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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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申采浩)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생애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변영만·이장식·유인식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 강사로서 신규식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서호문답」·「영웅과 세계」·「학생계의 특색」·「한국자치제의 약사」·「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독사신론」·「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최도통전」·「동국고대선교고」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월보』·『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이 발행하던, 『소년』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이동녕·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이갑·이승훈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채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안창호·최광옥·최남선·박중화·장응진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와 안동현을 거쳐 산둥반도의 칭다오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해조신문』의 후신 『대동공보』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에서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을 거쳐 상해로 가서, 동제사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박은식·정인보·조소앙등과 박달학원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에 가서 동창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신채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에서는 평정관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정한경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김원봉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채호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채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이대교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신채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신채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신채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에 「국사사론」을 연재했으며, 최영·이순신·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신채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연보

연도 내용
신채호의 생애 연표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출생
1887년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으로 이사, 마을 서당 훈장인 할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배움
1888년 《통감》을 해독하고 10세에 행시를 지음
1893년 사서삼경 독파, 시문에 뛰어남
1895년 풍양 조씨와 결혼
1897년 할아버지의 소개로 천안에 있는 학자이자 구한말 학부대신 신기선의 집에서 신·구 서적을 섭렵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1905년 성균관의 박사가 됨
1907년 신민회 가입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 발표
1910년 칭다오로 망명했다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감, 망명 중 이광수와 만남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가서 박은식, 조소앙과 박달학원을 설립
1915년 조선사 집필 시작
1916년 소설 '꿈하늘'집필
1919년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상하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으나 이승만의 미국 위임통치 노선에 반대하여 북경으로 다시 돌아옴, 이후 군사통일주비회의 소집을 위하여 노력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 조선혁명선언을 기초 및 작성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되어 타이완의 기륭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투옥, 죄수번호411
1930년 5월 대련 법정에서 유가증권위조 및 동행사,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 받음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옥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
2009년 3월 1일 왜놈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스스로 무국적자가 된 지 97년 만에 가족등록부에 이름이 올라감으로써 국적을 회복

경력사항

  1. 1905년 - 성균관 박사, 황성신문 논설기자
  2. 1906년 -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
  3. 1907년 - 신민회 창립위원, 권업신문 주필
  4. 1913년 - 동제사, 박달학원
  5. 1919년 - 대한독립청년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충청도 위원
  6. 1926년 -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수상내역

  1. 1962년 - 건국훈장 대통령장

사상 및 신념

신채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신채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 등 주저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난다.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채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신채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다.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삼국시대백제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했다.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역사관

  • '아와' '비아'의 투쟁

신채호는 역사를 ‘아’의 활동에 관한 기록으로 보았다. 그는 역사는 ‘정신적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고 했다. 이 부분이 원문에서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에게 역사는 일기와 같은 것이었다. 아의 주체적 관점에서 아와 관련된 것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고 본 것이다.

그는 역사의 특징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들었다.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행위에서 역사적 행위를 추출한 것이다. 이것은 신채호가 역사의 3대 요소로 인간·시간·공간을 설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란 부분에 해당하는 원문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다. 신채호가 사용한 ‘발전’이나 ‘확대’란 표현은 전개나 펼쳐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점은 제1편 제2장 역사의 3대 요소와 조선 고대사의 문제점에서 드러난다.

역사는 아의 주체적 관점에서 기록하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신채호의 역사학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아’다. 그런데 이 ‘아’는 개인적 차원의 ‘아’가 아니다. 신채호는 인류의 행위 중에서도 사회적 행위만이 역사적인 행위라고 했다. 이것은 신채호의 ‘아’가 소승적인 ‘아’가 아닌, 대승적인 ‘아’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아’는 실제로는 ‘우리’다. 이 대승적인 ‘아’는 단순히 국가나 민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무산계급이나 유산계급도 ‘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학술·기술·직업·의견표명을 포함한 제반 분야에서 ‘아’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싹틀 수 있는 곳에서 ‘아’가 형성될 수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신채호의 ‘아’가 점층적 단계로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의 ‘아’는 작은 ‘아’에서 더 큰 ‘아’로 확장될 수 있다. 일개인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족-사회-국가-민족-인류의 범위로 확장될 수 있는 ‘아’인 것이다.

