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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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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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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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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후의 햇볕이 따갑다. 겉으로 보기에 한가롭고 적막하기까지 한 농촌의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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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미의 게으른 긴 울음소리 태인박씨가 양지바른 마루끝에 을씨년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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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쭈그리고 앉아 있으며. 책이 펼쳐져 있는 작은 사방탁자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듯 한쪽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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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는 이틀거리(학질병)를 앓고 있는 병중의 몸으로 햇볕을 쬐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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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당가에서는 청지기 할아범이 송기껍질(松皮)을 벗기고 있다. 그는 쌓아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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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 기둥을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낫으로 껍질을 열심히 벗기다가는,이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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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쪽을 안스럽게 바라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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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이 땀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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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는 넋을 잃고 덩청하게 한곳을 어지 응시하다가는 또 갑자기 훌쩍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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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음을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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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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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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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것인데 사람이 먹게 댔으니 원 그래도 하는 수 없지요.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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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없고 풀뿌리 나물죽으로라도 연명은 해야지. 이렇게 소나무 껍질 벗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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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기밥도 해먹고, 보리개떡 보리수제비로 한 끼니를 때우면서 이 여름을 넘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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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 판이니까요. 올봄에는 보리흉작이 들어서 그런지,마을에는 벌써 양식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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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들이 허다하다는군요, 마님? 너나 없이. 참으로 어려운 세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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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까마귀떼가 날아와서 까악까악 울음운다. 할아범이 손짓을 하며 퉤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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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고 침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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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저런 놈의 방정맞은 집생들을 봤나. 훠이 훠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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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까마귀 눈에는 죽은 귀신들의 혼령이 보인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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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누가 그걸 알겠읍니까요? 허허허! 다 말쟁이들이 지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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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초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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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할아범. 님자가 또다시 일어난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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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글쎄옳습니다요! 쑥덕쑥덕 들리는 풍설에 의하면,질질 4년 동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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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끌어왔던 강화교섭인가 뭔가 하는것이 기왓장 깨지듯이 바싹 깨져서, 소서행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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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등천정이란 놈이 수민 왜병을 끌고 다시금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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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고------------ 어쩠거나 나라 안팎이 근심걱정이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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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난리 나면 뒤에 남은 여자와 어린것들만 불쌍하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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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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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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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안타까운듯) 햇살은 뜨겁지만 바람끝이 차갑습니다.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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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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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그러시다가 또 오한이라도 들면 어쩌시려구요? 마님. 그만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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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안으로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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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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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방 구들장이 차가우면 군불이라도 한번 더 지펴 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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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배시시 혼자 웃으며 흥얼흥얼 들릴듯 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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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딸아딸아 양념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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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만곱게 잘만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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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동나무 밑장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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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갖은장석 달아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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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아이고. 못된 놈의 세상!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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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일을 계속한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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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혼자말로) 방안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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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가 좋네! 훨씬 따뜻하고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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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시방 저 갓바우 산성(笠岩山城)으로. 칡뿌리랑 돼지감자 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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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셨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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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요. 새아씨랑 작금이년 하고. 도련님도 함께 따라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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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혼자 생각에 골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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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본시 돼지감자 같은 것은 산의 멧돼지들이나 파먹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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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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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내 장정은 나와서 싸우다가 죽어버리면 세상 모르고 그만이지만. 안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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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훌쩍훌쩍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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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위로할 말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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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그럼 우린 어디로 피난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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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자신 있게) 마님. 그렇게 심약한 말씀을 하시면 아니됩니다. 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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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않으신 애깁니다요. 하하하. 두고 보자고. 이놈들! 지난 임진년 난리 때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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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전라도 땅은 온전했읍니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께서는 남해 바다 뱃길을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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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티고 앉아 계신 터라. 그것을 이 옴싹달싹도 못했읍지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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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제 와서 말씀입니까요? 더구나 이곳 장성 고을까지? 까딱 없읍니다요.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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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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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깐 놈의 왜병들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래 온 땅덩어리를 죄다 덮고 넘을 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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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겠읍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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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들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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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림 반푼어치도 없읍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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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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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가 오한이 나서 이빨을 갈며 벌벌 떨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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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은 이를 보고 새삼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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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으흐흐! 아이고. 춥다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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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그 독한 놈의 이틀거리 병이 또 발작입니다요. 아이고, 이를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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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게 방으로 드십시요.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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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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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아이고, 추워라.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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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방안으로 들어가서 두꺼운 이불을 푹 뒤집어 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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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기씨부인 총총히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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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따라서 작금이와 도련님이 등장하고, 두 여인의 소쿠리에는 호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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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돼지감자가 담겨져 있으며, 도련님은 칡뿌리가 담긴 망태기를 메고 한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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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괭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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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이 괭이를 질질 땅에 끌고 천천히 걷는 폼이 걱정스럽고 겁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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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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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시부인이 태인박씨를 얼른 부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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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아이고, 성님 얼른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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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춥다.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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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밖에 나오시지 말고 방안에 누워 계세야지요. 어서요,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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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를 돌아보며) 너는 저 송기껍질 갖다가 푹푹 삶아서 잘 울궈내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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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를 부축하여 방으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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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예, 새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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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이 뽀로통하게 서 있는 소년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에 멘 망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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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벗겨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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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헤헤 도련님께서 칡뿌리를 아주 큰 놈으로 캐내셨군요! 아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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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다. 사내 장정의 말뚝만큼이나 큽니다. 헤헤. (작금이에게 눈치를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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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께서 잽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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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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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다가 어머님께 꾸중을 들으신 모양이죠? 아, 뭘 하고 서 있느냐? 얼른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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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먼지 털어 드리고 세술시켜야지. 도련님, 샘가로 가서 손발 씻고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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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씻으세요, 어서. 깨끗하게,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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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알았어요. 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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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이 뒤곁으로 돌아간다. 