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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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최남선과 더불어 신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인 문인이며 일제강점기무정」,「소년의 비애」,「방황」등을 저술한 소설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이듬해 일본에 있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된다.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서 신채호와 만나게 된다. 1911년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기독교계인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교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와세대 대학에서 공부하며 유학생 잡지 『학지광』을 편집했다. 1918년 북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 조직에 가담했다. 1921년 귀국 이후 국내에서 「허생전」,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그 여자의 일생」, 「사랑의 동명왕」 등의 소설과 「문사와 수양」,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7월 12일 납북된다. 이후 강계에서 30여km 떨어진 산악지대의 강추위 속에서 심한 동상에 걸리고, 건강이 더 악화된다. 이후 북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 25일 생을 마감한다.

연보

연도 약력
1892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 940번지 돌고지에서 전주 이씨 문중 5대 장손으로 출생.
1894 가세가 기울어 극도의 생활고를 겪음, 아명은 보경(寶鏡)
1896 한글과 천자문 깨우침.
1902 부모의 의사로 향리 김씨 집에 청혼하였으나 경제적 이유로 거절당함, 부와 모가 콜레라로 별세하게 되며(8일차) 3남매가 고아가 됨, 외가와 재당숙 집을 전전 기식하며 방랑생활
1905 일진회와 접촉하는 한편 개화사상에 눈을 뜸,진남포에서 화륜선 편으로 인천을 거쳐 상경하는 길로 삭발, 일진회에서 세운 광무학교 전신인 소공동학교의 일여교사로 채용, 광무학교가 설립되자 학생으로 공부,일어교사를 통해 일어를 실습하며 산술을 배우다 일진회의 유학생 9명 중에 선발, 손병희를 일본에서 봄
1908 톨스토이에 심취, 무저항주의에 공감,홍명희의 소개로 육당 최남선을 알게 됨, 홍명희의 소개로 서울에서 정인보와 알게 됨
1910 여행기 '여행의 잡감'을 발표,《소년지》에 '어린희생'을 연재, 향리의 오산학교 교주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동교의 교원이 됨.(김소월 등의 담임 맡음), 오산학교 교가 직접 작사, 조부 별세, 향리 지인의 중매로 6월 백혜순과 정혼, 집을 용동으로 옮기고 야학을 열며 남강의 매상촌운동의 선봉에 섬, 망명 도중 오산에 들른 단재 신채호와 알게 됨, '나의 자각한 인생' 발표,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 발표
1911 105인 사건으로 오산학교 교주 남강이 구속, 학감으로 취임하고 오산학교의 실질적 책임, 하기 방학에 상경하여 최남선 집에 유하며 시국을 담론, 비밀 독립운동 단체 조선학회 조직
1918 폐병 걸림,《청춘》지에 '소년의 비애', '윤광호', '방황' 등 탈고 및 발표, 논문 '의지론적 진화론' 당국에 압수, 9월 매일신보에 '신생활론'을 연재하여 물의를 일으킴,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에 북경에 있다가 급거 귀국, 3.1 운동의 선봉이 되게 함,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 백혜순과 이혼
1919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본국에 정하여 국내외에서 동시 궐기할 것 말함,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 3.1 독립선언서의 제1보를 기사화하여 보토케 함, 망국청년들이 주관한 '우리 소식'에 논설을 기고, 소장파의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 조직에 협력, 임시의정원 평안도대표로 선출,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 맡음, 임시정부 공부국장과 주요한의 협력을 얻어 주간《독립》 발행,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겸임, 희곡 '순교자' 지음, 오산학교 제자를 소재로 ‘H군에게’를 집필, 안중근 의사 부인 초청연에 참석, 흥사단의 임시반장으로 임명, 사료편집위원회 해산,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민족운동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 번민, '너는 청춘이다'와 같은 시 그리고 평론을 집필하여 《창조》에 보냄
1922 《백조지》 필진 한 사람으로 참여,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 석전 박한영 찾아가 서예와 한시를 배우고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 경신학교 교사로 영어를 가르침, 수양동맹회 조직,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와 면담, 아베 미쓰이에와 접촉,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 얼마 후 퇴사,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 주관, 주요한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동우구락부, 수양동맹회 발족 지시, 서해 최학송과 서신 왕래
1937 동우회사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신병 재발로 병감 옮겨짐
1939 '무명' 《문장》에 발표, '세조대왕' 집필에 착수, '꿈' 집필, '무정'이 영화화되어 상영, '이광수단편선' 간행, 조선문인협회 회장 선출, 전선 병사 위문대, 위문문 보내기 행사 주도, 북지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발표,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
1940 가야마 미쓰로 창씨개명, '내선일체'와 '조선문학' 발표,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 게재, 황민화운동 지지,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1949 반민법'에 육당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수감
1950 '사랑의 동명왕', 서울, 유작 '운명' 집필, 서울대문리대 불문과에 입학, 효자동 집에 공산군에 의해 차압됨, 납북됨, 10월 25일 폐결핵 악화로 사망

작품

이 이외에도 허생전, 원효대사, 어린벗에게, 방황, 가실, 거룩한 죽음, 사랑인가, 재생, 마의태자, 사랑, 백범일지 등이 있다.


초판이나 원본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많은 작품이 있지만 현재 많은 출판사에서 이광수의 작품이 재출판 되고 있다.

관련항목

  • 민족개조론 - 1922년 5월 이광수가 종합지『개벽(開闢)』에 발표한 논설
  • 2.8 독립선언 -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을 발표.
  • 임시정부 -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한 이광수는 임시정부 공보국장과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겸하며 선전활동을 담당.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작성자 : 노경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