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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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1936년 4월 6일 ~)

생애

충청북도 충주 출생이며 본관은 아주이다.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1943년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 때 당숙과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에서 이때 본 풍경을 공책 한 귀퉁이에 글로 남기는데, 이것이 선생의 눈에 띄면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생한다. 피난살이를 하던 그의 가족은 9·28수복 뒤 곧바로 집을 찾았다가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인민군을 피해 그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 근처의 산 속에 숨어 며칠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광산에 숨어살던 광부 셋을 헌병이 총으로 쏴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뒤 신경림은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면 광산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이 결심으로 나온 시가 바로 〈폐광〉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신경림은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한 절씩 남한강가를 배회하는가 하면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등 문제 학생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어교사이던 유촌 선생은 처벌 대신 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는데, 이 과제물을 매개로 신경림은 유종호와 처음 만나게 된다. 유촌 선생의 아들이며 고등학교 선배인 유종호가 신경림이 낸 시를 읽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나중까지 이어져 문단에서 유종호는 시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쉽지 않은 서울 생활을 한다. 1956년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오게 된다. 이즈음 그는 금서를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는 일을 겪는다. 그는 이 일로 인한 충격과, 평소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이 겹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신경림은 평창·영월·문경·춘천 등지를 떠돌며 광부·농부·장사꾼·인부·강사 등으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점점 멀어지면서 사회·과학 서적은 더러 봐도 문학 서적은 읽지 않으며, 소중히 간직해온 시집과 문학잡지마저 몽땅 버리기도 했다.
서른 즈음, 신경림은 결혼할 무렵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시 쓰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한다. 1970년 신경림은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이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고,제1회 ‘만해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농무》로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1970년대에 신경림은 거듭된 불운과 궁핍으로 몹시 가파르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어려운 시절을 군말 없이 함께 견딘 아내가 첫 시집이 나오는 것을 못 보고 눈을 감으며, 4년 뒤에는 어머니가, 또 한 해가 못 되어 병중에 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의 고단했던 삶이 나타난 시는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이다. 그는 김관식의 집에서 나와 안양으로 내려가 조태일과 어울리며 기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교육평론》의 편집부원으로 잠시 몸을 담기도 하나 이마저 기관의 압력으로 인해 그만두었다.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길음동에 집을 구해 삶의 근거를 서울에 마련하지만 궁핍한 생활은 지속되었다.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났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여럿이 함께 하며 문화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1985년 그는 통일을 노래한 본격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고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냈다.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경림은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출처 이용약관

작품세계

신경림의 등단 작품인 「갈대」, 「묘비」 등은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주된 분위기로 하고 있다. 첫 시집인 『농무』 이후 신경림의 시는 농민의 삶의 현장을 그린 시로 일관되어 있지만, 등단 초기의 서정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의 시는 여타의 노동시에 비해 강력한 울분이나 격렬한 항의, 개혁의 의지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경림 시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중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새재』 이후에 쓰여진 『민요기행』, 『남한강』, 『길』 등의 시집은 우리 것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민요와 지리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장시집인 『남한강』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출처 CC-BY-SA

작품 및 저서

시집

기타 시집

동시집

산문집

  • 《바람의 풍경》(문이당, 2000년)
  • 《민요기행 1,2》
  • 《강따라 아리랑 찾아》
  • 《시인을 찾아서》

평론집

  • 《민중(民衆)과 문학(文學)》

출처 CC-BY-SL

관련 논문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