작금이도 소쿠리 등을 챙겨서 뒤따라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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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은 칡뿌리를 토방 가에 내어놓고, 망태기와 괭이 호미 등을 한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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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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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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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윽고, 기효증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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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안에 어른 계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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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반갑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어른신! 이거 어쩐 걸음이십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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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할아범은 잘 지내셨는가? 그래 집안에는 별일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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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예, 예. 그저 모든 것이 어르신들의 원념지덕으로 허허허.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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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으로 쫓아가서) 새아씨, 새아씨! 새아씨, 저 너부실(廣谷男) 큰오라버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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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림하셨읍니다요? (기효중에게) 어서 마루로 오르시지요,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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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고마우이, 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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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이 방문을 열고 나타나서 토방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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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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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총히 내려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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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큰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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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애기는 어디, 밖으로 놀러나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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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아, 아니옳습니다. 시방 저 뒤꼈에서 소세중이랍니다요. 소인이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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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 여쭙겠읍니다. 허허허! (총총히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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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친정 어머님이랑 조카와 올케들 모두 무탁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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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늙으신 어머님께서는 오로지, 밤낮없이 네 생각만으로 노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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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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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불효여식,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라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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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물론 네 남편 김서방한테서는 상기도 소식 없겠지? 풍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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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을귀만한 무슨 기별 같은 것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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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머리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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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벌써 4년 전 일을 가지고, 어찌 그 위인을 산 목숨이라고 훗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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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으랴만,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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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오라버님? 바깥세상 돌아가는 형세나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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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소식 못들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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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무슨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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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저 경상도 거제섬 칠천랑(漆川深) 한 싸움에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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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도수군(三道水軍)이 대참패를 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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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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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저런? 어쩜 그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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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엊그제 칠월 열엿새 날에 일어난 일인 모양인데, 통제사 원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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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자리에서 순국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정수사 최호(崔湖)장군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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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전사했다는 게야. 모를면 모르지만, 이번엔 전라도 땅이 온전히 못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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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다. 지난 임진년과도 또 달라서, 이번에는 왜병들의 목표가 이곳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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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이라는 풍문이 있으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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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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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그래서 오래비는 시방, 건너마을 오천공(鰲川公) 어른을 찾아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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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란다. 나라가 있은 연후에 내 집안이 있고, 군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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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은 연후에 신하가 있는 법. 장부가 어찌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두더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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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어서만 지내랴! 그건 그렇고, 어린것과 함께 네가 친정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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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것이, 늙으신 어머님의 당부 말씀이셨다. 이 큰 대가집에서 얼마나 외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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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적하겠느냐? 그러니까 너 부실 친정으로 건너와서, 한동안은 우리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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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이들 지내는 게야. 이 큰오래비도 어머님,말씀을 따라서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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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젓는다) 옛말에 이르기를,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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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가영(女子許嫁纓)이면 비유대고 불입기문(非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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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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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故 不入其門)이라고 배웠읍니다.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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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무론 여자가 한번 혼인을 하였으면, 큰 변고가 없는 한 친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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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턱을 드나들지 아니한다는 말을 왜 모르겠느냐? 허나 지금의 네 처지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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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편은 사믓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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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지금 집안에서 작은 우환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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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그건 또 어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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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큰동서님이 저렇게 병중이예요, 오라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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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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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이틀거리에 걸린모양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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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그 무섭고 독한 학질병말이냐? 그놈으 역병이 작년 여름에는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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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를 휩쓸어서 수천 수만 사람을 죽게 했어요! 우선 네 시어머님과 조카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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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앗아간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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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담담하게) 그래요. 오라버님도 아다시피, 큰동서는 일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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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과수로서 딸자식 하나를 믿고 수절해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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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를 지난 여름 잃어버리고 나서부터는 크게 사람이 변하고 달라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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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사에 의욕을 잃고 혼자서 웃다가 울다가 망연자실해하기도 하고,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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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답니다. 그러다가 저렇게 작년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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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와 똑같은 병에 걸리셨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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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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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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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그럼 실성이라도 하셨단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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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반드시, 꼭 그렇진 안습니다,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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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듣기 민망하고 참으로 딱한 일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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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러니 종들에게만 일을 맡길 수도 없는 것! 그러고 또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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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 떠난 지아비가 어느 날 불쑥 찾아들기라도 할라치면, 그 아내와 자식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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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소곳이 집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도리요 정 아니겠읍니까, 오라버니? 지아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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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왔을 때, 집안에서 찬바람이 불면 안되는 일이지요! (다정하게 오라버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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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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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이 다가와서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두손을 감싸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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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오누이의 끈끈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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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네 심지가 한없이 곱고, 뜻이 갸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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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고마워요, 오라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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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까칠까칠, 고왔던 손이 다 헐고, 손가락 마디마디 파랗게 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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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지로구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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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미소 지으며 손을 뽑아 뒤로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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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오래비가 한가지 신칙할 일은, 사세 여차즉하면 지체말고 너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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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정으로 건너오도록 해라. 이번에야 말로 피난을 떠나야 할일이 발생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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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르는 것. 미친 개떼는 피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 저것들이 일진광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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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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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뿐이야. 그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옆으로 비껴서기만 하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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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예에, 오라버님! 명심하겠어요. 오라버니 참, 점심 요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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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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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염려마라. 먹고 왔다. 지금 부실 집에서 황룡랑 나루를 건너서 곧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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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는 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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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윽고, 도련님이 반갑게 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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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이 덥썩 안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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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큰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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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오냐, 반갑다. 우리 도련님 잘 있엇느냐?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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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머리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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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외할머니께서 너를 보고 싶어하시더구나. 무척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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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그럼, 나룻배 타고 강 건너서 가지, 머. 그렇지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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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허허허. 요즘 네가 읽고 있는 책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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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소학)(小學)입니다. 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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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그래. 