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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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부대·이항(尼港)군대 라고도 불린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부대로서,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의 오하묵(吳夏默)·최고려(崔高麗) 등과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부대이며,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파계였다.

그러나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朴愛)·장도정(張道政)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이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와 반목하는 이들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양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박이리아는 이에 불복했으나, 홍범도·안무(安武)의 부대가 마사노프에서 자유시로 빠져나오자 점차 고립되었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29연대를 동원, 6월 28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대도 29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당시 희생자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 포로 864, 행방불명 59명으로,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박이리아는 무사히 탈출했다. 고려군정의회는 포로심사를 거쳐 일부는 수감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켰으며, 다른 무장부대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 제5군단 산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자유시참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해석과 평가가 다르나,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빚어낸 비극으로서 이후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