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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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선(1878~1950)

생애

오윤선 장로는 1878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한문사숙에서 수학하며 한학을 통달했으나, 때마침 평양에 서양문화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오윤선의 부모는 평양으로 이사했다. 평양 숭실학교가 설립되자 오윤선은 자연스럽게 이곳에 진학했고, 성경을 공부하며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근엄 절약한 생활은 물론 숭실 동문들이 다니는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며 연합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인정하여 산정현 교회는 1918년 공동의회에서 그를 집사로 선출하였으며, 그후 안수집사로 장립받았다. 1922년 공동의회에서 조만식, 김동원과 함께 장로로 피택을 받고 장립을 받았다.


활동내역

  • 1945년 해방과 함께 평양에서 조만식과 함께 애국단체인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치안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총역량의 일원화, 교통, 통신, 금융, 식량대책 강구를 위해 힘썼다.
  • 이후 그는 북한 동포들을 남겨두고 월남하지 못하고 조만식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그의 활동과 가족에의 영향

오윤선평양민족지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 밑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평양숭인상업학교를 세운 선구자이며, 토산물위탁업체인 경신상회를 경영하던 큰 기업인이었고, 안창호, 조만식 등과 민족운동을 한 지사였다. 따라서 그의 집은 독립투사들의 아지트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의 자녀들 중 막내아들인 극작가 오영진자전에세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집 사랑은 한일합병 이래 민족지도자들의 집합소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전감옥에서 출옥 이후 나의 서재인 2층에서 유하였고, 고당 조만식 선생은 10수년래 매일같이 사랑방에서 조선물산장려회, 관서체육회, 기독청년회, 조선일보, 숭실전문, 숭인상업학교 등 민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가친과 의론하였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유해문제, 순직자 주기철 목사 사건 등 모두가 집 사랑에서 발생하고 논의되었다. 이러한 일로 합병이래 가친 오윤선민족주의자의 거두로 낙인 찍혀 일제의 지리한 감시하에 있었다. 중일사변을 전후하여 종내 철저히 침묵을 지킨 고당 조만식 선생과 가친의 존재는 그들로서는 도산 선생 별세 이후 유일한 가시였다. 기독교도의 신사불참배운동도 닥전골 나의 집 사랑에서 산정현교회의 신자를 중심으로 봉화가 올라 드디어 전국적인 무저항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출처: 오영진, <하나의 증언>, 중앙문화사, p.10~11)

이처럼 그는 평양의 명망가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독립지사라는 이름으로 도산이라든가 고당 등과 같은 당대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들은 그의 아들, 극작가 오영진의 활동과 사상 및 그의 많은 희곡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영진 또한 오윤선을 따라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시대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시절에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들이 어떻게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가를 목도한 것이다. 오영진이 '우리의 민족문학전통사상을 지키는 길은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에는 오윤선민족지도자들의 영향이 있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오윤선 조선물산장려회 A는 B를 조직했다
오윤선 숭인상업학교 A는 B를 설립했다


참고문헌 및 출처

  • 오영진, <하나의 증언>, 중앙문화사, p.10~11
  • 한국극예술학회, <오영진>, 연극과 인간(2010), p.9~13, 37
  • "조만식", <두산백과> : 조만식
  • "조선물산장려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물산장려회
  • "건국준비위원회", <한국근현대사사전> : 건국준비위원회
  • 한국장로신문, 2010.3.20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