글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 저기 칡뿌리를 단물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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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까지 씹듯이 읽고 또 읽어서, 네 몸과 마음에 양식이 되도록 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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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벌써 네번째 읽고 읽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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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옳거니! 하하하, 기특하구나. (기씨부인에게) 아무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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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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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조심하기를 바란다. (다시 도련님에게) 아가, 오늘! 외삼촌이 긴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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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어서 가고, 훗날 다시 와서 네가 글 읽는 모습을 똑똑히 봐야겠어?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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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내대장부 비록 어리다고는 하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앞장서서 네가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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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봐야 한다. 무슨 말뜻이지 알아 듣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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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당당하게) 예에 잘 알겠읍니다. 큰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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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효증] 하하하. (기씨부인에게) 나는 이만 건너가 봐야겠다. (돌아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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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부디 평안히 살펴가십시오, 큰오라버님! (공손히 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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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이 아들을 돌아보자, 소년은 금새 풀이 죽어 움츠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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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다정하고 엄하게) 어미에게 고할 말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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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아까 산에서는 소자가 잘못하였읍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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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저 큰 칡뿌리를 처음으로 찾아낸 것은 분명히 네가 아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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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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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렇다면 어찌 네 것이라고 우기고, 동네아이들과 다투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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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작금이가 한사코 큰소리쳐서, 소자도 욕심이 나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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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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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나는 필시 양반 선비의 자식으로서 동네 아이들한테 위세를 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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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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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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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시비곡직을 따져서 대답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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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소자 잘못되었사옵니다,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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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렇다면 종아리를 맞아야지! 무릇 선비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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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굽어봐도 한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마루로 올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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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이 마루로 올라가 선반에서 회초리를 챙겨들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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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도 따라가서 그녀앞에 종아리를 걷고 다소곳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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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가 뒤꼈에서 총총히 등장하여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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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쇤네 이 못돈것 잘못입니다. 새아씨, 도련님께서는 잘못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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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라리 이 년의 종아리를 때려 주옵소서. 잘못했사옵니다, 새아씨님!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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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들은체도 않고 아들에게) 네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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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또렷하게) 개국공신 홍려부원군 온(興麗府阮君 穩) 할애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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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세손으로 문정공 하서(文正公 河西) 어른의 증손이며, 대자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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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봉(高峰奇大代)선생의 친외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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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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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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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남자 증자 김남중(金南重)이옵니다. 지난 계사년 진주성 싸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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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선생과 함게 의병을 거느리고 참전하신 후 행방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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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껏 생사 불명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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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삼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임금님을 몰아내자, 조카 옛날 기건(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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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버지께서는 그 불의와 패륜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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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중에 임금이 된 수양은 할아버님의 학문과 덕망을 아껴서 세 차례나 다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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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슬살이를 권했느니라. 그래도 할아버지는 눈먼 장님 흉내를 내면서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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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절하고 한사코 응하지를 않으셨지. 그러자 세변째로 찾아온 수양 임금은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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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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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바늘을 가지고 두 눈을 꼭 찌르는 척 시험해 봤으나 눈알을 깜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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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않는지라, 그제서야 수양 임금님은 굳은 뜻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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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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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장부가 똑바로 두 눈을 크게 뜨고, 행여 눈물을 짜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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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박거려서도 아니되느니라! (회초리를 들어서 내리친다. 셈을 하면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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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 셋,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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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은 까닭없이 서 있고, 작금이는 울면서 어쩔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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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이 한쪽 구석에 나타나서 이 모양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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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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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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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달 뒤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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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 여서넛이 곡식 가마니를 갖고 뒤곁에서 돌아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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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간다. 한 사내는 집으로, 또 하나는 한쪽 어깨에 들쳐메고, 다른 장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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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게에다 세 가마니씩 포개서 높이 지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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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은 한쪽에 엉거주춤 서서 가마니 숫자를 헤아리고, 작금이는 절구방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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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찢다말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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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퉁명스럽게) 아이고,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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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운 곡식 가마니를 다 가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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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이 사람들아, 조심 조심들 해. 곡식 쏟아질라. 보리쌀 한 틀이 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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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값이란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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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1] 허허허. 염려 놓으십시오, 영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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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자린고비로 아끼고 아껴서 모아놓은 양식을 그래--- 호박씨 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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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입에 탁 털어넣기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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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불평은 무슨 놈의 불평? 잔말하지 마라, 새아씨의 깊은 뜬을 네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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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년이 알아? 저 안에 오천공 어르신이 들으시면 혼줄난다. 이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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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우리 식구 먹을 것도 없이 다 주는 거예요. 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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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지난 임진년 때같이 오천공 어르신께서 남문(南門)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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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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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에다가 창의소(昌義所)를 설치하셨다는 것 아니냐? 저 남원성(南原城) 함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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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보를 듣고는 분연히 일어나서 다시금 또한 례 궐기를 하신 것이지. 오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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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른으로 말하면 이 집안의 삼종조(三從祖)뻘되는 문중 어르신이고, 그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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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때같은 두 아드님 역시 진주성 싸움에 나갔다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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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천지한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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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아이고, 저 지긋지긋한 왜놈들! 귀신이 무얼 먹고 살지요?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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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놈들 잡아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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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남원성은 온통 불바다가 되고 쑥대밭이 됐다는 게야, 한꺼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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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민(官民) 만여명이 떼죽음으로 몰살을 당했고, 그 경치 좋은 광한루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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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헌(東軒)관아와 용성관(龍城館) 객사, 만복사(萬福寺) 큰절이 죄다 불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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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줌 재로 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남문 창의소를 설치해 놓고 의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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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곡(義穀)을 수집하시는 중 아니냐? 흩어져 있는 장정들을 모집하고, 좁쌀,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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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 같은 군량미를 스스로 거둬들이고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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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근심되어) 할아범, 그렇다면 우리 마을은 온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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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쓸데없는 생각말고, 너는 어서 네 할일이나 해! 아까 새아씨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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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슨 분부를 내리시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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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알고 있었다고 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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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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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뒤안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작금이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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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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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 맞추어, 다른쪽 안에서 오천공과 기씨부인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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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제가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할것을 이렇게 오시도록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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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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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구스럽사옵니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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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감동하여) 갸륵하고 고마운 일! 참으로 뜻밖이구나,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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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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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변변치 않게 부끄럽니다. 아무래도 저 들에서 햅살이 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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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에 풀칠은 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들도 좀 생각해서 남겨놓고 보니,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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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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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무슨 소리? 