥이 영은문의 주초이다.

해방 이후

1979년,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성산로를 건설하는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와 금화터널 예정지가 독립문 부지와 간섭되자, 이를 이격시켜 고가도로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다. 1979년에 성산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은 "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자는 마음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독립문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독립문 고가 차도가 일산, 운정, 행신, 가좌동, 연대앞을 비롯한 수도권 서북부 지역과 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 도로라서 반발이 엄청날 게 뻔해서 복원이 어렵다. 일산, 운정을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 버스가 이 독립문 고가 차도를 지나갈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에는 순수한 석조물로 알고 있었으나, 뜯어 보니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 지금과 달리 한글도 우에서 좌로 썼기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었다.

관련 사건

년도 상세
1993년 12월 13일 전국 농업대학교 대표자 협의회가 독립문 옥상에 올라가 시위를 벌임
2004년 12월 20일 전농 소속 농민들이 쌀개방 반대를 외치며 독립문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임
2008년 1월 24일 인권단체들이 독립문을 점거해 시위를 열 계획이었지만 오르는데는 실패
2018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문까지 퍼레이드 실행

주변 환경

서대문독립공원.jpg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jpg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산자락길.jpg

안산자락길

이진아기념도서관.jpg

이진아기념도서관


참고영상

작성자

조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