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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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梨花學堂)

개요

1886년 조선 한성부에 설립된 근대 사립 중등교육기관이자 한국 초기 여성교육 기관 중 하나이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며 유관순의 모교이기도 하다.

역사

  • 1885년, 선교정책에 따라 조선에 발령받은 미국인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Scranton,M.F.)은 자신의 아들인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에 온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교육자였던 메리 스크랜튼은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을 통해 조선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스크랜튼 부인은 조선의 여성들의 지위가 매우 열약하여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최초로 조선에 여학교를 세운다. 그러나 그 당시 조선인들은 병인양요신미양요등의 경험으로 서방국가에 대한 경계심이 몹시 높았고 메리 스크랜튼은 학교 설립 이후 단 한 명의 여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을 정도로 여학생을 모으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처음 몇 년간은 이러한 이유로 재정난을 겪었으나 이후 어느정도 틀을 잡아갔다.
  • 이화학당은 멀리 사는 여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했다. 소녀들은 학교에서 모든 생활을 했으며 과목은 한글, 영어, 한문, 성경 등을 배웠다. 특히 댱시 이화학당의 영어교육은 조선에서 시도된 적이 없던 교육으로 화제가 되었다. 또한 성경교육은 한국 최초의 채플 클래스이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빨간 옷감으로 지은 한복을 교복으로 입었다. 점차 과목, 학제, 교사 등이 정비되고 학교가 발전되며 처음에는 이곳으로 여자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꺼려하던 조선인들도 점차 경계심을 낮추기 시작했다.
  • 1887년에는 의료선교를 위해 조선 여성들 위한 병원을 설립한다. 이는 보녀부관이라는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도 의사였지만, 남녀의 구별이 엄격한 당시 조선의 풍속 때문에 스크랜튼 부인은 미국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했고 이후 미국인 여의사들이 와서 조선 여성들을 치료했다. 이 병원은 일반 교육기관에서 전문학교대학교로 승격을 거쳐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된다. 이후 최초의 한국 여의사 박에스더를 시작으로 조선인 여자 의사들이 생겨나며 이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 1887년고종황제명성황후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를 치하하여, 친히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이화'라는 교명은 당시 학교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하얀 배꽃에서 따온 것으로, 배꽃 처럼 희고 맑고 깨끗하라는 의미이다.또한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을 통해 편액(扁額)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다.
  • 1910년 대학과가 신설된다.
  • 1918년 보통과와 중등과/고등과를 이화여자보통학교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신설했다.
  • 1925년 대학과 전문학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켜 신설하였다.
  • 1946년 대학교로 승격시켜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만들었다.
  • 1996년 유관순열사의 모교인 이화학당은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졸업장을 주었다.
  •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화학당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 열사 99주기 추도 예배를 진행했다.

교가

이화학당 제1교가


참 영화스런 학당은 이화학당일세 사면에서 온 수백명 학생 다 지금들 노래하네 그 학생들 노래지어 날마다 화답하네 이 이름 널리 전파하기위해 다 지금들 노래하세 배 리 꽃 화 배울 학 집 당 리화학당 리화학당
- 1906년, 김정진 작사, E.T.O’Kane 작곡


이화학당 제2교가


아 우리 이화대학당은 조선에 제일되어 여청년들을 배양하니 참 영화스럽도다 창립한 지 수십년간 대 중 소 학당낳고 이화로써 명칭한후 다수열매 맺었네 아 우리 이화학당 조선에 제일일세 지덕체 삼육으로써 여자를 배양하네
- 1914년, 신마실라 작사, 작곡자 미상

