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1910~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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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1909년, 한성부(서울) 종로에서 출생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7세에 학교를 휴학하고 외국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학창시절에 「달맞이」, 「누님」등의 시와 「최후의 모욕」 등의 콩트를 발표하였다.

  • 1929년, 영문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도쿄 호세이 대학 법정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중퇴

1933년에는 이때 일본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쓴 「반년 간」을 발표한다.

  • 1930년, 귀국한 이후 소설, <수염>, <적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

비슷한 시기에 헤밍웨이, 맨스필드 등의 영미 작가들의 최신 문학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영,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워 '기교파' 또는 '예술파'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 1934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같은 해 10월 27일 한의원 김중하씨와 부인 이연사씨의 무남독녀 김정애와 결혼하였다. 또한, 「딱한 사람들」, 「애욕」, 「거리」 등 식민지 도시인의 심리와 인간에 대한 연민을 세련되고 실험적인 문장으로 담아낸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에 소설 <방란장 주인>을 발표

잡지「조광」에 「천변풍경」을 연재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 1940년, 돈암동에 집을 지어 이사한 뒤에 겪은 일들을 토대로 한 소설 「음우」, 「투도」, 「채가」를 발표

이 시기에는 중국 문학과 역사물 번역도 활발하게 이어나가 「신역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지나소설집」 등을 번역하였다.

  •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음.

그러나 1948년에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전향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활약상을 그린 「약산과 의열단」, 장편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는 역사소설 집필에도 열중하여 「춘보」, 「태평성대」, 「군상」 등을 저술하였다.

  • 1950년 문우였던 이태준, 안회남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여

한국전쟁 직후에는 평양 문학대학 교수, 국립고전 예술극장 전속 작가로 활동하며 『조선창극집』, 『정수동 일화집』 등을 저술하였다. 1950년에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정인택, 이용악 등을 따라 남조선문학가동맹평양시찰단원으로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같은해 7월경 조용만에게 목격된 것이 남쪽에서 박태원을 보았다는 것이 마지막 증언이다.

이후의 삶은 정인택과 권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박태원의 양녀이자 둘째딸인 정태은이 2000년 평양에서 <나의 아버지 박태원>이라는 글로 통일 문학에 발표하여 월북 이후의 행적을 월북한 문인들 중에 비해 소상히 알려질 수 있었다.

  • 1952년 로동 신문이 리순신 장군을 연재, 인조국전쟁 360주년 기념 '리순신 장군전'을 발간
  • 1953년 문학대학 교수로 재직, 국립 고전예술극장 전속작가로 활동
  • 1956년, 박태원의 경성제일고보 동창이자 구인회 시절 동료였던 정인택의 아내, 권영희와 정인택 사후에 재혼

남로당계 숙청으로 작품활동이 중단되었다가 이후 작가로 복귀하여 「삼국연의」, 「임진조국전쟁」 등을 저술하였다.

  • 1979년 12월 1일 국기 훈장 1급 수여와 70회생일상 하사
  • 1986년 7월 10일에 고혈압으로 사망한 즉시 <조선문학>에 부고 기사가 실렸다.
  • 1998년 11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애국렬사로 승인하여 평양 신미리 렬사릉으로 이장

대표작 및 사후작품

대표작

  1. <누님>(1926)
  2. <적멸>(1930)
  3.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
    •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을 모더니즘적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4. <방란장 주인>(1936)
    • 특이하게도 마침표 없이 한개의 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5. <천변풍경>(1936년)
    • 잡지 <조광>에 연재한 작품, 큰 줄기의 서사 없이 삽회들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을 두고 임화나 채재서 등의 여러 평론가들이 장편 소설, 세태소설의 논의를 이어갔다.
  6. <성탄제>(1937)
    • 카페 여급이나 도시 빈민 등과 같은 도시의 주변적 삶을 조명하는 작품 중 하나
  7. <우맹>(1938)
    •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집단 살인 사건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후에는 <금은탑>이라는 제목으로 개제된다.
  8. <음우>,<투도>,<채가>(1940)
    • 돈암동에 이사한 뒤의 일을 토대로 한 소설로 일제 말기 작가로서의 내면의 갈등을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어 '자화상 3부작'으로 불린다.
  9. <계명산천은 밝았느냐>(1963)
    • 북한에서 저작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이다.
  10. <갑오농민전쟁>1부(1977), 2부(1980), 3부(1986)
    •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로, 1950년대 작품 구상과 자료 수집을 하다가 1964년 저술하기 시작하였으나 실명과 전신 불수로 20년 뒤인 1986년 사후에 부인 권영희와의 공저로 완결되었다.

친일 작품

  1. <군국의 어머니>(1942년)
    • 일제강점기 말기에 군국주의를 미화한 작품, 그러나 친인의 행적이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소극적 협력'으로 불린다.

특이사항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 2005년 민족문제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예비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 2004년 구보학회가 창립되었고, 2009년 박태원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전시회 낭독회 등 문화행사가 개최되었다.

그의 호 구보(仇甫)는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쓰고 난 뒤부터 붙게 된 그의 호이다. 그런데 ‘거만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 호에 대해 박태원 자신을 비롯해 친구들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얼마 뒤 이것은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 구보(丘甫)로 바뀌게 된다.

50여년의 세월 동안 소설뿐만 아니라 시, 수필, 평론, 외국문학 번역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여 남한에서는 도시서사의 대표자로, 북한에서는 역사소설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에서 오래 생활하였기 때문에 경알이(서울말)를 문장으로 실현하였다.

선정 당시 친일 작품은 일화 모음집인 <군국의 어머니>외에 조광,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각 한편씩 있어 총 3편이다.

서울에 가족을 모두 두고 단신으로 월북했으며, 중학생이던 맏딸 박영은과 셋째딸 박설영은 1951년 월북, 남은 가족 중 둘째딸의 막내 아들이 영화감독 봉준호이다.

성북과의 관계

1948년부터 1950년, 월북할 때까지 살았던 성북동 230번지 1937년 「약산과 의열단」을 백암담에서 출판하여 이듬해 인세대신 이곳의 싸리 울타리를 두른 초가집 한 채를 받아 이사하였다. 백암당 주민 배정국의 별장 승설암과 절친했던 소설가 이태준의 집이 길 건너편에 있었다. 또한, 만해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있던 초가집이었다. 현재는 2013년에 조성된 ‘만해의 산책공원’의 부근이 이 옛집터이며, 초가집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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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위키백과, 박태원(190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태원 [3] 성북구립도서관, 성북문인, 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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