너희들도 양식이 딸려서 초근목씨로 근근이 연명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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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들었더니, 그처럼 많은 양곡을 광 속에다가 비축하고 있었다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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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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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이웃이 헐벗고 굶주리는데 나 혼자서만 배불리 잘먹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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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륜이 아니며 도리가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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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그래, 그래. 남읍할 일이로다. 국란사양상(國亂思良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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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빈사현처(家貧思賢妻)라더니. 바로 두고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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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런 말씀 마옵소서, 어르신, 일찌기 나라와 임금님 은혜를 두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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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은 사대부 집안에서 한껏 염치없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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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역병과 흉년으로 백성이 곤핍하여 이 지경이니, 비록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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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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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과 뜻은 있다 하나 좁쌀 한 바가지 기꺼히 내놓을 집이 아무 데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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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식을 나라에 바친다든지 소나 말 혹은 군비에 쓸 쇠붙이 같은 것을 내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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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에게는 그 종의 신분을 풀어주고, 양민한테는 상과 벼슬을 내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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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납속령(納粟令)을 조정에서 발표해도, 도무지 갖다바치는 자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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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냐? 지난번 창의 때와는 형세가 사뭇 다르다. 때에 우린 1천6백여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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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을 모을 수가 있었고, 의곡 숫자도 자그만치 496석이나 됐어요. 그래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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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량미 3백석과 세포(細布) 열다섯필은 법성포(法聖浦)에서 배를 타고 저 임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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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신 의주(義州) 행재소까지 나아갈 수가 있었고, 또 경상도 의령 땅에서 창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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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의장군 곽재우(郭再佑)에게도 1백석을 보내줄 수 있었지. 때에 네 큰오래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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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곡장(義穀將)이 돼서 너도 아다시피 큰 공훈을 세운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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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다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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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어르신 말씀들었읍니다. 전부 헤아려 보니, 묵은 쌀로 나락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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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마니하고, 좁쌀 반가마, 방아 찢지 않은 겉보리가 서른 두 가마니 옳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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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고맙네. 가서 일 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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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예에- (다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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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풍설에 듣던대로 왜병은 고성곤과 사천 하동을 지나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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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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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강을 건너 우리 전라도 쪽으로 처들어왔다. 그래가지고 순천과 낙안 주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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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쳐서 저렇게 남원성을 나흘밤에 유린하고는, 전주성으로 곧장 향하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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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이순신 장군께서는 다시 통제사에 복위하셨다는 소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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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었읍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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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열백번 잘된 일이지. 허나 배를 죄다 잃어버렸는데 무얼 가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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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워? 빈손, 두 주먹으로? 하늘이 무심하고, 참으로 통분할일! 그 어른은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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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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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수영으로 들어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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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어르신을 되올 때마다 애통하고 민망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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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이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초개같이 죽어간 자식들. 나야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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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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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이라고 잊을 수도 있겠다마는. 생사도 모르고 지내는 젊은것 네가 더 안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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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뿐만이 아니다. 작년 한해에는 시어머니와 조카딸을 잃고 두 초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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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꺼번에 치르더니만, 올봄에는 또 시아버지가 뒤따라서 홧병으로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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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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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렸으니, 생각하면 선영님네도 너무 하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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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다만 한가지, 불민사고 미거한 생각으로 행여 법도에 어긋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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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을까. 항상 저어될 뿐입니다.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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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아암, 그래야지!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네 고초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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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구나. (밖으로 나가며) 그러고, 참. 네 큰오래비 기효증이는 갓바우산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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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성장(守城將) 윤진(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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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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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軫)을 만나보고 나서, 순창과 정주 방면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하고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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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나절에 떠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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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보살펴 가십시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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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큰기침하며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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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총총히 돌아서 비를 들고 두어 번 마당을 쓸어낸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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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손이 잡히지 않는듯 마루에 걸터앉아서 나물 바구니를 안고 나물을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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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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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는 다시 일어나서 마당가의 절구통으로 간다. 절구대를 들고 서너 번 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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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아로 찧어본다. 그러다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망연히 시름에 젖는다.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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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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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으로 돌아가는 새떼들의 요란한 지저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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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소리) 한갓 미물 새떼들도 제 깃을 찾고자 저렇게 시끄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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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바람 가을비 4개 성상입니다. 오늘밤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발 뻗고 누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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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수시는 것은 또 어떠하신지요? 입고, 벗고, 계절마다 갈아입으실 의복은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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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름하며, 조석 수발은 누가 곁에 있어 받드옵이까? 꿈속에서라도 받들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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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니다. 꿈이라 말고 생시처럼 보이소서. 부디, 자주 자주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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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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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닭이 꼭기오! 홰를 크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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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은 머리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 버리고 퍼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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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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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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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에다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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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할아범! 할아범? 할아범. 어디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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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예에- 부르셨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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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쪽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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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아무래도 생각해 봤는데. 광속에 있는 나머지 곡식은 다른 장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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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옮겼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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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무슨 뜻입니까, 새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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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시부인] 땅속에다가 나눠 조금 감추든지- 저 대밭 속에다말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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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아, 예에. 난 또 무슨 분부시라고- 허허허. 옳으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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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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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금 세상이 뒤숭숭하니까 혹 좀도둑이 들끓지도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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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다면 대밭 속에 묻어놓은 쌀독이 한섬 반짜리는 너끈하니까.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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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쪽으로 퍼다 붓도록 합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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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우리 그렇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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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작금이가 빈 자루와 소쿠리를 끼고 총총히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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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다녀왔읍니다. 새아씨. 분부대로 보리쌀 두 말은 저 화순댁 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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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멈 집에 주고. 또 쌀 한 됫박과 보리쌀 두말은 거꾸리네 어미한테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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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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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거꾸리네 집 산모는 어떻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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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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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말도 마십시오, 너무나도 불쌍해서- 참말로 목불이견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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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먹만한 핏덩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쪽에 팽겨쳐져 있고, 애기엄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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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뭇동만하게 퉁퉁 부어올라서 부황이 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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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래 됐다. 그만 해. 우선 너는 저녁 준비하고, 저 찧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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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방아도 마저 찧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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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예, 새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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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은 할아범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작금이는 반대편으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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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와 도련님 등장. 태인박씨는 등에 업고 우쭐우쭐 춤추듯 하고, 소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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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아서 낄낄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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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아가아가 우리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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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자동아 은자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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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논에는 나락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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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텃밭에는 콩을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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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아가 우리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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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히히! 