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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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수정은 1969년 09월 20일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 1동 620-21번지에 위치한 성바오로병원에서 1남 3여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현재 1남 1녀의 자녀를 둔 엄마이자 가정주부로써의 삶을 살고 있다.

  • 출생지: 서울 회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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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학교 졸업여부
홍파초등학교 졸업함
해성여자중학교 졸업함
송곡여자고등학교 졸업함
신구대학교 졸업함
서울여자대학교 평생교육 수료

우리 엄마의 인생 이야기

유년시절:할머니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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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엄마는 유년시절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증조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의 어린시절은 외할머니와의 추억보다 증조외할머니와의 추억이 더 많습니다. 저희 증조외할머니는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증조외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증조외할머니는 6명의 손녀와 손자 중에서 저희 엄마를 가장 예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외할머니가 힘들어하실 때, 증조외할머니가 엄마를 키우겠다고 말씀하시고 엄마를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엄마는 그렇게 증조외할머니와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 가족이자 울타리가 되어 줬습니다.

청소년시절:동생의 투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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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엄마에게는 총 3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엄마의 동생은 2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이모와 외삼촌은 두 분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저희 엄마와 외할머니는 둘째 이모의 이야기를 전혀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엄마는 후회되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딸이자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을 찾던 중, 둘째 이모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때 엄마가 둘째 이모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해주셨습니다. 저희 둘째 이모는 엄마가 대학생 때 돌아가셨는데, 초등학생 때 백혈병에 걸리셔서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엄마가 기억하는 이모는 미술을 잘하는 착한 동생이었습니다. 둘째 이모가 백혈병 판정을 받은 뒤, 엄마와 외할머니는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둘째 이모를 생각하면, 후회되고 미안한 마음이 가장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아마 엄마가 어린 시절 동생을 잘 챙겨주지 못했던 것이 가장 기억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가 둘째 이모를 기억하기 위해 간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인이었습니다. 제가 어렷을 때, 엄마의 사인을 보면서 따라 그리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웃으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따라 하는게 좋으신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엄마에게 이 사인이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저에게도 엄마의 사인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기억하고 계신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는 고2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사소한 오해로 다투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엄마는 이 사소한 오해로 인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신적이 있는데,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대학시절:엄마와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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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엄마는 1987년 신구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당시 엄마는 외할머니에 의해 원치 않는 학과에 가게 되셨습니다. 사실, 엄마는 평소 옷에 관심이 많아 의상학과를 가고 싶어 하셨으나, 외할머니께서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는 것이 더 취직이 잘 된다며 반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대학을 다닐 당시 공부에 흥미를 읽어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외할머니께서 후회하시는 일 중 하나라고 이야기 해주신적이 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당시 주위 사람들이 식품영양학과를 가서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된다고 이야기 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딸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신 겁니다. 이 일 이후로 엄마는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다짐하다셨는데, 그래서 저와 동생이 꿈을 이야기하거나 과를 선택할 때 저희의 의견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저희 엄마에게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여쭤보니 시위를 목격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저희 엄마가 대학생이던 당시 시위가 정치적인 것도 있고 학내적인 문제로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희 엄마는 평소와 같이 명동에 친구들과 쇼핑을 하러 놀러갔었는데, 그때 시위가 한창일 때라 지나가다가 시위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최루탄 파편에 다치신적도 있다고 합니다.

청년시절:다양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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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엄마는 1990년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적성에 맞지 않던 직업을 선택하는 대신 조그만 회사에 입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회계 업무 및 비서, 그리고 경리와 같은 잡무를 하셨습니다. 엄마는 그곳에서 2년간 일하시다 퇴사하셨는데,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엄마는 갤럽이라는 알바를 하게 되셨는데, 여론기관의 설문지를 데이터 코딩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엄마는 적성에 맞아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를 눈여겨보던 거래처 사장님에 의해 스카우트 되어 10년 이상 일하게 됩니다. 엄마에게 여쭤보니 엄마는 회사에 다닌 것보다 자택 근무가 더 편했는데, 이 일이 자택 근무인데다 자신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어서 오랜 기간 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논문이나 국방 연구소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같은 것들을 알아갈 수 있었던 것이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엄마의 일하는 모습은, 낮에는 저와 동생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하면서 보내시다가 저희를 재우고 난 뒤 밤에 컴퓨터에 앉아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저는 항상 잠들 때 컴퓨터 타자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면서 자곤 했는데, 그때는 오히려 동요나 다른 소리보다 컴퓨터 타자 소리가 더 정겹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결혼과 출산:장손 며느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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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1996년 외할머니의 친척 소개로 아빠를 만나게 되었는데, 엄마가 기억하는 아빠의 첫 인상은 되게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열애 1년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아빠가 엄마 말을 우선으로 잘 들어주고 엄마에게 잘 맞춰주는 모습에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엄마는 결혼하고 난 뒤, 1년 후 저를 낳고 또 1년 뒤 동생을 낳으셨는데 그때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기억을 여쭤보니 “큰 아이 때는 너무 입덧이 심해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힘들었고, 둘째 때는 몸이 힘들어서 신우염에 걸려서 고생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저는 당시 상황에 대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만큼 엄마가 얼마나 저희를 낳고 고생하셨는지 알고 있는데, 저희 엄마는 저희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당시 엄마가 저희를 낳고 난 후 회사 상황 상 바로 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 몸이 아픈 상태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제가 기억하는 엄마는 집에서도 바쁘셨으며, 항상 손목 보호대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출산과 후의 상황이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결혼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게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저희 엄마는 장손의 며느리로 사는 삶이 가장 힘들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저는 엄마의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제가 보아도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빠가 태어나 자란 동네는 씨족마을로 6.25가 터지기 전까지 많은 친척들이 모여 살았는데, 6.25 이후 서로 흩어지게 되면서 다른 성씨들도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김씨가 많은 마을로, 마을에 제실이 남아있어 1년에 한번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빠는 이런 환경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서 엄마에게 장손의 며느리로의 책임과 의무를 항상 강조해왔습니다. 엄마는 항상 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사람들은 잘한 것보다 부족한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건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엄마의 이런 상황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제사가 있는 날이면 항상 엄마를 걱정하게 됩니다. “혹시 앓아 눕지는 않으실까?, 오늘은 또 얼마나 속상하실까?”하고 말입니다.

