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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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 일본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조선의 신문학을 건설하고 문명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 세 인물을 일컬어 '동경삼재'라 부른다.

관계

이광수최남선이 서로의 얼굴을 익혔던 것은 그들 나이 15세, 17세 때의 일이다.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둘은 미국에서 온 청년 안창호가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참석할 당시 마주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홍명희의 소개로 세 수재는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홍명희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호암 문일평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이광수를 알게 된다. 후에 최남선과 인연이 닿게 된 홍명희가 둘을 연결시켜주어 비로소 동경삼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열살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란 이광수에게 그 둘은 엄청난 버팀목이 되었으며, 최남선홍명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거리낌이나 편견 없이 잘 어울렸다. 당시 이미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남선의 잡지 「소년」에는 이광수홍명희 정도만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각별했다. 세 사람은 동경 유학 시절을 보내며 조선의 신문학 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고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만나면 항상 이와 관련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활동

문학활동

홍명희는 자연주의 문학, 이광수는 문학과 사회 평론, 최남선은 역사와 조선문화 영역에서 각자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교류를 통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고 그 흔적은 유학 시절과 그 이후의 문학활동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일본은 1900년대 후반기부터 일본문학사상 근대문학의 확립기이자 자연주의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특히 홍명희는 인간 내면의 일그러진 심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일본의 자연주의 작품에 빠져 탐독하였는데, 그 영향이 이광수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홍명희는 이광수에게 바이런, 톨스토이, 러시아 작품 등을 추천했고 둘은 이후 바이런의 작품을 유달리 즐겨 읽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홍명희와 달리 이광수는 오히려 바이런을 악마주의로 평가하며 톨스토이를 경도하기 시작했다.

  • 「대한유학생회학보」,「대한홍학보」

세 명은 동경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에 직접 기고를 하며 편집 활동을 이어나갔다.이광수는 기고활동을 통해 새로운 문체에 기반한 문학 작품들을 발표하고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도서 선정 방법을 7가지 주제에 맞춰 소개하며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됐던 진화론, 세계사와 관련된 지식을 전하며 조선의 문명화에 힘썼다. 최남선은 자신의 전공이었던 역사지리에 맞게 서구의 인물, 역사, 근대 문명 등을 소개하는 글을 씀으로써 그 영향을 조선에까지 전하려고 노력했다.

이광수홍명희최남선이 발간하는 『소년』지에 글을 실으며 또 한번 그들의 관계를 증명했다. 이광수는 <어린희생>이라는 단편소설을 연재하였는데, 당시 그의 시대적 상황이 고스란히 투영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어려움을 겪는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로, 전쟁이 참담함을 담고 있다. 이는 일본 유학 당시 그가 보고 느꼈던 것이 크게 반영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홍명희가인이라는 필명으로 총 세편의 번역문을 실었는데, 폴란드 시인 네모에프스키의 시「사랑」을 비롯하여 시인 이반 끄릴로프의 우화시, 세익스피어와 밀튼의 격언 등을 소개하였다. 이 중에는 유학시절 작성했던 독서노트에서 발췌한 것도 일부분 있으며 당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러시아 문학과 그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있다.

독립운동

독립운동의 면에서 세 명은 각자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작성했고 그 이외에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독립지에 애국계몽적 논설을 여러차례 쓰는 등 활발한 운동을 펼쳤다. 이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안창호와 함께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1938년 안창호가 수감 도중 병사한 것이 그의 심경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불면증을 비롯한 신경증에 시달리던 그는 11월에 보석을 신청하였고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전향을 선언, 친일활동을 전개한다.

최남선 역시 안창호가 설립한 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을 펼쳤고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조선어 고서 발간, 조선어 사전 편찬 등 업적을 이뤘다. 3.1 운동 만세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복역 후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의 위원을 지내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을 주장하는 등 친일 활동을 이어나간다.

반민족행위자로 변졀하여 대동아전쟁에 자녀들을 학도병으로 출정시키도록 권유했던 이광수최남선과는 달리 홍명희는 아버지 홍범식의 정신을 물려받아 끝까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도 기울어가는 조국의 정세에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당장 조선에 신문학을 건설하는 것보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등 일찌감치 그 의지를 보였다. 귀국 이후 3.1운동을 계승하여 충북 괴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지낸다. 출옥 후, 사상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한 뒤에도 아들과 손자에게 아버지 홍범식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관련영상

RDF구축 내역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명희 동경삼재 A는 B라 불린다
최남선 동경삼재 A는 B라 불린다
이광수 동경삼재 A는 B라 불린다
홍명희 일본 A는 B에서 유학했다
최남선 일본 A는 B에서 유학했다
이광수 일본 A는 B에서 유학했다
홍명희 「소년」 A는 B에 참여했다
최남선 「소년」 A는 B을 집필했다
이광수 「소년」 A는 B에 참여했다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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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