그만 그만- 그만 됐어요. 큰어머니. 어머니가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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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난단말야. (마당가의 평상에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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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호호호! 큰어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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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무슨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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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저기 붓바우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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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그 붓바우에서 정기를 타고 우리 하서(河西) 할애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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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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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어나셨다는 말? 그런 얘기는 하도 여러번 들어서 나도 안단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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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그러면 저 너머 황새골 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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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큰어머니 들어봐여, 엉? (헛기침을 하며) 에헴! 저 마을입구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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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밖에 지금도 서 있는 붓바우는, 붓필자 바우암자. 필암(필암)이라는 바우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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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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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에 이 마을에는 김도령과 이도령이라는 두 책방도령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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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가지고는 으음. 마음씨 착한 김도령과 심술굿은 이도령이 과거를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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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속 암자에서 3년 동안 열심히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하얀 백여우 한 마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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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밤 김도령 앞에 나타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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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맞다. 그래! 호호호. 그래가지고 그 백여우가 좋은 붓 한자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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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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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주면서 말이, "이 붓은 내 털을 뽑아사 만든 여우붓입니다. 김도령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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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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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붓으로 부디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옵소서", 그래서 김도령은 이 붓을 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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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직하고 과거보는 서울로 올라갔단다. 그런데 과거보는 바로 전날 밤, 심술궂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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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도령은 김도령이 잠든 틈에 몰래 그 붓끝을 싹둑 잘라버렸거든? 아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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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깝지 뭐냐! 김도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과거장에 나가서 붓을 찾으니, 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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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가져서 아무짝에도 못쓰게 돼버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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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짓 슬프게) 그러자 김도령은 내 붓! 내 붓! 하고 소리치다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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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쳐버렸다고, 한편 백여우는 마을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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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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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 있는 바우에 앉아서 김도령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지, 아무리 기다렸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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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도령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거든? 그러자 백여우도 김도령을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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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안먹고 바우만 핥다가는, 그대로 지쳐서 죽어버리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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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냐 재미있고 참 슬프지?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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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그런데, 이도령은 과거 시험에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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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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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무슨 소리냐, 아가? 심술궂은 사람은 잘되는 법이 없다.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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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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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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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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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불쑥) 너는 누가 더 좋으냐? 이 큰어미 하고 네 어머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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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두 사람 다 좋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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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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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아니야. 그래도? 눈꼽만큼이라도 조금 더- 얼른 말해 봐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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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 어서? 큰어머니가 더 좋지? (열심히 졸라대고 응석부리는 아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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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큰어머니 염려말아요. 내가 장성하면 두 사람한테 모두 효도 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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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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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덥썩 쓸어안으며) 아이고 착한 내 새끼야! 그러면 그렇지. 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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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어머니 박대하면 안된다. 아가, 엉? (갑자기 시무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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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큰어머니 또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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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이 뒤안에서 등장하여 이 광경을 안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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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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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골똘하여) 그런데 우린 피난을 어디로 가면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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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피난은 왜,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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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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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시방 저 왜것들은 가는 곳마다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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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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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빼앗고, 또 여자는 집탈하고 남자는 붙잡아서 자기들 길잡이로 만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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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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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냐? 아이고, 무섭고 겁난다! 겁나지, 아가? 우리 새끼는 안된다. 안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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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끼한테 무슨 일 나면 안된단 말이다. (공포와 불안으로 벌벌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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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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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네 어머니가 날 떼놓고 가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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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볼멘 소리로) 왜? 무슨 말예요. 큰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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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내가 이렇게 아프고, 하는 일도 없으니까말이다. 너희들끼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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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난가면 나는 죽는다. 죽어! 우리 새끼는 안그렇지? 그렇지, 아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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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어미한테 얼른 대답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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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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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안타깝게 다가와서) 철부지 어린것을 데리고,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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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아니어! 아무것도 아니어. 그냥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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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한테는 미안하구먼! (돌변하여 새침을 떤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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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가까스로) 몸이 약하시니까 마음도 약해진 거예요! 피난은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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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떠난다고 그럽니까? 아까 오천공 어른 말씀이고 우리 장성 고을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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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갓바우산성만 온전하게 지켜진다면 괜찮답니다. 형님. 아무 염려말고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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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놓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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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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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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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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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다가와서 그녀를 가만히 쓸어안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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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여인의 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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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은 우두커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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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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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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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 제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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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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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칠 뒤,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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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름 지난 둥근 달이 휘영청 밝고, 이따금 부엉이소리와 멀리서 늑대의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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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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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이 마루에 앉아서 기름불 아래 글을 읽고 있으며, 그 옆에는 기씨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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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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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여자는 칡뿌리를 쪼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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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는 마당의 평상에서 밝은 달을 바라보며 망연히 시름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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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글을 읽는다) "강절 소선생(康節邵先生)이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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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야자(吉也者)는 목불관비례지색(目不觀非禮之色)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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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불청비례지성(耳不聽非禮之聲)이며, 구불도비례지언(口不道非禮之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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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불천비례지지(足不踐非禮之地)니라." 강절 소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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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은 눈으로는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예가 아닌 것을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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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않으며, 입으로는 예가 아닌 것을 밟지도 않느니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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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구슬픈 목소리로 천천히 노래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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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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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아딸아 양념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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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만 곱게 잘만 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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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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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동나무 밑장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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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갖은 장석 달아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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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은 곳에 논을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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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얕은 곳에 밭 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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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가 소리없이 일어나서 뒤안으로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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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조용하게) 삶은 칡뿌리 더 내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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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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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만둬라!