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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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1961년 5·16군사정변에 의한 1년 7개월간의 군정의 뒤를 이어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개정헌법에 의하여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와 11월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거쳐 12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취임함으로써 출범한 한국의 3번째 공화헌정체제.

[네이버 지식백과] 제3공화국 [第三共和國] (두산백과)

주요 시책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한일국교정상화 추진 △베트남 파병 △8·15평화통일선언 발표 △남북대화 추진 △경부고속도로 건설 △8·3조치 단행 등.

경제개발정책, 특히 공업화정책의 추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산업구조가 상당히 개선되었으며, 기간산업(基幹産業)과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수출액이 뚜렷하게 증가하였다.

외교 분야에 있어서는 학생들의 반대시위와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한일국교정상화(韓日國交正常化)를 추진하여 1965년 6월 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을 체결하였다.

1964년 10월 정부는 베트남파병을 결정하고,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한 국군부대파견에 관한 협정을 베트남 정부와 체결하였으며, 그 해 의무중대·공병부대·수송부대 등 비전투병력을, 1965∼1966년 청룡·맹호·백마부대의 전투병력을 파견하였다.

한편 1970년 8월 15일 대통령 박정희는 남북통일에 관한 새로운 구상으로 ‘8 ·15평화통일선언’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1970년 7월에는 서울~부산 간의 경부고속도로(428km)가 착공되어 2년 5개월 만에 개통되었으며,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 15호’를 발표하여 기업사채(企業私債)를 동결하였다. 이 긴급명령은 경제악순환의 근절과 기업이 고리사채(高利私債)에 허덕이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업사채를 월리(月利)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하도록 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공화국의 주요 시책 (두산백과)

주요 정치 사건

  • 군의 쿠데타 음모:1963년 3월 10일 중앙정보부는 이규광(李圭光) ·박임항(朴林恒) ·김동하(金東河) ·박창암(朴蒼岩) ·김명환(金明煥) 등을 쿠데타 음모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어 8월 10일 군법회의는 박임항 ·이규광 ·정진(鄭震)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 6·3사태: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 문리대 학생들이 한일회담 ·학원사찰(學園査察)을 규탄하며 벌인 반정부시위는 3개월간의 성토대회 ·단식으로 이어졌고, 6월 3일에는 최고조에 달하여 ‘박정권 타도’를 외치는 실력행사로 변모하였다. 정부는 이날 밤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계엄은 7월 28일 해제되었다.
  •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64년 8월 2일 국회는 공화당이 발의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통과시켜 언론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 한일협정반대 학생시위: 65년 한일협정조인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 유혈사태를 벌여 대학에 조기방학조치가 취해졌다. 협정조인 후 협정무효화의 데모가 다시 일어나자 8월 26일 서울에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고, 연세대학 ·고려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 민중당(民衆黨) 창당:야당인 민정당(民政黨)과 민주당(民主黨)이 1965년 5월 3일 합당하여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대표최고위원에 박순천(朴順天), 고문에 윤보선(尹潽善)을 선출하였다.
  • 신민당(新民黨) 창당:민중당과 신한당(新韓黨) 양당은 1967년 2월 7일 통합하여 신민당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총재에 유진오(兪鎭午)를 지명, 5 ·3선거와 6 ·8선거에 대비하였다.
  • 3선개헌(三選改憲) 파동:1969년 6월 대통령 박정희의 3선출마를 위한 개헌 움직임이 진행되자 6월 19일 반대학생데모가 시작되었고, 7월 17일 ‘3선개헌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개헌안은 9월 14일 새벽 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모인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통과되었고, 10월 17일 국민투표로 가결되었다.
  • 공화당의 항명(抗命) 파동:1969년 4월 8일 국회는 문교행정의 실패 등을 이유로 신민당이 제기한 문교부장관 권오병(權五柄)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가결시켰다. 이것은 공화당 의원 일부와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원들이 동조하여 이뤄진 것이며, 공화당에 항명파동을 초래하였다. 공화당은 즉시 항명한 의원 5명을 제명처분하였다.
  • 공화당의 10 ·2항명 파동:1971년 10월 2일 야당측이 제기한 내무부장관 오치성(吳致成)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일부 공화당 의원의 가세로 가결됨으로써 다시 공화당에 항명파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공화당의 길재호(吉在號) ·김성곤(金成坤) 의원이 탈당,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 국가비상사태 선언:1971년 12월 6일 대통령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6개항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은 사회불안불용(社會不安不容), 불안요소 제거, 성실한 안보의무 수행, 안보시책의 최우선화, 최악의 경우 자유의 일부 유보용의(留保用意) 등이 골자였다. 이것은 바로 다음해의 10월유신의 전주곡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공화국의 주요 정치 사건 (두산백과)

주요 사회 사건

  • 4대 의혹사건:1963년 3월 6일 중앙정보부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회전당구사건)의 수사경위를 발표, 유원식(柳原植) 등 15명의 관련자를 구속 ·송치하였다. 그러나 모두 무죄로 풀려나 의혹을 남겼다.
  • 이수근(李穗根) 위장귀순:1967년 3월 22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취재하던 북한의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이 귀순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9년 1월 27일 서울을 탈출, 캄푸치아(캄보디아)로 도피중에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되어 위장간첩임이 드러났다.
  • 동베를린공작단사건: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지하공작단이 공작망을 국내에까지 침투시켜서 이를 검거하였다고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하였다. 관련자가 무려 194명에 이르렀다.
  • 1 ·21사태:1968년 1월 21일 밤 북한의 124군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국군을 가장하고 서울에 잠입, 세검동과 청운동에서 군수색부대에게 발각되어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살되었다.
  • 푸에블로호사건: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함장 L.부커 소령)가 북한 해안으로부터 4km 떨어진 공해상(公海上)에서 북한의 초계정에 납치되어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미국은 기동함대를 원산만에 출동시키는 한편, 판문점에서 북한과 비밀회담을 거듭한 끝에 승무원 83명 중 82명이 12월 23일 석방되었다.
  • 담시(譚詩) 《오적(五賊)》 필화사건:《시인(詩人)》지(誌)를 통해서 소개된 시인 김지하(金芝河)의 담시 《오적》이 잡지 《사상계(思想界)》(1970년 5월호)에 게재되고 이어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6월 1일)에 전재되자 필자와 발행인 ·편집인 등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공화국의 주요 사회 사건 (두산백과)

평가

대한민국이 재빨리 발전하던 시기, 폭정의 서막이라는 평가로 엇갈린다. 외국에서는 정치적 문제를 떠나 동아시아 근현대사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거나 공부할 때, 제3공 시기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로 가르친다. 물론 경제가 발전하던 때라서,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끝난 얘기지만, 박정희가 유신만 안 했어도 평가는 더 좋았다는 의견도 강세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