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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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최린은 일제강점기친일파,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78년 1월 25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어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 활동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석방 이후에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주장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고 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뒤늦게 참회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저명한 인물이다.

생애

젊은 시절

1878년 1월 25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에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낸 아버지 최덕언[崔德彦]과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한학자 도필두[都必斗]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901년부터 서울에서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의 망명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된 ‘활빈당’[活貧黨] 및 ‘일심회’[一心會] 등의 관계를 만들며 활동을 시작했다. 두 단체는 망명개화파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단체로 몇몇 인물은 대역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지만, 최린은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최린이 근대학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중앙정치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이 시작이었다. 최린은 1904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5년간 생활했다. 1904년 11월에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무학회[光武學會] 총대, 태극학회[太極學會] 총무원과 평의원, 대한학회[大韓學會] 회장, 대한홍학회[大韓興學會] 평의원과 부회장을 맡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최린은 일본 유학생들의 증가로 어지러운 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최린은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인 태극학회를 탈퇴하고 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더하여 최린은 유학생들의 통합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  -최린-

최린은 유학을 통해 반일적인 유학생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유학생들이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것을 비판하며 대한제국의 부흥을 위해 이바지할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서로가 합심하면 독립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많은 유학생과 국가와 민족의 단결을 통해 국가권력을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의 주체적 여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린은 1909년 9월에 귀국하여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천도교단에서 인수한 보성학교 보성중학교에 1911년 2월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독립 운동과 천도교 활동

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반일 감정을 보이면서 대한제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05년에 최린은 일본 유학생회를 통해 ‘을사늑약’과 조선 유학생을 무시하는 교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1906년에 최린은 국화인형전시장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허리를 굽힌 조선왕의 인형이 전시된 것을 알고 학생들과 전시장에 인형을 파괴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07년에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일본학생이 ‘한국왕’을 일본민족인 화족(和族)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자 유학생들과 학감을 방문하고, 문제학생의 퇴학을 요구하여 학교 측의 사죄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상의 사건들은 본국에도 알려진 일본유학생들의 대표적인 반일 활동이었다.

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천도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최린이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와 만나게 되었다. 그가 손병희를 처음 만난 것은 일심회[一心會] 활동을 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피해 일본에 건너간 1902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유학 생활을 하면서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손병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손병희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제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린에게 관심을 보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1909년 9월 최린은 귀국 후 방랑 생활을 하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일제강점기로 국가를 잃어 방황하던 자신의 상황에서 그나마 사회활동을 기대할 수 있던 것은 종교활동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민족대표 33인

손병희와의 친분과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등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기대, 천도교의 위상을 고려하여 판단한 것이다. 1910년 10월 손병희를 찾아간 최린은 10월 25일 입교식을 통해 정식 천도교인이 되었고 이후, 최린은 천도교의 보성학교 인수를 성사시키고, 보성중학교와 보성소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보성학교 교장으로 입지를 확보한 최린은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교단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했다. 최린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18년 말, 민족자결주의와 피식민지국가의 독립문제가 나타나자 교단의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과 상의하여 한국의 자결을 위해 행정권을 확보하여 조선자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할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해주와 상해의 한인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교주인 손병희의 동의도 얻어냈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했고 1919년 1월, 2월에 걸쳐 독립선언서를 작성, 발표, 인쇄, 시위계획, 대표선정 등의 작업에 모두 개입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협의를 주도한 것도 최린이었다. 그는 독립선언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고 경성 감옥에 수감 되었지만, 그의 위상은 천도교의 많은 영향을 미쳤고, 3·1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최린은 3년을 받았지만, 1921년 12월 총독의 정치 자문을 맡고 있던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가 천도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필요한 신세력을 조직하는 데 최린이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의 탈옥을 주선했다. 탈옥한 최린은 곧 천도교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고 천도교3·1운동 이후 일제의 오랜 탄압과 손병희의 사망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교인과 재정이 감소하면서 지도체제를 둘러싸고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1925년에는 천도교는 분열했다. 최린은 다수파인 신파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천도교 청년당, 조선농민사 등의 대중조직을 설립하여 조직기반을 장악했다.