(혼잣말로)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청아하게 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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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방도령의 글읽는 목소리 얼마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정경이 겠느냐!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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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돋구어서 크게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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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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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선비가 책을 놓아서는 아니된다. 난리는 잠시잠깐이고 글공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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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이까짓 난리가 제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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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평생이야 가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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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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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깊이 명심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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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밤하늘을 본다. 소리) 뒤곁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듣고 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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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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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자국 소리인가 하고, 동구 밖 나뭇그림자를 보고도 님의 그림자인가 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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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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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게 뜨고, 발돋음을 해봅니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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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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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어머니, 한번쯤 여쭤봐도 되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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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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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 (머리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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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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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아버님은 정말,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목숨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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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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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담담하게 남의 얘기처럼 이어간다) 그걸 뉘라서 어찌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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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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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에 진주성이 무너져 초토화되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부로(포로)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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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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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끌려갔다고도 하니 한가닥 소망을 걸어볼 수 있겠다마는--- 생사간에 기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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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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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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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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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소자가 이렇게 큰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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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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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아무렴, 그러시겠지. 아버님 얼굴을 너는 기억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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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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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머리를 갸웃하며) 똑똑히 자신할 순 없지만, 멀리서 봐도 단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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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알아맞힐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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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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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고맙다. (사이) 가만히 생각하면, 이 어미의 죄가 너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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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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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무슨 말씀이예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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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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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내가 정성이 부족하고 시부모님 봉양을 잘봇한 탓으로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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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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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리게 하셨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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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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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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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집안에 있는 아녀자로서 죄가 크고, 돌아와서 아시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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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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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통하고 망극해 하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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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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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반드시 어머니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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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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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자가 낱낱이 고해서, 잘 알아듣도록 말씀드리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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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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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어머니, 외할머니 얼굴 보고싶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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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왜? 너부실 외가집에 가서 외할머니랑 만나보고, 외사촌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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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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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고 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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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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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너부실 동네 가면 집 앞뒤로 감나무도 많고, 큰 대추나무도 하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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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지요? 참말로 오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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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감나무는 우리 집 뒷밭에도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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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그런 감나무 말고, 입에 넣으면 사근사근 녹는 아주 달고 맛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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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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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감이랑, 또 이렇게 큰 장두감도 있단말예요, 너부실 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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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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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래애. 대추나무에는 엄지손가락만큼씩이나 큰 파란 대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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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골지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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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으응-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둘째 외삼촌 막내 외삼촌이랑 냇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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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가서 모래무지와 대사리(다슬기)도 잡아보고- 대사리는 삶아서 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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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아먹으면 참 맛있거든? 그러고 또 이렇게 집게 달린(손가락으로 흉내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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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재란 것 있지요, 어머니? 가재란 놈은 물속에다 두 손을 넣고 이렇게 살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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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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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금방 뒷걸음질로 도망쳐 버린단 말야. 얼마나 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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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른다니까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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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왜 웃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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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내가 가재한테 물려서 엉엉우니까, 어머니가 쫑아오다가 물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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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넘어졌지요? 그래가지고는 발을 다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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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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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래. 그때 이 어미가 돌에 미끄러져서 한쪽 발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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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었었지!(가만히 미소 짓는다) 인제 얼마 아니면 가을 추수니까, 가을걷이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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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나고 나면 우리 애기 너부실 집에 보내 주마! 뒷동산에 올라가서 알밤도 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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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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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어미닌 함께 안가고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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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어미는 항시 집안 일이 바쁘단다. 그러니 작금이 하고 갔다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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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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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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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그렇다면 차라리 작금이는 말고,할아범하고 같이 가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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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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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건 네가 알아서 정할 일. 네 뜻과 생각대로 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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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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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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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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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은 어머니도 기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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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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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래, 그래. 기특하구나! 호호호- (모처럼 흐믓해 하며, 소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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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엉덩이를 도닥거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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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오늘은 어머니도 기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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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통제사 이순신 장군께서 대승첩을 거두었다는 소식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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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저 해남 울도목(嗚@) 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때려부셨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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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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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장하고도 장하신 일이지. 육전에서는 늘상 패하고 달아났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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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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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프고 언짢은 소식뿐이더니만, 기어히 한번 우리가 크게 이기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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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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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나랏님께서도 좋아하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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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죽어간 혼령들도 기뻐하고, 천하만민 모두가 감읍할 일이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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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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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해해. 이 나쁜 놈들 혼찌검이 났을게다! 두고봐라. 왜병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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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두 여인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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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는 뒤곁에서 크게 소리치고, 태인박씨는 평상에서 벌떡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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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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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도 벌떡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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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소리) 아그머니나! 누구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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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 아니, 저저--- 누구냐!