계급·국가·민족을 ‘아’로 설정할 경우, ‘아’는 다른 계급·국가·민족에 대해 위험한 배타성을 띠지 않을까? 신채호의 ‘아’는 그처럼 위험한 ‘아’가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을 ‘아’라고 했다. 이 말은 ‘아’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입장에 그칠 뿐 객관적 입장이 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 그는 “아 속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속에도 아와 비아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아’의 상대성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는 ‘아의 아’와 ‘비아의 아’의 공존 가능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의 ‘아’는 ‘비아의 아’에 대해 평화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아’가 평화적인 ‘아’라면, 그가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라며 투쟁을 운운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의 투쟁이 넓은 의미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라고 선언하기 전에, 그는 “아에 대한 비아의 접근이 빈번해질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도 더욱 더 맹렬해지니, 인류 사회의 활동은 쉴 틈이 없고 역사의 전진은 완결될 날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접근·분투 같은 다양한 양상이 아와 비아의 관계에 나타날 수 있다고 인식했다. 이것은 그가 말한 투쟁이 물리적인 충돌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포괄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아와 비아의 접근 및 분투를 ‘인류 사회의 활동’이란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그가 말한 투쟁이 넓은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채호는 ‘아’의 속성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제시했다. 원문에서는 이것을 ‘시간적 상속성’과 ‘공간적 보편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신채호가 방점을 찍은 부분은 시간과 공간이란 부분이다. 문맥을 분석하면, 시간성과 공간성은 ‘아’의 속성이 아니라 ‘아의 행위’ 즉 역사적 행위의 속성이다.

시간성과 공간성으로 역사적 행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모든 역사적 행위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 신채호의 생각이다. 시간성 및 공간성의 파급력에 따라 역사적 가치가 결정된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김석문지동설은 조선 내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데 비해, 지오다노 부르노지동설유럽의 탐험 열기를 달구고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진출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의 지동설은 똑같은 이론이지만 공간적 파급력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역사적 가치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아’의 성립 및 승리 조건도 설명했다. ‘아’는 ‘아’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고 했다.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기는 것이지만,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의 성립 조건에 관한 말이다. 또 그는 ‘아’를 올바로 정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아’와의 관계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아’의 승리 조건에 관한 말이다. 두 가지 조건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아무리 열심히 투쟁해도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채호의 말이다.

독립운동관

신채호는 각각 독립운동, 계몽운동에 대한 평을 남겼다.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운 궁궐 내의 일시적 활극이며, 의병운동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과 운동이며, 민중적 각성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안중근 열사의 폭력적 행동은 열렬했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다며 비판하였다. '3.1 운동은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갖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평가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신채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작품 및 저서

신채호가 수감중에 있을 때, 홍명희는 1924년 ~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1930년 6월에 ‘조선사연구초’를 출간하였고, 조선일보에서《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를 1931년 6월부터 103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또한 조선상고문화사도 이어서 연재하였다. 그는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대표작

조선사.jpg

용과 용의 대격전.jpg

저서

  1. 《조선사론(朝鮮史論)》
  2. 《조선사연구초》
  3. 《조선상고사》
  4. 《조선상고문화사》
  5.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서
  6.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7. <<독사신론>> 1908년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대한매일신보 연제

전기

  1. 《이순신전》이순신장군 영웅전기
  2. 《을지문덕전》을지문덕장군 영웅전기
  3. 《최도통전》최영장군 영웅전기

소설

  1. 《꿈하늘》
  2. 《용과 용의 대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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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F 및 온톨로지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채호 독립운동가 A는 B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B는 A의 저서이다.
신채호 신민회 A는 B에 가입했다.
신채호 한국 근대사학 A는 B를 확립했다.
신채호 이광수 A는 B와 비교대상이다.

신채호 온톨로지.png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