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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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전경의 모습

소개

성북동은 성(城)의 북(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한양도성이니, 성북동은 한양도성이 만들어진 이후에 붙은 이름이다.

성북동은 아늑한 마을이었다. 백두대간은 힘차게 달려 내려와 그 일부가 한양의 백악산까지 이른다. 백악산에 이르기 직전 작은 두 봉우리 -구준봉과 응봉-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마을이 또한 성북동이다. 그 산자락 사이로 흐르던 것이 성북천이었으니, 성북동은 한양과 가깝고, 물이 흐르고, 산이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성북동에 사람을 살게 한 것은 교통과 자연환경이었다. 도성의 바로 밖이라는 교통의 편리함, 산과 물이 어우러진 훌륭한 자연환경은 도성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조선후기의 어느 봄이나 성북동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성북동도 근대의 바람을 탔다. 사대문 밖에서 가장 교통이 편리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성북동에는 비교적 중산층으로 불릴만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곧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일제강점 하의 어려운 시절에도 스스로 학교를 지어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 당국을 상대로 상수도 부설, 버스시간 연장 등의 청원운동을 벌여 더 나은 삶의 공간을 만들고자 힘썼다.

여러 모로 살기 좋은 마을이니 문화예술인들도 모여들었다. 1930년대 초반에 이미 문인촌으로 불릴 만큼 많은 문인들이 성북동에 살았다. 카프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기진, 구인회의 중심인물인 이태준은 모두 한 동네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이기도 한 만해 한용운도 이곳 성북동의 주민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성북동에 지었다. 그리고 만해와 간송과 모두 인연이 있는 또 한명의 독립운동가이자, 수집가인 위창 오세창 역시 성북동에 살며 이들과 교류했다. 문인과 독립운동가만 이곳에 산 것은 아니었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인,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는 늙은 감나무가 열리는 마당이 있는 같은 집에서 연이어 살았다. 김환기는 성북동에 살던 또 다른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시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성북동의 마을 이름

'성북동' 동명의 유래

  1. 조선후기 영조 때 도성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성북둔(城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
  2. 단순하게는 '한양도성의 북쪽'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

행정구역의 변천

  1. 조선초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2. 조선후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
  3. 조선말기
    •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1895)
  4. 일제강점기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1911)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1914)
    • 경성부 성북정(1936)
    •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1943)
    •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1944)
  5. 8.15해방~현재
    • 서울특별자유시 동대문구 성북동(1946)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949)

성북동의 자연환경

북악산 줄기

  1. 북악산
    •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청와대 뒤편 주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성북동의 서~북~동쪽을 둘러싸고 있음
    • 서울의 주산으로 '북악'이란 이름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인 데서 유래했으며 공극산·면악·백악이라고도 함(높이 342m)
    • 2009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 67호 지정
  2. 구준봉
    • 성북동 북쪽에 솟아오른 산봉우리로, 북악산 정상과 보토현 사이에 있음
    • 개가 쭈그리고 앉은 모양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도읍터의 지형을 모두 갖추었다는 뜻으로 구진봉이라고도 함(높이 337m)
  3. 보토현
    • 구준봉 뒤쪽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있는 고개
    • 이곳이 서울 도읍터의 입수목이 되어 잘록하므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하여 해마다 륵을 보태고 떼를 입혔으므로 '보토고개' 또는 '보토현'이라고도 함
    • 『동국여지비고』권2에"보현동 곁가지 산줄기가 곧 도성의 주맥이므로 총융청에서 보토소를 설치하고 주관해서 부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4. 성북근린공원
    • 1940년부터 일제가 성북동과 돈암동 일대에 걸쳐 조성한 공원으로 1990년 8월 25일 시민근린공원으로 지정
    • 가까이에 북악산길과 성북구민회관·성북여성회관·한신아파트 등이 있고 정상부 서면 남쪽으로는 서울 시내 전체, 북동쪽으로는 정릉과 도봉산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음.
    • 주요 시설로 다목적광장·휴식광장·휴게소·테니스장·배드민턴장·다이나트랙·문화회관·전망휴게소·매점·음식점·관리사무소 등이 있음(면적 13만 7,759㎡)
  5. 북악산로
    • 1968년 '북악스카이웨이'라는 이름으로 개통. 종로구 부암로 257번지(창의문)에서 미아리고개를 거쳐 성북구 종암동 29-14번지(종암로)에 이르는 폭 10~15m,길이 7,150m의 2차선 도로
    • 1968년 1월 21일 북한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 이후 수도권 경비 강화와 산책로를 위해 개통된 것으로 동년 2월 21일에 착공하여 9월 28일에 완공
    • 1972년 11월 26일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에 '북악로'라 이름 붙임
  6. 북악하늘길(북악산 산책로)
    • 2007년 북악산 일원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성북구에서 걷기 편한 산책로를 조성, 2010년 2월 27일 개방. 40여 년간 사람들의 발길이 닫지 않아 생태적 가치가 높고 자연경관이 우수해 일명 '서울 속의 비무장지대(DMZ)'라고도 불릴 정도로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음
    • 산책 코스
      1. 북악하늘길 1산책로 : 북악팔각정~말바위쉼터(1.40km)
      2. 북악하늘길 2산책로 : 하늘교~성북천발원지(1.95km)
      3. 북악하늘길 3산책로 : 북카페~숲속다리(0.64km)

