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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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박길룡(朴吉龍, 1989. 11. 20~ 1943. 4. 27)은 일제강점기의 건축가이다.

생애

1989년 11월 20일 서울시 종로구에서 이남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10세에는 물장수, 쌀 배달 등으로 학비를 대며 신흥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에 제 2회 졸업생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조선총독부 건축기수(建築技手)로 들어갔다. 총독부에 배치된 박길룡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신축공사의 실무자로 참여했다. 1920년에서 1932년까지, 기수로 있던 12년 동안 박길룡은 역량을 인정받았다. 특히 설계도면을 빠르고 정확히 그려내는 데 놀라움을 샀다. 1932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사(技師)가 되었다. 이것은 건축물을 세우는 관(官)에 있어선 최고기술자를 이르는 관명이었다.

하지만 곧 관직을 사직하고 같은 해 7월, 종로구 관철동에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한국인 건축가들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38년 사단법인 조선건축회(朝鮮建築會) 이사가 되었고, 같은 해 조선주택영단에 참여하였다. 1941년 경기도 건축대서사(建築代書士, 현 건축사협회) 조합장을 역임, 내선일체를 추진하고 일제에의 멸사봉공을 촉구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중앙조직의 사무국 문화부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1943년 조선수리조합회 건축사무 촉탁 등을 역임하였다.

1943년 공평동 사무실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경성부윤 후루이치는 조사에서 그가 "(중략) 지성으로 일관되게 직무에 진력함으로써 신정회 발족에 유감없도록 하는 등 그 공적은 현저하다." 했다.


설계에 참여한 건축물

1931년, 화신백화점

1931년, 경성제국대학본부

1931년, 동일은행 남대문지점

1934년, 한청빌딩

1937년,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및 강당

1938년, 보화각

1940년, 평양 대동공전 교사

1943년, 혜화 전문학교 본관

1943년, 이문당

저술 활동

박길룡은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조선과 건축》에서 김윤기와 쌍벽으로 가장 많은 글을 실었는데, 이들의 글은 구조, 의장, 고건축, 설비 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193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였고, 《과학조선》에서 편집을 했으며, 《도시의 건축》에서도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이외 단행본으로 《제래식 주가 개선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다. 1941년 4월 14일, 타블로이드식 월간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했는데, 이는 조선인 건축가에 의한 최초의 건축 잡지였다.

관련 영상

참고자료

박길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길룡, 위키백과

『朝鮮の建築』 22(朝鮮建築會,1943)

『공간』-박길룡특집호-(공간사,1967.4.)


작성자

정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