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유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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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5세기 초에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애초의 건립 목적이나 도성 내에 자리한 입지도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창덕궁이 자리한 곳은 언덕 지형으로 평탄한 곳이 많지 않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이러한 불규칙한 지형지세를 이용해 궁궐 건물을 경내 남쪽에 배치하고, 북쪽 넓은 구릉에는 비원이라고도 불리는 후원을 조성하였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건물을 세운 까닭에 궁궐 건축의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특색을 지녔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조선 전기의 약 200년 동안 왕의 통치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소실된 도성 내 궁궐 중 가장 먼저 중건되며 이후 약 250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 역할을 했다. 건축사에 있어 조선 시대 궁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후원의 조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역사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재위 1400∼1418)은 그의 아버지 태조의 뜻에 따라 1405년에 한양을 수도로 정했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궁궐 건축을 관장하는 직책이 만들어졌고, 건축 공사는 전통적 개념의 원칙, 특히 전조후시(前朝後市:궁궐이 앞에, 저잣거리는 뒤에)와 삼문삼조(三門三朝:문 3개, 궁궐 3개)의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또한 삼조제도(三朝制度), 즉 앞쪽에 신하들의 공간인 외조(外朝), 중앙에 임금이 정무를 보는 치조(治朝), 뒤에 왕의 처소와 왕비의 처소인 연조(燕朝)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랐다.

궁궐은 주요 건축물과 비원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정원은 잔디, 나무와 꽃, 연못으로 꾸몄으며, 숲이 우거진 후면 가까이에 정자를 세웠다. 주요 건물(어좌가 있는 방, 국사를 돌보는 방, 왕족의 생활공간)은 1405년에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좁다고 생각해, 이후 7년 동안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추가한다. 1462년에는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양에 있는 중요한 건물들과 함께 궁궐도 불태워졌다.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후 창덕궁은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왕 선조는 1607년에 궁궐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1610년, 선조의 왕위를 이은 광해군 때 공사가 끝났다.

궁궐은 다시 통치의 중심지이자 왕실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청의 침략에 의한 병자호란(1636), 프랑스 함선이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1866), 미국 군대에 의한 신미양요(1871)에 걸쳐 주로 화재를 입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258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재건축할 때마다 원래의 설계를 충실히 따랐다. 수세기 동안 궁 전체에 걸쳐 몇몇 건축물이 추가되었다. 1828년 순조는 전아(典雅)한 스타일의 건물을 짓게 했고, 1846년 헌종은 궁궐 외딴 곳에 낙선재라는 이름의 왕실 거처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추가된 건물은 1921년에 세운 선원전(璿源殿)인데,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곳이다. 처음에는 인정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궐의 북서쪽 방향에 있는 덜 중요한 장소로 이전되었다.

건축물

돈화문

돈화문은 태종 12년(1412)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 40년(1607)이 되어서야 중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76년 돈화문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서 밝혀졌다. 이때 세워진 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보물 제383호이다.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 규모가 큰 정면 5칸 측면 2칸에 2층 구조인데, 중앙에 4개의 고주와 앞뒤와 옆면에 14개의 평주(平柱)를 세워 그것을 받치고 있다.

지붕의 형식은 우진각이며, 공포는 외2출목, 내3삼출목의 다포계 건물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세 개의 홍예문을 놓은 석축 위에 2층의 문루를 세운 것과는 퍽 다른 구조이다. 특이한 점은 정면 5칸 가운데 좌우로 한 칸씩이 벽으로 마감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분히 중국을 의식한 구조로, 중국의 황제가 아닌 제후국의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한다는 지난날 동아시아에 통용되던 원칙을 수용한 결과라 설명되고 있다. 이렇게 막혀 있는 좌우 협칸의 안쪽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고 2층 입구에는 판문을 달았으며, 안쪽 기둥 없이 탁 트인 공간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건립 당시에는 이곳에 큰 종과 북을 걸어놓고 시각을 알려주거나 비상시에 위급을 전했다고 한다.

본디 평상시에 궁궐의 정문을 이용하는 것은 임금이나 외국 사신들이었는데, 돈화문 역시 임금의 전용문인 가운데 어칸을 좌우보다 조금 넓게 하여 위계를 두고 있다. 신료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들던 문은 동쪽의 단봉문(丹鳳門)이었다고 한다.

돈화문 양쪽으로는 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근무하는 수문장청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으로 변해 있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수문장청의 위치와 모양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는데, 특이하게 돈화문의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이 모두 우진각지붕인 점을 감안하면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동궐도〉를 통해 문 앞으로 월대와 기단이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남쪽으로 넓은 월대를 만들고 그 위에 두 벌의 기단을 쌓아 문을 세웠는데, 이 월대가 한동안 사라지게 된 적이 있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순종과 총독부 고관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출입의 편리를 위해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땅에 묻힌 채 90여 년이 흐르다가 1997년에 이르러 월대를 되살리는 공사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아주지 못하고 지금과 같이 도로면보다 낮게 노출된 채 어색하게 복원되었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이 반듯하고 아담하여 여성적 아름다움으로 비유되고 있다면, 정면 5칸의 큰 규모와 단순한 구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돈화문은 중후한 남성적 품격이 느껴지는 문이다.

