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소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빅토리아 시대 가장 성공한 극작가로 뽑히는 인물이다. 걸출한 글솜씨에 183cm에 달하는 기럭지, 나쁘지 않은 외모를 가진 일명 엄친아였으며 자신감에 찬 문학인 이미지의 전형 같은 인물. 그래서인지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평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 유미주의를 지향했으며 작품들의 성향도 그러하다. 영화로도 제작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살로메> 등이 그러하며 그가 창작한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외에도 시, 희곡도 썼다. 형식과 구조를 중요시하며 특유의 위트있고 날카롭게 비꼬는 언어유희와 비유, 그리고 모순과 쾌락으로 점철된 인생 자체가 그의 매력이다.

생애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부유한 안과의사, 어머니는 성공한 작가이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는 의사이자 학자이자 작가로서 여왕의 주치의로 임명받기도 했고 센서스 작성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을 정도로 성공한 인물이었는데, 동료 의사의 딸이자 오랜 동안 자기 환자였던 메리 트래버스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장을 제기한 것은 메리 트래버스 본인이었는데, "윌리엄 와일드가 강간범이며 여자 환자들을 마취시키고 성폭행을 했다"는 내용의 팜플렛을 작성해서 돌렸다.

이로 인해 가만히 있지 않은 것은 시인이었던 아내 제인 와일드였다. 제인은 메리 트래버스의 아버지에게 "딸의 행실을 단속하라"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돈을 뜯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하여 더블린의 명사인 와일드 부부와 트래버스 사이에 (허위사실을 적은 문서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이 벌어졌다. 트래버스 측이 와일드 부부를 제소한 것이었다. 트래버스는 이 소송에서 승리했으나 매우 약소한 수준의 상징적 액수를 배상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막대한 액수의 소송비용은 와일드 측에서 지급하도록 명을 받았다. 윌리엄 와일드는 이 소송의 공동 피고였고 증인이었으나 증인 출석을 거부했는데, "매우 신사적이지 않은 행위"라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9살 때까지 가정 교육만 받았고 1864년 포토라 왕립학교에 진학, 1871년에 졸업했다. 이후 1874년까지는 더블린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평소 성격이 아주 게으른 것으로 유명했지만, 반면에 고전학 성적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 후 오스카는 1874년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해 고대 언어를 배웠고, 1878년 졸업했다.

작가의 길을 걷기 이전에 오스카 와일드는 미술평론가의 길을 걸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유미주의자로서의 미학 강연을 시작했다. 그의 모피 코트와 네로 스타일의 머리, 그리고 문학적인 달변은 도시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으며 상류층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미국 뉴욕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1881년 첫 시집을 내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는 데 성공했고, 1884년 콘스턴스 메리 로이드와 결혼해 두 아들을 뒀다. 1887년 소설가로 데뷔해 『캔터빌의 유령』과 『아서 새빌 경의 범죄』를 출판했다. 1890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썼고. 1891년 『살로메』를 쓰는 등 수많은 걸작을 발표했으며, 런던 사교계는 오스카를 모시는 것을 영예로 삼았다.


와일드와 더글라스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쥔 잘나가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퀸즈베리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오스카 와일드는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도 둘이 있었지만, 양성애자이기도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 라이어널 존슨의 소개로 퀸즈베리 후작의 막내아들인 앨프리드 더글러스(일명 보시(Bosie))를 만나게 된다.

잘 나가던 작가와 철없는 귀족 대학생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오스카에게 거리의 소년을 돈 주고 사는, 일종의 매춘을 소개하기도 했다. 다혈질에 경박한 더글러스는 둘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다녔고, 게다가 아버지인 9대 퀸즈베리 후작 존 숄토 더글라스와 사이가 안 좋았던 더글러스는, 와일드와의 연애를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수단쯤으로 여긴 듯 했다. 이즈음에 둘 사이에 다리를 놔준 라이어널 존슨은 둘에게 절교를 선언하면서, 자기 사촌인 더글러스의 영혼을 부숴버린 자라며 와일드를 모욕하는 시를 썼다.

