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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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양반의 본래 의미는 문반과 무반을 아우른 현직 관료들을 총칭한다. 사회적 계층의 측면에 따르면 양반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명확한 기준에 의해 확정된 계층이다. 그리고, 양반은 국가가 인정해주는 계층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재경양반과 재지양반

거주 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양반은 재경양반과 재지양반으로 나뉜다. 양반층은 무신정권과 조선왕조의 건국, 조선전기의 정변을 통해 향리층과 일반층으로 분화된다. 15세기에 들어서는 균분상속에 의해 처가 근처로 이주를 가는 양반이 많아지면서 17세기에 재지양반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재지양반들은 주로 강의 중상류지역과 배산임수 지형에서 거주하며 농사가 편리하고 땔감과 담수 조달에 유리하고 여러 지형적 조건들이 주는 장점 속에서 살았다. 한편, 교통이 불편하고 관청과 멀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 이 점을 노비와 신공을 통해 해결했다. 양반은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었는데,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4가지 자격이 요구되었다. 첫 번째로는 과거시험이 있다. 양반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당대 저명한 학자의 후손이어야 했다. 두 번째는 양반가문의 동족들이 모여 형성된 지역에 거주해야 했다. 세 번째는 제사를 받들고, 12달 동안 끊이지 않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봉제사와 접빈객을 행해야 하며, 일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는 학문수양을 통해 자신이 양반임을 증명하고 또 인정받아야 했다. 네 번째로는 양반은 같은 양반끼리 혼인하여 양반가문을 이어나갔다.

양반들의 생활

조선 전기

조선 전기 양반들의 생활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양반은 여러 잡일들을 담당하는 노비를 소유해야 했다. 노비의 소유는 양반다운 생활의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에 일천즉천과 같은 악법으로 노비의 수를 급증시켰다. 두 번째는 토지이다. 양반은 노비를 이용하기도 하며 가작과 작개, 병작과 같은 방법으로 경영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확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토지의 중층적 소유를 흔히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임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더욱 노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선물경제이다. 양반들끼리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주고받는 선물 경제가 발전하였다. 이 점으로 살펴보아 조선시대에는 시장의 발달이 미약했었음을 알 수 있다. 네 번째는 상행위이다. 산지와 소비지 별로 가격의 격차가 커서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윤을 늘려나가려 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시대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형태를 보였다. 그리고, 양반들은 향촌 사회에서 본보기의 역할을 다했다. 양반은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독해 풍속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향안을 통해 본인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고, 성리학적 윤리 의식으로 이루어진 향약을 통해 향촌자치를 통제하고 성리학적인 삶을 민중들에게 까지 강요하였다. 서원은 주자학적 수양을 몸에 익힌 재지양반층의 결집의 장이었으며, 선학 제사와 양반 자제 교육 기관을 담당하였다. 향교는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공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서원에 다니더라도 과거시험에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향교의 명부에 기재되어 있어야 했다. 또한 양반들은 학문수양 뿐만이 아니라 의학과 풍수학 등의 잡학도 익혀 마을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쌓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조선 후기

앞선 조선전기와는 다르게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회에서는 사뭇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상속제도는 남녀균분상속에서 남자균분상속, 장남우대상속으로 변화의 양상을 보여 서류부가혼과 윤회봉사의 전통이 소멸되었다. 족보도 마찬가지로 전기에는 남녀의 구분 없이 연령순으로 기재하였으나 후기에는 ‘선남후녀’ 방식으로 여계의 자손은 사위나 외손까지만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점차 남성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 전기는 족보가 형성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단정 짓기에는 섣부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는 족보를 효율적으로 적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기도 했다. 16,17세기에 동족 집단의 하위 조직으로 문중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가부장의 권위와 여성차별은 근대 이후로 심화되는 것을 바깥사람과 안사람으로 구분한 내외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양반지향사회와 전통

조선 후기에는 문중집단이던 향리들이 가문의 족보에 입록이 되고자 양반을 지향한 향손유업자들의 수가 점차 증가되었다. 향손유업자는 향리자손이면서 유학을 업으로 따르는 자로, 향리들이 지향한 양반적인 가치관과 생활관은 후에 하위 계층에까지 침투되어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왜곡되어 전승되어 나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양반을 따라 하기 위해서는 높은 신분에 걸맞게 정신적 의무를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정신을 따라야한다.

작성자 및 기여자

참고 문헌

  • 한성대학교 글로컬역사트랙 <2017 글로컬역사문화의 이해> 강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