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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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1864~1953)은 정치, 독립운동, 예술, 언론 등등 많은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활동

정치/언론

대한제국

1879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1886년(고종 23년)에는 박문국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軍國機務處郎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國通信局長)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도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어 매일신보(每日申報)의 명예사장과 서울신문 명예사장으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의 환국 때 김포공항을 방문하여 영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되자 회장에 추대되었고, 전국애국단체총연협회 회장으로도 위촉되었다.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독립운동

3.1운동

미국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손병희, 최린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1919년 2월 27일 오세창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과 함께 경성부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최종 확인하고 찬동, 민족대표자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이어 그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용지 보급과 인쇄 등을 지원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오세창은 경성부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 요리집에 손병희, 최남선 등 민족대표자들과 함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 함께 서고,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외쳤다. 바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예술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오세창체 또는 위창체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오세창 권동진 A와 B는 친구다.
오세창 임규, 정인보, 한용운 A는 B와 미륵암에서 놀았다.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홍성훈 기여자 김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