금천교

돈화문을 들어서서 북쪽으로 조금 오르면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명당수 금천(禁川)이 있고 그 위에 금천교(錦川橋)가 놓였다. 눈썰미가 있는 이들이라면 금천교가 진입로에서 직각으로 꺾이면서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놓여 있으며, 그 앉음새가 여느 궁궐과는 차이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나 시설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는 중심축 위에 세워진 것과는 달리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모습이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지형을 인위적으로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적절히 활용한 궁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인 셈이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중건된 6년 뒤인 1411년(태종 11)에 세워졌으니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물로서 6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묵직하게 쌓여 있는 다리이다. 다리는 튼실하게 틀어올린 두 개의 홍예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으며, 홍예와 홍예 사이의 역삼각을 이루는 공간에는 온갖 삿된 것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소망을 담은 귀면을 선명하게 양각해놓았다. 귀면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동감이 은은하다. 귀면 앞 남과 북에는 각각 거북과 해태를 닮은 동물이 앉아 있다. 이 또한 어구(御溝)를 지키는 상징적 동물로 벽사의 기능을 담당하는 동시에 다리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돕고 있다.

다리 위는 세 구획으로 나누어 장대석으로 삼도를 깔았는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대적으로 넓다. 다리 좌우의 돌난간 네 귀퉁이에도 제각기 다른 시선과 표정을 지닌 동물을 앉혀 장식하였다. 역시 벽사 기능을 하는 이들 석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선과 몸짓이 모두 다른데다가 표정 또한 근엄하거나 표독스럽지 않고 도리어 성근 미소가 정겹고 귀엽다. 안타깝게도 금천교 밑으로는 이제 물이 흐르지 않는다.





인정전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의 월대 위에 서 있는 인정전(仁政殿)이 보인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세워졌으나 몇 차례 화재가 일어나 다시 지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년(180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1908년 무렵에 내부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1418년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인정전의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라 하여 평평한 돌에 도드라지게 문양을 새겨 장식을 하였다. 답도에는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서 있으며 봉황이 조각되어 천상의 세계로 묘사되는데, 이는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암시한다.

인정전 내부의 바닥은 원래 진흙으로 구운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는 쪽마루가 깔려있다.이는 인정전에 설치된 전기, 커튼, 유리창문 등과 더불어 구한말에 들어온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인정전 지붕 용마루에는 구한말부터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으로 쓰였던 오얏꽃 문양 다섯 개가 금동으로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데, 원래는 없던 것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정전 서쪽 행랑에는 향실(香室)과 내삼청(內三廳)이 있다.향실은 궁중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던 곳이다.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 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 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이다.내삼청은 금군삼청(禁軍三廳)이라고도 하며,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삼청을 이른다. 북행랑에는 과거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관광청(觀光廳)이 있었다. 이 곳에 관광청이 있는 것은 인정전 마당이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마당에서는 주로 문과의 전시(殿試)가 거행되었고, 무과의 전시는 후원에 있는 춘당대에서 시행되었다. 동행랑에는 악기고(樂器庫), 육선루(六仙樓), 서방색(書房色)이 있으나, 모두 동족을 향하고 있어 인정전 마당을 등지고 있다.

인정전과 인정전 마당(조정)은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외국 사신의 접견, 신하들의 조하(朝賀), 세자 책봉식, 왕실의 큰 잔치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인정전 마당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차일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마당에 미리 쇠고리를 묻어 두어 여기에 줄을 묶어 쉽게 차일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차일은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주로 인정전 월대 위에 설치하여 의례의 주관자인 임금과 왕실 가족이 햇볕과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또 차일 밖의 공간과 구별하여 행사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다.

인정문을 통해 들어온 어도는 인정전 마당에서 삼도[주 5] 로 바뀌어 월대로 이어지며, 마당 나머지 부분은 모두 자연석으로 된 박석(薄石)을 깔았다. 삼도 옆으로는 정조가 재위 1년(1777년)에 세운 품계석(品階石)이 두 줄로 세워져 있어 문신과 무신을 구분하며, 이 곳이 위계와 권위를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인정전 마당의 박석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어 잔디밭이 되었다가, 최근에 화강암을 가공한 박석을 깔아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인정전의 마당을 이루는 건물 중 인정전과 인정문만 원래 있던 것으로, 1910년대에 일제가 주위 행랑과 함께 일본식을 가미하여 변형한 것을 1988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보존 및 관리체계

창덕궁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궁궐 전 영역과 주요 건물 및 식재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종로구 조례에 의거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따라서 해당 구역 내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이외에도 창덕궁 후원은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창덕궁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창덕궁의 건물 및 시설물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40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창덕궁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있으며 3, 4년 주기로 전문가들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도시교통과, 문화재과가 협력하여 창덕궁 주변 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기적으로 기본 경관 계획,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안 및 사업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창덕궁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창덕궁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진행한다. 창덕궁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의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궁 및 종묘 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등재기준

기준 (ⅱ) : 창덕궁은 유교 예제에 입각한 궁궐 건축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건물의 배치나 진입 방식에서는 우리나라 궁궐 건축의 다양한 특성을 보여 준다.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은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정문의 진입로에서 직각으로 두 차례 방향을 틀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지형지세에 따라 조성된 이러한 진입로의 배치는 남북 방향의 일직선 중심축을 따르는 경복궁이나 중국의 궁궐과는 차이가 있다. 건물과 주변 환경이 잘 조화된 창덕궁의 궁궐 배치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궁궐 건축양식의 상호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 궁궐 건축의 창의성을 보여 준다.

기준 (ⅲ) : 창덕궁은 전통 풍수지리 사상과 조선왕조가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유교가 적절히 조화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전통 풍수에 입각하여 선정된 입지와 유교 이념에 따라 상징적, 기능적으로 배치된 창덕궁의 건물들은 조선 시대 고유의 독특한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 준다.

기준 (ⅳ) : 창덕궁은 원래의 자연 지형을 존중하기 위해 궁궐 건축의 전통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 변형을 가해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자연적인 산세와 지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정형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건물을 배치해 건축과 조경을 하나의 환경적 전체로 통일시킨 훌륭한 사례이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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