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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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의 사방에 세운 성문으로, 남쪽의 숭례문(崇禮門)·북쪽의 숙정문(肅靖門)·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을 통칭 사대문이라 한다.

설립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인 한양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곽의 문이다. 한양의 동서남북에는 4개의 커다란 성문인 4대문(사대문,四大門)을 두었고, 4대문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성문인 4소문(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4대문은 세워진 방위에 따라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으로 불리나, 정식 이름은 유교 사상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근거를 두어 지어졌다.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 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 하여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다. 그러나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를 넣어 '숙지문'이라 하지 않고 청(淸)을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

사대문

흥인지문

공유마당 저작자: 이응준 CC BY-NC-ND

개요

지정종목 보물
지정번호 보물 1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69)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었으나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사

공유마당 저작자: 이응준 CC BY-NC-ND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고,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인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 2015년에는 문 북쪽의 도성과 연계하여 석재를 포장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관련 사건

2018년 3월 9일 새벽 1시 49분께 한 방화범이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의 잠긴 출입문 옆 벽면을 타고 몰래 들어가 2층 누각에서 미리 준비해간 종이박스에 불을 붙인 (공용건조물 방화 미수, 문화재 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숭례문의 악몽이 재현될 뻔했으나, 다행히 4분만에 조기 진화되어 담벼락이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구속후 초기 경찰수사에서 방화범이 밝힌 범행이유는 보험금을 받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보물 1호 흥인지문 방화…숭례문 화재 악몽 재현될 뻔 :: TV조선



돈의문

공유마당 저작자: 한국사진사연구소 CC BY-NC-ND

개요

유형 유적
성격 성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

돈의문(敦義門)은 서울에 세워진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이름은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대문(西大門)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1396년(태조 5년)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년)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년)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년)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전차가 들어서면서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역사

공유마당 저작자: 한국사진사연구소 CC BY-NC-ND

돈의문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는데, 축성 당시에는 사직동 고개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돈의문을 닫고 서전문(西箭門)을 설치하였는데, 이숙번의 건의로 인덕궁 앞 소동(小洞)에 세워졌다.

1422년(세종 4년) 2월에는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1711년(숙종 37년)에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1915년 3월에는 돈의문을 헐고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여,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염덕기'가 목재를 낙찰받았으며 그 외의 귀중한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그해 6월에 강제 철거가 완료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2009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현재 돈의문 복원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돈의문은 서대문구에 소재하였으므로 그 구명(區名)을 서대문에서 따 왔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중구 관할 지역에 속한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돈의문의 흔적인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숭례문

공유마당 저작자: 김정민 CC BY-NC-ND

개요

지정종목 국보
지정번호 국보 제 1호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 4가 29)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지만,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역사

공유마당 저작자: 이응준 CC BY NC ND

숭례문은 1396년(태조 5년)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태조 7) 2월에 준공되었다. 그 뒤 1448년(세종 29년) 개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성종 10년)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2003년부터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또한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 금지된 숭례문이 2006년 3월 3일부터 이명박 서울시장에 의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8년 2월 11일 방화로 인한 화재로 붕괴하였다. 5년에 걸친 복원공사로 2013년 4월 29일 복원에 완료하였고 5월 4일부로 개방하였지만, 같은해 10월 부실공사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관련 사건

  1. 1991년 8월에는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숭례문의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았다.
  2. 1997년 2월에는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의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3.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70, 경북칠곡)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다.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에 물이 닿지 않아 초기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다. 불타오른 국보1호 숭례문::KBS뉴스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현장을 공개했다.

복구현장에서 숭례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석축 울타리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 (깊이 2m, 너비 2m, 길이 3m 가량)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 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 위에 옛 성곽 자리를 표시했다.

문화재청에서는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불타 소실된 자리에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여 숭례문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형태를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2013년 5월 복구 준공식을 목표로 하여 2013년 4월 29일 공사 완료하였다.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 복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없어진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각각 복원됐다. 동쪽 계단은 폭이 5m(종전 2.9m)로 늘어난다. 발굴 조사와 옛 자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반은 이전보다 30 ~ 50cm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뀐다. 화재 직전 공장 제품이었던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됐으며, 용마루 길이도 16.6m(종전 15.7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으며, 2층은 9개로 같다.


