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백악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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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전쟁을 목적으로 산 위에 쌓은 요새가 아니다. 본래의 목적은 조선왕조를 상징하고 수도 한성부의 도시 공간을 관리하기 위하여 쌓은 도시 성곽이다. 왕조의 중심은 궁궐과 종묘를 보호하고 도시의 안과 밖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사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1396년 (태조5)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른다.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600년이라는 기간 동안 가장 오래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성벽 돌에 새겨지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달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같은 사대문이 있으며 혜화문, 소의문, 광화문, 창의문이 사소문으로 구분된다. 그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으며 2014년까지 도성의 전체 구간의 70%가 옛모습과 가깝게 복원 및 정비되었다.본래 명칭은'서울성곽'이었으나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한양도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도성도>는 조선 영조 시대에 만들어진 <조선강역충도>에 포함된 자료이다. <도성도>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도성의 모습을 간략하게 담은 지도로 혜화문의 문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1774년 이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는 1751년(영조 27) 도성을 지키는 법률인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반포할 때 책자의 첫머리에 싣기 위해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제작한 목판본 지도이다. 풍수적으로 중요한 산과 산줄기가 강조된 서울 고지도의 일반적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 중의 하나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작품 속에서 한양도성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백악구간

백악구간.jpeg

백악구간은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4,7KM 길이 구간으로 약 3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백악(북악산,342m)은 옛 서울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을 기점으로 축조되었으며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구간 주요지점으로 창의문, 백악마루, 1·21 사태 소나무, 암문 밖 순성길, 백악 곡성, 숙정문(肅靖門), 북촌한옥마을, 북정마을,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등이 벡악구간에 자리잡고, 지금까지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구분 겨울 (11~2월) 봄(3~4월)/가을(9~10월) 여름(5~8월)
개방시간 9:00~17:00 7:00~18:00 7:00~19:00
마지막 입산 15시까지 16시까지 17시까지

가치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하고,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체계를 반영한 계획도시이다.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그 축성과정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있다. 내사산의 능선과 평지를 아우르는 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지형과 조화롭게 건설되었으며, 도성 사람들의 놀이 장소이자 문학·회화·민속의 배경의 되어 왔다. 오늘날 한양도성은 천만 도시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탁월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시대적 성곽

서울성곽의 축조 구조는 시대별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1395년(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성벽을 처음 축조할 때 산지와 구릉에는 석성으로 쌓았고 평지에는 토성으로 쌓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등 대대적으로 고쳐쌓았다. 1704년(숙종 30년) 훼손된 구간을 정비하는 등 대규모로 수리하였으며, 영조 연간에 흥인지문광희문 사이에 치성을 쌓는 등, 1869년(고종 7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개축과 수리를 통해 보강되고 관리되었다. 이에 구간에 따라 석재 형태와 구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수축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기별 성벽.jpeg
첫 번째 유형은 14세기말 태조 때의 성벽으로, 화강암이나 편마암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으며 수직으로 쌓아 올려 거친 느낌을 준다. 동북면의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서북면의 평안도의 민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지역별로 97개 구간으로 축성구역을 나누어 쌓았다. 
두 번째 유형인 15세기 초 세종 때의 성벽으로, 아랫부분은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전국에서 322,400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고 성벽높이를 보강, 여장도 완비하였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水門을 2간 더 설치하였다.
세 번째 유형은 18세기 초 숙종 때의 성벽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쌓아, 성벽의 기울기가 일정하고 정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성수축의 필요성에 논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다시 쌓고, 남한산성의 강화의 성을 보강하는 등 성역과 함께 진행되었다. 

1704년(숙종 30년)에 시작하여 숙종 37년(1711)에 대규모의 도성수축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출처: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성곽 복원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과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 · 주택 · 공공건물 ·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의 중건은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한 번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 · 관리 · 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현재는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7km(2020년 기준) 구간이 중건되었다. 복원과정에서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기도 했다.

한양도성 복원 전의 모습은 서울기록원서울사진 아카이브에서 확인 가능하다.

성곽 안과 밖

한양도성은 일차적으로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였으나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구실도 하였다. 도성 안에서는 채석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모두 성 밖에서 조달해야 하였다. 성벽은 비록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의 능선 위에 쌓였으나, 그 돌들은 북한산과 아차산 등지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한양도성은 이렇게 내사산과 외사산을 연결하고,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통합하였다. 성곽 안은 조선시대 부터 어느정도 재산이 있는 부유층이 거주했으며, 개화기 이후에도 사업을 갖고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거주가 많았다. 그중 백악구간의 성곽을 담벼락으로 사용하며,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저 시민들에게 개방된 공간인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와룡공원 쪽으로 이어진 한양도성의 암문으로 형성된 마을인 북정마을은 현재까지도 주민들의 이동 통로이다.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북정마을

추천 및 참고자료

성북마을아카이브 이야깃거리 - 한양도성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임은정 and 김선용. (2013). 서울 성곽에 대한 고찰. 호텔리조트연구, 12(2), 419-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