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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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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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뭣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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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박씨가 마루로 달려오고, 작금이는 쫑겨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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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따라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 의병을 가장한 5,6명의 칼든 도둑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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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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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1] 잔말 말고 조용히들 해요!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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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앞으로 나서며, 서릿발 같다) 자네들은 아닌 밤중에 아녀자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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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는 집에서 이 무슨 행악 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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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2] 우리는 나라와 임금님을 위해서 일어난 의병들이오. 광문 열고 곡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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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물들을 내놓으시오. 갈길이 바쁘오 어서, 속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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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어느 고을에서 창의하신 의병들이란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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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2] 저 담양 땅에서 일어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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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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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행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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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2] 갓바우산성으로 들어가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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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그렇다면 내 어찌 돕지 않으리. 잠시만 기다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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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방으로 총총히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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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 (당당하게) 이 댁이 누구에 집인 줄도 모르는가, 자네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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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3] (본색을 드러내고) 흥, 선비 뼈다귀라고 큰소리치고, 그래도 하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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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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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4] (비양거림으로) 왜 모르겠소? 하서 김인후선생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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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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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댁이지. (다시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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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광 열대를 갖고 다시 나와 소년을 막아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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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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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열쇠를 손에 들어보이며) 광 열대가 여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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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2] (다가서며 열쇠를 나꿔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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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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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한가지 더 묻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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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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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2] 뭐요? (주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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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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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시부인] 의병 직첩은 누구로부터 받았으며, 창의대장 함자는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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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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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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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2] 아니--- 정말 빡빡하기요,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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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추상같이) 자네들은 지금 두 번 죄를 짓는 것, 첫째는 의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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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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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자했으니 의와 예를 어김이요. 둘째로는 민가를 약탈하고자 함이니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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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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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의 국법을 어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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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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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4] (뱉듯이) 젠장, 사대부 양반놈 등쌀에 나라가 이 꼴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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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것이란말이어! 흥, 양반놈 꼬락서니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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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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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3] 자, 싸게 싸게 해치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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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1] 꼼짝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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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아이고, 사람 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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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1, 마루로 훌쩍 뛰어올라가서 칼을 들이대고 태인박씨와 작금이를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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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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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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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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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은 수치와 분노 속에 그제서야 참았던 설음을 터뜨리며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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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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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을 힘껏 끌어안고-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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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무대 뒤를 달려가고, 외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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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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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난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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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갓바우성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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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갓바우산성이 함락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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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난 나가자! 피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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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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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이, 새삼 정신을 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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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기씨부인] 아가, 지금 저 소리가 무슨 뜻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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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도련님] 갓바우 산성이 무너졌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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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할아범] (뛰쳐 들어오며) 새아씨, 피난을 가셔야겠읍니다. 피난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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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왜병들이 우리 장성 고을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읍니다요.
| |
− |
| |
− | [기씨부인] (되씹으며) 피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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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할아범] 무슨 봉변이 있을지 모르는 일! 얼른 서두르십시오. 더 늦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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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전에, 때를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도련님이랑 저 병약하신 마님을 데리고,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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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이상 머뭇거리고 지체할 때가 아닙니다, 새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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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어서요, 싸게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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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기씨부인] (가까스로) 그래요! 강 건너서 너부실 친정으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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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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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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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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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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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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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씨부인, 꽂꽂이 일어나서 주먹을 힘있게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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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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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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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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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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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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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 나루터가 있는 정자(亭子),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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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띠로 지붕을 이은 허름한 정자에 <만취정(晩翠亭).이라는 퇴락한 글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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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편액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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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만취정 왼쪽은 아래쪽으로 나루터에 이어지고, 뒤쪽(무대 안쪽)은 곧장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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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낭떠러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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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도련님과 작금이는 정자 바닥에 걸터앉아 마을 쪽을 바라보며 쉬고, 할아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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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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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루터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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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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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할아범의 지게 위에는 봇짐이 놓여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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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할아범] (소리쳐 부른다) 사공! 여보시오, 사공님. 뱃사공님 이쪽이요, 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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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기씨부인이 태인박씨를 부축하고 올라와서 정자에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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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기씨부인] 다 왔읍니다, 성님. 앉아서 좀 쉬세요.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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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태인박씨] --- (절망적으로 겁먹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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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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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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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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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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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멀리 바라보며) 아이고, 사람들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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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도련님] 어디, 할아범? (쫑아간다) 저기가 어디죠?
| |
− |
| |
− | [할아범] 바로 꽃바우 나루터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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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피난민들이 잔뜩 몰려있는뎁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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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도련님]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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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할아범] 시방 나룻배가 건너가고 있으니까, 금새 돌아올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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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기다리십시오 잠깐만, 새아씨.
| |
− |
| |
− | [기씨부인] 할아범도 우리와 같이 가도록 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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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할아범] 웬걸요? 나루터에서 배 타신 것까지만 보고는, 저는 집으로
| |
− |
| |
− | 돌아가겠읍니다. 제깐 놈들이 이 늙은것까지야 어떻게 할라구요? 이럴 때일수록
| |
− |
| |
− | 집에 앉아서 도적놈들도 지켜야지요. (멀리 본다)
| |
− |
| |
− | [기씨부인] 고마운 생각이시네, 할아범. (작금이에게) 그쪽은 내려다 보지
| |
− |
| |
− |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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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작금이] 시퍼런 강물이 넘실넘실, 아찔하고 겁이 납니다, 새아씨
| |
− |
| |
− | [기시부인]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조심해라.
| |
− |
| |
− | [태인박씨] 아이고- 무섭고 무섭다!
| |
− |
| |
− | [기씨부인] 성님, 마음을 크게 잡수세요.
| |
− |
| |
− | [태인박씨] 무섭다! 무섭다!
| |
− |
| |
− | [기씨부인] 미친 개떼는 피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살째기
| |
− |
| |
− | 옆으로 비껴서기만 하면 돼요.
| |
− |
| |
− | [태인박씨] 무섭다! 무섭다!
| |
− |
| |
− | [페이지] 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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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기씨부인] 괜찮다니까요, 글쎄? 인제 강 건너서 너부실만 가면 됩니다. 강만
| |
− |
| |
− | 건너면 지척이예요. 저 아름답고 푸른, 언제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 |
− |
| |
− | 보이시죠? 자자, 힘을 내세요, 성님?