  • 다시보는 숭례문 600년 역사 :: 문화재청

문화재청 영상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통해 재사용을 허가하고 있음 (CC BY)



숙정문

공유마당 저작자: 이응준 CC BY-NC-ND

개요

이칭별칭 숙청문 (肅淸門)
지정종목 사적
지정번호 사적 제 10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

숙정문(肅靖門)은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역사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대신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과 숙종 대에 만든 홍지문이 북문으로 실제 기능을 하였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작품

1. 대중가요 '사대문을 열어라': 박영호 작사, 김용환(金龍煥) 작곡의 대중가요. 원래 제목은 「인민의 노래」이다.

사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
반만년 옛 터에 먼동이 튼다
노동자야 농민아 청년학도야
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2. 민속놀이 '문놀이' : 두 어린이가 양팔을 뻗쳐 서로 잡아 문같이 만들고 그 밑을 어린이들이 꿰어가는 놀이. 문놀이는 지역에 따라 문지기놀이, 문열어라놀이, 대문열기, 대문놀이, 남대문놀이라고도 한다.

지역마다 노래가 다양한데 가장 유명한 노래는 '동대문'이다.

동 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열 두 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 전라도 지역: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떤 대문에 들어갈까/ 동대문으로 들어가
  • 경상북도 지역: 서울이라 남경사여(남도령아) 대문 쪼끔 열어 주소/ 대문이사 있다마는 열쇠없어 못 열겠네
  • 충청북도 지역: 그 어디 관문인가 경상도 관문일세/ 관문 조곰 열어 주세/ 쇠를 채워 못 열겠네/ 그러나마 열어 주세 이 대문으로 들어가게


3. 전래동요 '대문 놀이'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떤 대문에 들어갈까
동대문에 들어가

서울시 도심보행길

한양도성 순성

사적 제10호인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 5년),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 · 흥인지문 · 숭례문 · 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 · 혜화문 · 광희문 · 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은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한다.


  • 백악구간 :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숙정문, 말바위 안내소, 와룡공원을 지나서 혜화문까지 이르는 구간 (난이도 上)
  • 낙산구간 :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 동대문성곽공원을 지나서 흥인지문까지 이르는 구간 (난이도 下)
  • 남산(목멱산)구간 :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여 장충체육관 뒷길, 나무계단길, N서울타워를 지나서 백범광장까지 이르는 구간 (난이도 中)
  • 숭례문구간 : 백범광장에서 시작하여 숭례문, 소의문 터, 정동을 지나서 돈의문 터까지 이르는 구간 (난이도 下)
  • 인왕산구간 : 돈의문 터에서 시작하여 월암근린공원, 인왕산 순성길을 지나서 창의문까지 이르는 구간 (난이도 上)

자세한 구간 설명과 구간의 지도는 http://seoulcitywall.seoul.go.kr/index.do 를 통해 볼 수 있다.



이음길

이음길 노선도. 서울시 제공 경향신문

서울시가 사대문 안에서 걷기 좋은 길을 꼽아 보행환경을 개선한 뒤 총 25.4km를 ‘도심보행길’로 조성한다. 서울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한 이야기로 5개 노선을 만들어 시민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즐기며 걸을 수 있는 도보관광길’로 만든다는 목적이다. 5개 노선은 ‘이음길’(순환노선, 9.5㎞), ‘옛풍경길’(와룡공원~운현궁~퇴계로2가 교차로, 4.5㎞), ‘늘청춘길’(혜화문~동대입구, 3.8㎞), ‘종로운종길’(서대문역~종로~동대문, 4.0㎞), ‘청계물길’(옛 국세청 별관~청계천로~DDP, 3.6㎞) 등이다.


이음길은 근대 교통의 중심이자 서울의 관문이었던 서울역에서 정동~광화문~인사동~흥인지문~명동을 거쳐 다시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5개 길 중 유일하게 순환하는 노선이다.

시는 보행길 조성과 관련해 무엇보다 보행에 불편을 주는 지장물을 정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이음길’ 상부구간은 총 278곳이 정비대상으로 조사됐다. 시는 횡단보도를 신설하거나 위치를 바꾸고, 공중전화 부스·가로수 등 보행에 불편을 주는 지장물을 제거하거나 이동시킨다.

또 부적합 점자블록, 볼라드, 빗물받이 등을 정비한다. 시는 5개 노선 중 우선 ‘이음길’ 상부구간을 올 6월까지 조성완료하고 나머지 4개 노선은 연내 조성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음길’ 하부구간인 서울역 고가 보행도로는 내년 4월쯤 개방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사진 출처

작성자 및 라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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