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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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들을 만석꾼이라 불렀다. 한 해에 곡식 만 섬 가량 거둘만한 논밭을 가진 부자를 빗댄 말이다. 당시 쌀값과 현재 쌀값을 비교해 대략의 환율을 구해보니 쌀 1섬이 36만원, 1냥이 7만원으로 계산된다. 그렇다면 만석이라면 36억 원 가량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만석꾼이라면 현재로 보자면 연봉 36억원을 받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대기업 회장들의 연봉을 살펴보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61억원, 손경식 CJ제일제당 회장 56억 원,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 17억 원으로 나타났다. 당시 만석꾼의 위치가 대기업 총수정도라고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조선 유명한 만석꾼으로는 이종석, 최부자가문이 있다. 특히 영남 만석꾼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은 '300여년 간 12대를 이어간 부자'라고도 유명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역사

그 역사의 시작은 최부자의 시조 최국선(1635~1682년)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25세 나이로 의병으로 참전했고, 정유왜란 때 결사대 100명과 함께 큰 공을 세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훈련부정, 도총부도사, 공조참판, 경기‧공청(충청)‧황해 수군 통어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엔 공주 영장이 되었다.1636년 병자호란 발발 후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될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전투 시 자신을 따라온 종 옥동, 기별에게 집으로 가라 일렀으나, 장군 전사 후 그들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며 기어이 남아서 싸우고, 주인을 일평생 지키느라 이미 환갑을 넘긴 늙은이였던 그들도 결국 함께 전사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최진립의 후손들은 두 종의 제사를 함께 모신다. 당대엔 노비 제사를 지낸다고 양반들에게 욕을 먹었으나 그럼에도 꿋꿋이 모시고 종들을 기리는 비각까지 세웠다고 순절 후 정무공, 병조판서, 청백리에 추증되었고, 안타깝게도 사당 충렬사는 현재 두만강 부근 경원에 있어 참배할 순 없다.

이후 2대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큰 땅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국선은 배고픈 보릿고개 때에는 100석의 쌀을 베풀었다. 사방 100 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최부자 집안은 10대에 걸쳐 흉년 때마다 수입의 3분의 1을 빈민 구제에 쓰는 등 수많은 자선 활동과 사회공헌으로 '경주 최부잣집'은 칭송의 대상이 된다.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12대 최준에 이르러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념으로 독립자금 마련에 최준은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한고, 독립유공자로 명명된다. 최부자가 12대, 300여년으로 막을 내린 이유다.

최부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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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27-40(교동 69)

경북 경주시 교동 자택은 부지 1만평, 80칸의 대저택으로 1971년 05월 26일에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다. 가옥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현재의 가옥은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 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이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 ·행랑 ·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고방·안채·사당·뒤주가 남아있다. 특히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뒤주(쌀창고)가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또한, 경주최부자아카데미를 운영 중이다.[1]


기타

일명 '최부자집 가훈'으로 유명하다.

 가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
"재산은 만석이상 모으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마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 없게 하라"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부자 만석꾼 최부자는 만석꾼 이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최부자댁 [Historic House of "Rich Man" Choe, Gyeongju, 慶州 崔富者宅] (두산백과)

[2]

위키백과 최부잣집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우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