자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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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엄마는 저희가 어렷을 때부터 수영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생 때 다른 아이가 전교생 앞에서 학교장으로부터 상을 받는 모습을 보고, 저도 받아보고 싶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술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엄마는 수영을 통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수영을 배울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후 저희는 6년의 세월동안 수영을 했는데, 그동안 여러 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하면서 수영에만 몰두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엄마의 교육입니다. 저희는 그때 수영대회에 나가면 대회 차례까지 대기하는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노래를 듣거나 게임을 하는게 대부분 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시간에 책을 읽었는데 엄마가 평소 책 읽는 습관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동화나 역사 위인 시리즈 책 위주로 읽었던게 생각납니다.

초등학생 이후 수영을 그만두게 되면서, 엄마는 저희가 그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수업을 못따라갈까봐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교육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셨는데, 이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저희가 살던 지역은 교육에서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엄마는 저희를 서울에서 공부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주위에서는 서울 간다고 달라지겠냐는 시선과 반대의 말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위의 시선에 엄마는 오기로라도 교육을 성공시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저희의 교육에 있어서 엄하게 가르치셨는데, 당시 저희는 왜 엄마가 이렇게 엄하게 공부를 시키실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중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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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되고, 저희는 성인이 되면서 이제 조금씩 엄마의 시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엄마는 요즘 엄마의 취미 생활을 즐기고 계신데, 평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퀼트나 뜨개질 같은 것도 좋아하시기 때문에 아는 지인과 함께 공방을 차려 작업공간이자 취미생활 공간으로 활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엄마는 현재 동네 캣맘으로 활동하고 계신데, 엄마의 하루 일과 중 절반이 고양이 돌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엄마는 원래 고양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3때 저희 엄마는 아는 지인분의 공방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공방은 공방처럼 보이지만 사실 길 고양이들을 돌봐주는 캣맘들의 이야기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한 아기 고양이가 공방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다친 상태에 엄마에게 버림받아 자라온 듯 많이 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공방에서 돌보면서, 임보를 구하게 되었는데 눈이 다친 아이여서 그런지 아이를 데려가고자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아기고양이는 공방에서 4달이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수능을 준비하느라 공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아기 고양이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아마 이때부터 고양이가 유독 저를 많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이후 저는 부모님에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저희 엄마는 아기고양이가 신경 쓰였던 탓인지 고민해보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 아빠는 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렇게 1달을 엄마와 아빠에게 고양이는 제가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약속을 받은 뒤 고양이를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이 이후로 다른 길 고양이들도 저희 고양이처럼 밖에서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할지 마음이 쓰여 챙기다 보니, 어느새 20마리가 넘는 아이들을 챙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중에 아픔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유독 마음이 쓰이셨는지 집에 데리고 와서 키우시게 되면서 집에서 4마리의 고양이를 돌보고 계십니다.

저희 엄마의 현재 모든 이야기는 항상 고양이로 시작해서 고양이로 끝날 만큼,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십니다. 가끔 너무 고양이 이야기만 하시고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시다보니 서운할 때도 있지만, 엄마가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지금처럼 엄마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노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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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저희 엄마에게 “엄마는 노후의 삶을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라고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저희 엄마는 “나의 노년의 삶은....나는 아직도 배우고 싶은게 너무 많아....그렇기 때문에 좀 배우고 즐기고, 그러면서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전에 “엄마는 왜 배우고 싶은게 많지?”라고 생각하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공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는 저희가 어렷을 때 저희가 배우고 싶은게 있다면 거의 다 하게 해주셨지만, 정작 엄마 본인이 원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부터라도 저희 엄마가 바라는 노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엄마가 저희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엄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싶습니다.

채록자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엄마이신 오수정님에 대한 구술사를 진행한 김효진(17)이라고 합니다. 아카이브와 콘텐츠 기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술사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라는 한 사람의 인생사를 되돌아 볼 수 있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엄마가 아닌 오수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게 힘들고 불편했을 수 있는데 흔쾌히 도움을 주신 저희 엄마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고자료

구글 드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