둘의 관계는 평범한 연인 사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방적인 더글러스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히스테릭한 성격에 와일드는 천천히 지쳐갔다.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수시로 "호텔에 데려가 달라", "친구를 만날 돈이 필요하다", "하인을 고용해달라"는 식의 요청을 하며 와일드의 돈을 소비했다. 오스카가 더글러스로부터 옮은 독감에 시달릴 때, '당신은 그 동안 물론 내 돈으로 지내면서 마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그랜드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사실상 돈이 필요할 때만 내 방에 나타났지.' 라고 더글러스를 힐난한 바 있다. 후술할 그의 편지 '심연으로부터'에 따르면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3주에 한번 꼴로 이별하고 더글러스의 애원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일을 반복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끝내 와일드는 해외로 도피해 그와 연락을 단절하는 것으로 더글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어머니에게 더글러스를 다시는 마주치지 않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금방 무색해졌다. 때마침 더글러스가의 장남이 사고로 죽게 되고, 이에 연민을 느낀 와일드가 다시 더글러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들의 관계는 이어졌다. 물론 이후로도 더글러스의 속물 근성은 그대로였다.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아들과 아들 애인의 이러한 행각에 수치심을 느끼며 펄펄 뛰었고,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을 때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퀸즈베리 후작은 오스카 와일드를 수많은 소년들을 추행했다는 혐의로 고발했고 와일드 역시 명예훼손죄로 퀸즈베리 후작을 고소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특기인 화려한 달변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이끌어 나갔으나, 교차신문 등에서의 실수들로 인하여 와일드에게 불리한 상황들이 연출되었다. 일례로, 검사가 와일드에게 "더글러스의 어린 하인에게 키스한 적 있냐"고 묻자 와일드는 거들먹거리며 "그 소년은 너무나 못생겼기에 키스할 생각이 안 들었다"고 말했다. 검사가 이 답변을 듣고 왜 외모를 언급했는지 추궁하자 와일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결국 자신이 신중하게 발언하지 못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이후, 검사 측에서 "와일드와 성관계를 하였다는 남성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고 하자, 와일드와 그의 변호사들은 "퀸즈버리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여 고소를 취하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와일드가 퀸즈버리의 소송비용까지 모두 부담하게 되었고, 결국 와일드는 이로 인해 파산하게 된다. 참고로 퀸즈베리 후작은 1900년 1월, 와일드가 죽기 10달전에 55살로 죽었다.

여담으로 와일드가 죽고 나서 1902년에 알프레드는 결혼하는데, 아내인 올리브 쿠스탄스 (Olive Custance,1874~1944)또한 양성애자 시인이었다. 둘 사이에 여럿 아이들을 얻었으나 관계는 깨어져 별거 상태였으나 42년동안 이혼하지 않은 채로 올리브가 먼저 죽고, 1년 뒤에 알프레드도 만 74세로 죽었다.


수감 생활

위의 소송 직후 와일드는 동성애를 하였다는 죄로 기소당하게 되고(Regina v. Wilde), 이로 인해 아래에 기술된 형을 선고받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2년 동안 교도소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보낸 편지를 잡지사에 기고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절망속에 와일드는 형무소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귀를 다치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 콘스턴스에게 별거를 선언당하고 아들인 비비언과 시릴도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 와일드는 가정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며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나의 빛나는 보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정파탄은 와일드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때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은 것이 "옥중기", 혹은 "심연으로부터"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옥중기"와 "심연으로부터"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는 맥락이 같으나 차이가 있다. 와일드는 재산 관리인인 로버트 로스에게 부탁해 한장의 타이핑 사본을 남긴 후 원본 편지는 더글러스에게 전달해주길 요청했다. 하지만 로버트는 더글러스에게 사본편지를 전달했으며, 동시에 수취인이 더글러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모두 삭제해 '옥중기' 라는 제목을 붙이게된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출간되었으며, 편지의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판본이 '심연으로부터'다. 이 책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원망과 자책, 참회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기여자

이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