이화학당 제3교가


1절 조선안에 운명광선 비칠 때 우리 이화학당 창립하고 도덕과 학술로 널리 배양하니 흑암중 일륜명월 되었도다. 후렴 만세 만세 만세 이화학교 만세 하느님 사랑으로 터닦고 귀하고 아름다운 제목을 양성하니 아 우리 이화학교 만세 2절 학업에 힘쓰던 우리 학우들 오늘은 학과를 정지하고 활발한 기상과 기쁜 맘으로써 일제히 유쾌하게 놀아보세 3절 우리 일만동창 맘과 뜻 합해 즐거운 오늘 수십여년전 우리의 모교를 창립한 기념일 열성을 다해 축하찬송하세 4절 하느님 사명 받은 우리학생 경천애인으로 목적삼고 해에 깊이 빠진 동족 구원하며 모교를 영원토록 빛냅시다.
- 1918년, 박인덕 작사, 작곡자 미상

교과목

한국인의 여자교육을 기피하는 전통적 관념과 양인(洋人)에 대한 배타적 성격 때문에 초기에는 곤란을 받았다. 초기의 상황을 보면, 스크랜턴 부인은 서양도깨비란 뒷손가락질을 받았고, 처음 학생은 콜레라에 걸린 여남은 살 된 '별단'이란 떠돌이였으며 1887년에는 학생이 겨우 7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학생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화학당의 교육정도는 중등 정도를 목표로 하였고, 교육목적에 대해 길모어(Gilmore)는 "한국여아(韓國女兒)를 모범적인 주부로 만드는 동시에 그들의 친척·동료 사이에 개신교 선교사를 만드는 데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교과목으로는 개신교에서 세운 학교이므로 성서를 가장 중요시하고, 영어·영문법·산술·언문(諺文)·창가(唱歌)·역사·글씨쓰기 등과 천자문·동몽선습 등 한문도 가르쳤다. 실제 삶에서 응용할 수 있는 학문들을 가르쳤던 셈이다.


이화학당 출신인물

  • 권애라 - 이화학당 보육과. 독립운동가.
  • 김애마 - 이화학당 대학 예과&유치원 사범과. 이화학당 교사 및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초대 학장. 사립대학 최초로 사범대학 설치 인가를 받는 데 성공하는 등 학교에 많은 공헌을 하여, 이화여대 사범대 건물(교육관)에는 김애마의 이름을 딴 '김애마 홀'이 있다. 유관순 열사와는 이화학당 보통과 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
  • 김일엽 - 이화학당 대학 예과
  • 김활란 - 이화학당 대학과.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교장,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친일반민족행위자, 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 박에스더 - 이화학당. 한국 최초의 근대 여의사.
  • 박인덕 - 이화학당 대학과. 교육자. 여성운동가. 인덕공업고등학교와 인덕대학교의 설립자.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
  • 복혜숙 - 이화학당 보통과
  • 유관순 열사 - 3.1 운동 참가.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대학과가 아닌 고등과 재학 중에 순국했으며, 실제로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 이애라 - 독립운동가
  • 조신성 - 이화학당. 독립운동가.
  • 차보석 - 이화학당. 독립운동가.
  • 최영숙 - 이화학당.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
  • 하란사(김란사) - 이화학당. 독립운동가, 교육자. 한국 여성 최초로 해외유학을 한 인물이자, 한국 여성 최초로 학사학위(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문학사)를 받은 인물.[10]
  • 홍애시덕 - 이화학당. 독립운동가.


관련미디어

관련사진

독립운동이화학당.jpg
학생들과 교사들의 독립운동 회의장소였던 이화학당
이화학당유관순.jpg
이화학당 재학 당시 유관순 모습

관련영상




  • 조선에 이화학당을 세운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이야기

관련항목

RDF 및 네트워크 그래프

RDF

주어(S) 목적어(O) 관계:A는 B를 ~하다(P)
유관순 이화학당 A가 B에 재학하다
메리스크랜턴 이화학당 A는 B를 설립하다
배꽃 이화학당 A는 B를 상징하다
심의석 이화학당 A가 B를 건축하다
이화학당 남녀평등 A가 B를 추구하다
3.5 이화학당 만세시위 이화학당 A는 B에서 발생하다

네트워크그래프

참고문헌

작성자

안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