성북천 주변

  1. 성북천
    • 성북구 북악 줄기 구준봉 기슭에서 발원하여 청계천과 합류하여 중랑천으로 흐르는 하천. 지방 2급 하천(길이 5.11km)
    • 하류지역은 잘 정비되어 잇고 상류 지역은 복개되어 있으나 점차 자연하천으로 복원되고 있음. 안암동을 거쳐 흘러가므로 안암천·안감내·안암내라고도 함
  2. 성북천의 복개와 복원
    • 1968년 : 삼선교~성북경찰서 뒤편 총 1,300m를 민간자본 3억원을 투입하여 복개하고 주상복합아파트(삼선상가, 성북상가)건립
    • 1978년 : 삼선교 상류 180m 복개공사 완공. 주차장으로 활용
    • 1993년 : 청계천 합류지역에서부터 보문동 1가 성암교회까지의 구간을 제외한 상류지역이 모두 복개되어 도로와 주차장으로 활용
    • 2002년 : 성북천 복원·정비공사 착공
    • 2010년 : 성북천 복원·정비공사 완공(한성대입구역~대광초등학교 2.5km) ※주상복합상가 7개동 철거
    • 2011년 : 대광고~청계천 합류부 1km구간 복원 공사 완료(동대문구)
    • 2016년 : 성북동 성북아파트~한성대입구역 구간(약 2km)만 복개된 채로 남아 있음
  3. 성북천의 교량
    • 쌍다리(雙一) : 덕수교회와 하나은행 성북동지점 사이 성북천을 가로질러 놓여져 있던 두 다리를 합쳐 부르던 말로 상류쪽은 목교, 하류쪽은 석교였음. 1980년대 성북천 복개로 철거되었으나 현재 이곳의 버스정류장 이름은 '성북구립미술관·쌍다리앞'으로 되어 있으며 '쌍다리 기사식당'이 남아 영업 중
    • 청운교(淸雲橋) : 북청동(北淸洞)과 운수동(雲水洞) 사이에 놓인 다리이므로 북청동의 '청(淸)'자와 운수동의 '운(雲)'자를 따서 이름 지음. 달리 마전터에 놓은 다리라 하여 마전다리라고도 함.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 현 성북초등학교 앞 마전터 인근에 있던 것으로 추정
    • 운수교(雲水橋) : 성북동 60번지 부근에 놓였던 다리로, 운수동(雲水洞) 앞에 놓인 다리라 하여 운수교라고 하였음.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는데, 복개공사로 인해 없어짐. 1970년 이 다리를 기준으로 하류 쪽을 성북 제1동, 상류 쪽을 성북 제2동으로 구분하여 관할
    • 삼선교(三仙橋)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위 성북천을 가로 질러 놓였던 다리. 혜화문과 돈암동을 이어주는 간선 도로가 다리를 지나갔으며 삼선평에서 이름을 따옴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성북동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 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 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 여류문인 김일엽,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 홍효민, 단편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이태준,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 등이 있었다.

조선인 부호들의 별장

성북동에는 부자들의 별장이 많이 있었다. 1935년 6월에 발행된 『삼천리』7권 5호에는 성북동에 부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다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서울 근방에는 부호들의 별장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눈에 띄는 곳은 죽첨정 3정목의 고태, 장충단 너머 학구 일대, 용산 너머 명수태 일대가 십만장자, 백만장자의 별장지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인 부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경치가 좋은 성북동 일대였다.

경성부 안팎 부호들의 별장

  1. 조선시대 서울 근교의 별장(별서정원) 대부분이 양반 세도가나 고위 관료들의 소유였다고 한다면 일제강점기에는 지주나 대금업자 등 새로운 시대 환경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서울의 신흥 부호들이 근교의 별장들을 소유
  2. 종래의 조선식 기와집뿐 아니라, 양식, 일본식, 절충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지은 별장 등장
  3. 서울 근방 부호들의 별장지대
    • 죽첨정(竹添町) 3정목(현 서대문구 충정로3가)의 고태(高台)
    • 장충단(奬忠壇) 너머 학구(鶴丘) 일대
    • 용산 너머 명수태(明水台) 일대
    • 성북동 일대

성북동, 조선인 부호들의 별장 지대

1935년, 성북동 내 개인 별장 14개소 확인

  1. 백인기의 별장
  2. 백상규의 2층 양옥 별장
  3. 한양호의 신식 별장
  4. 간송 전형필의 별장
  5. 대금없자 임종상의 별장
  6. 지주 이종석의 별장
  7. 기타 성북동의 별장
    • 황금정에서 약종상하는 이유선의 별장
    • 해동은행 김계수의 별장 : 이강공 별저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다고 알려짐
    • 서울 부자 김동규의 별장
    • 의친왕 이강의 별저 : 순조선식 늙은 건물(현 성락원)


성북동의 명소들

  1. 서울 선잠단지
  2. 성락원
  3. 이종석 별장
  4. 심우장
  5. 수연산방
  6. 간송미술관
  7. 최순우 옛집
  8. 한국가구박물관
  9. 성북구립미술관
  10. 우리옛돌박물관
  11. 서울 성북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구 본원
  12. 정법사
  13. 길상사

성북동 소개 영상

  • 한국기행 - 서울역사기행 4부 성북동 사람들#001

  • it place#13 성북동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성북동 문인촌 A는 B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성북동 성북구 A는 B에 포함된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 B는 A의 유명한 유적지 중 한곳이다.

참고 문헌

  • 성북구청·성북문화원,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성북구청·성북문화원, 2016.
  • 성북문화원, 『성북동-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성북문화원, 2015.
  • 「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5권 10호, 193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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