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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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한일병학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비폭력 만세운동이다.

배경

3.1운동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이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강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시행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항일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전개

사전 준비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신규식 등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였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한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하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만주 지린에 있는 독립운동김약연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는 무오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출국 전 김규식상하이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의 주문을 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때마침 발생한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절묘하게 만세시위 확산에 기여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되어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되었다.
  2.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3.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노동자의 투쟁양상은 3.1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나타났다.

준비 과정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불교인, 기독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도교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불교계의 대표로는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관련 인물 및 단체

관련인물

민족대표 33인 또는 민족대표 49인

태화관 (출처:[1]

3.1 만세 운동의 첫 날 경성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 대표자 33인을 말한다. 여기에 박인호, 김홍규, 노헌용, 이경섭(이상 천도교), 김도태,안세환, 함태영, 김원벽, 김세환(이상 기독교), 임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강기덕, 정노식, 김지환, 한병익 등을 합쳐 민족대표 49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밖에 3.1 운동 당시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 미국캐나다, 영국 등에 알린 스코필드 역시 별도의 조선인 민족대표자로 보기도 한다.

그 외 인물

유관순,김규식, 김순애, 여운형, 허정숙, 임영신, 신익회, 윤치영, 이광수, 정칠성, 신태윤, 조병옥, 김향화, 우드로 윌슨

관련단체

신한청년당, 상하이 임시정부, 한성 임시정부

활동

독립선언서 낭독

3.1 독립선언서 (출처:[2]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부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덕수궁 앞 만세시위 (출처:[3]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진압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일본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운동이 지속되었고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아우내 장터 시위에 참가한 유관순 (출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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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발생했으며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과 헌병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진압을 하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본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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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에서 발생했으며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벌인 사건이다. 사천헌병주재소의 일본인 소장 사토 지쓰고로와 조선인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참가자 수십명을 살상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시위대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살해당했다.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제암리 학살 사건

폐허가 된 제암리 (출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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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발생했으며 3월말 또는 4월 초에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맹산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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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헌병이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합천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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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3월 18일 합천군 강양면의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쇠몽둥이나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3월 19일에는 합천군 대정면에서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를 벌여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3월 22일에는 상백,백산,가회,삼가 등 다섯 면의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질서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일본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유림과 학생의 주도로 8천여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자 역시 일본군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

군산 3.5 만세운동

만세시위 (출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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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구암교회 교인,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군산의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시위는 이후에도 28차례에 걸쳐 계속되어 시민 3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당시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해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라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한강 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그 의미가 크다.

만주 용정 만세운동

만주 지역에서의 대표적인 만세시위는 3월 13일 용정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시위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시가행진을 하자 중국군대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3·1 운동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조선인회를 열었다. 조선인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의 차별 철폐를 요구하였다

결과

체포 (출처:[7]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천안 아우내·정주 곽산·남원 광한루·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으며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고,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다. 외에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만주 지린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2월 1일 무오 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었다.

의의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파급효과

한국인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했고, 조선의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국내 체류 미국 선교사들의 시선을 개선시켰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의 잔인한 진압이 미국인 선교사들과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만세 열기는 5월까지 계속되었다. 5월 31일 윤치호는 7,8명의 젊은이가 종각 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는 3.1 운동이 국내외에 한국인에 대한 시각을 개선시켰다고 평했다.

비판적 의견

윤치호3.1 운동을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생각했다.3.1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선동이 있다는 비판이 당대부터 제기되었다. 기독교 운동가이자 이화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창제윤치호에게 자신이 3.1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로, 만세 운동 당시 누군가에 의해 각종 미신과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3.1 운동에 대해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투기, 미신, 허황된 말, 음모에 기초하고 있어서 동조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창제는 누군가 조직적으로 유포시킨 유언비어가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 시위로 만들고 급기야는 일본군의 잔인한 학살을 유도했다며 비판하였다.

김창제는 또한 다수가 참여해서 움직이는 일이 반드시 선량한 일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김창제만세 시위가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점을 지적하였고 자신이 3.1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 뒤, 다수의 생각, 다수의 선택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윤치호는 그의 견해에 적극 공감하였다.

관련 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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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3.1운동 최대규모 항일운동 A는 B이다.
3.1운동 독립선언서 A는 B를 선언했다.
3.1운동 탑골공원 A는 B에서 진행되었다
3.1운동 전국적인 시위 A는 B를 야기했다.
3.1운동 천안 아우내장터 시위 A는 B를 야기했다.
3.1운동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A는 B를 야기했다.
3.1운동 폭력진압 A는 B를 야기했다.
3.1운동 외국의 시선 A는 B를 개선시켰다.
3.1운동 고종 독살설, 2.8독립운동, 파리강화회의 A가 B에 영향을 받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B가 A에 참여했다
3.1운동 유관순, 김규식, 김순애, 여운형 등 B가 A에 참여했다.
최남선, 이광수, 한용운 독립선언서 A가 B를 작성했다.
독립선언서 태화관 A는 B에서 낭독되었다
군산 3.5 만세운동 전국적인 시위 A는 B에 포함된다.
만주용정 만세운동 전국적인 시위 A는 B에 포함된다.
유관순 천안아우내장터 시위 A는 B에 참여했다.
제암리 학살사건 폭력진압 A는 B에 포함된다.
맹산 학살사건 폭력진압 A는 B에 포함된다.
합천 학살사건 폭력진압 A는 B에 포함된다.

참고문헌

"3.1운동", 두산백과사전, 두산, 사이트

"3.1운동",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사이트

"3.1 독립선언서", 시사상식사전, 박문각사이트

"반드시 알아야할 3.1운동 상식사전", 네이버블로그, 사이트

"3.1운동-관동대지진 피해자 명단 첫 공개", NewDaily, 사이트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