변절과 친일 활동

손병희를 계종하여 천도교 지도자가 된 최린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활성화되지만, 자치를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여 자치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다. 1923년,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를 비롯한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 자치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조선 사회의 반발로 실패하자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를 상대로 시도한다. 조선의 독립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로 천도교 중심의 정치적 통합을 구축하고 일제와 타협하는 조선의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최린

최린은 자치운동이 성과가 없자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1년간 미국과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와 자치에 대한 신념을 명확히 하였다.

‘앞으로 조선민족의 진로는 자치밖에 없으며’
‘천도교 청년 당원들에게 자치 의식을 고취 시키고 신파 전체를 자치운동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이것이 최린의 입장이었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1930년에 다시 부임하자 최린은 본격적으로 자치운동을 이어왔다. 송진우[宋鎭禹], 이정섭[李晶燮] 등 민족주의계열의 자치론자들과 서정희[徐廷禧], 송봉우[宋奉瑀] 등 사회주의자 일부와도 접촉하여 의견을 나눴다. 또한 천도교세력도 자치운동에 포섭하기 위해 천도교 구파에 교권을 양보하며, 천도교 구파와 합동하였다. 최린이 이러한 행동까지 한 이유는 1920년대 중반부터 자치제를 검토하고 있던 사이토 총독에 의해 자치제가 실현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린의 자치운동은 실패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조선 통치체제 개편 방향이 조선 자치제가 아닌 지방자치제도의 부분 개정으로 축소되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최린은 이러한 결과를 보고 자치를 추구하던 민족적 입장도 포기하고 친일 활동으로 변절하기 시작하였다. 목전에 놓인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목전의 이익 획득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1934년 최린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어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8월 30일, 내선일가(內鮮一家)에 입각한 정신, 생활 개선 운동 단체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고 이사에 선임 
1936년 11월, 시중회 대표로 조선인의 징병을 청원
1938년 4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사장으로 취임.
1938년 5월, 시중회 대표로 지원병제도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이사에 선임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에 선임되어 조선인의 전쟁 동원을 독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많은 조선인 중 박희도, 최남선, 현상윤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그중에서도 최린은 독보적인 친일파로 변절 된 인물이다. 조선인의 전쟁 참여와 징병을 주장하는 최린은 조선 민족이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조선의 민족이 일본의 국민으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조선 독보적인 친일 인사였던 최린은 자신이 한 행동에 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1949년 1월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특경대원에 의해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수감 중 1949년 4월 보석으로 나왔다.


최후

최린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으로 납치되었고 요양소를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958년 12월 말에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최린이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최린의 최후에 대한 명확한 사실은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 최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서 자신이 한 친일 행위들을 인정했고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면 했을까요’라는 말도 남겼다.

관련 사항

괸련 장소

메이지대학교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 >>>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


보성학교













1910년 천도교의 천도교단에서 인수한 보성학교의 보성중학교에 1911년 2월 교장으로 취임


서대문형무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괸련 미디어

[🇰🇷삼일절특집] 드라마 '님의 침묵' | KBS 860301 방송 
86년에 방영되었던 KBS 1TV의 삼일절 특집 드라마로, 한용운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최린'역은 '송재호' 배우님이 연기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민족대표 최린은 왜 변절자가 되었나ㅣ KBS 191112 방송

RDF

주어 목적어 관계
최린 일본유학생회 조직하다
최린 일본유학생회 참여하다
최린 대한학회 참여하다
최린 태극학회 참여하다
최린 대한흥학회 참여하다
최린 광무학회 참여하다
최린 천도교 참여하다
최린 민족대표 참여하다
최린 2.8독립선언 참여하다
최린 3.1운동 참여하다
손병희 천도교 대표이다
최린 손병희 관계맺다
최린 일심회 관계맺다
최린 활빈당 관계맺다
최린 메이지 대학 입학하다
최린 메이지 대학 졸업하다
최린 최덕인 가족이다
최린 김씨 가족이다
최덕인 김씨 부부이다
최린 서대문형무소 수감되다
최린 친일파 변절하다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인문콘텐츠와 정보기술(20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인정해조, 작성자 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