| |
− |
| |
− | 내가 이렇게 꼬옥 껴안아 드리겠읍니다!
| |
− |
| |
− | (가까이서 들리는 적의 함성과 총소리-
| |
− |
| |
− | 작금이가 마을 쪽을 바라보다 소리친다.)
| |
− |
| |
− | [작금이] 아이그머니, 우리 마을이 불타고 있읍니다, 새아씨!
| |
− |
| |
− | [기씨부인] 뭣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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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작금이] 온 동네가 불바다입니다. 저기요, 저기! 시꺼먼 연기가 하늘을
| |
− |
| |
− | 뒤덮고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 |
− |
| |
− | 아이고, 나 몰라아! (발을 동동 구른다)
| |
− |
| |
− | 태인박씨만 꼼짝 않고, 모두 분노와 슬픔으로 바라본다.
| |
− |
| |
− | [할아범] 저런 망종들 같으니라구!
| |
− |
| |
− | [도련님] 저쪽에, 왜병들이 논두렁을 기어가고 있읍니다. 어머니!
| |
− |
| |
− | [기씨부인] 배는 어떻게 됐는가?
| |
− |
| |
− | [할아범] 예, 나루터로 내려가 보겠읍니다요. (황망히 내려간다)
| |
− |
| |
− | (이어, 왜병 셋이 불쑥 나타나서 그들을 둘러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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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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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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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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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기씨부인] 괜찮다니까요, 글쎄? 인제 강 건너서 너부실만 가면 됩니다. 강만
| |
− |
| |
− | 건너면 지척이예요. 저쪽 너부실에 닿으면, 성님을 좀더 평안히 모시겠읍니다.
| |
− |
| |
− | 그동안 하느라고 했읍니다만 섭섭하고 불편한 점이 많으셨다면,제가 이렇게
| |
− |
| |
− | 용서를 빌겠어요. 모든 것이 어리석고 불민한 제 탓이었읍니다. 거기서는 일손도
| |
− |
| |
− | 많고 하니까 탕약도 우선 지어 드리고, 성님이 좋아 하시는 인절미 콩떡도
| |
− |
| |
− | 많이많이 해드릴께요.
| |
− |
| |
− | 자- 보세요, 성님?
| |
− |
| |
− | [도련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건너 산 밑에 보이는 마을이 너부실
| |
− |
| |
− | 동네입니다, 큰어머님.
| |
− |
| |
− | [기씨부인] 그래 맞다 아가! 그리고 언제나 유유히, 말없이 흘러 가는 이 푸른
| |
− |
| |
− | 강물도 잘 보이시죠, 성님?
| |
− |
| |
− | 저쪽 너부실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스런,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 |
− |
| |
− | 동네랍니다! 성님, 자자 힘을 내세요. 내가 이렇게 꼬옥 껴안아 드리겠읍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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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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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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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작금이] 아이그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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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왜병1] 잡았다! 잡았어. 헤헤.
| |
− |
| |
− | [태인박씨] 무섭다. 아이고, 무섭다.
| |
− |
| |
− | [왜병2] 각씨가 셋이다! 꼬맹이도 하나- 헤헤.
| |
− |
| |
− | [기씨부인] 썩 물러가지 못할까! 물러가거라, 이것들.
| |
− |
| |
− | 그들 포위망을 좁힌다.
| |
− |
| |
− |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 |
− |
| |
− | 태인박씨는 비명을 지르며 벼랑 아래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도련님과
| |
− |
| |
− | 작금이는 각각 잡혀 나가며, 기씨부인도 손목을 잡혀 필사적으로 반항한다.
| |
− |
| |
− | [도련님] 놔라, 이놈들아! 놔아-
| |
− |
| |
− | [작금이]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 |
− |
| |
− |
| |
− | 기씨부인이 가슴에서 은장도를 뽑아들고 왜병의 팔을 내리치자 엉겁결에
| |
− | 손을뗀다.
| |
− |
| |
− | 동시에 할아범도 벽력같이 소리치며 왜병의 등 뒤로 긴칼을 들고 달려든다.
| |
− |
| |
− | 할아범은 지게 위으 봇짐 속에서 칼을 뽑아든 것이다.
| |
− |
| |
− | [할아범] 이놈- 이쳐죽일 놈!
| |
− |
| |
− | (마지막 왜병 하나가 기겁하여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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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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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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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할아범이 쫑아간다.)
| |
− |
| |
− | [할아범] (소리) 이놈들, 애기를 놓고 가거라. 애기를 놓고가! 애기-
| |
− |
| |
− | [기시부인] 아가! 아가! (긴 메아리)
| |
− |
| |
− | 기씨부인이 그자리에 기진하여 쓰러진다. 그러다가 번쩍 정신을 가다듬는다.
| |
− |
| |
− | 그녀는 자신의 한쪽 팔목(왜병에게 붙잡혔던)을 우심히 들여다 보며
| |
− |
| |
− | 소스라치게 놀란다. 경기를 하듯 몸을 부르르 떤다.
| |
− |
| |
− | 그녀는 바른손 소매끝으로 왼쪽 팔목을 닸아내고 또 닦아낸다. 때묻은 반점을
| |
− |
| |
− | 한사코 지우려는 듯이-
| |
− |
| |
− | [기씨부인] (소리) 부정한 손목이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섬
| |
− |
| |
− | 오랑캐의 징그러운 손바닥으로 찍혀진 이 더러운 반점. 콩알 만한 붉은 반점이
| |
− |
| |
− | 점점 커져서 온살갗으로 퍼지고, 마침내 피 속으로가지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 |
− |
| |
− | 아아, 부끄럽고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일. 나는 내가 나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 |
− |
| |
− | 피는 피로써 영구히 맑고, 길이길이 깨끗해야 하는 것. 이것은 내것이 아니다.
| |
− |
| |
− | 이미 내 손목이 아니야!
| |
− |
| |
− | 이윽고, 할아범이 등장하여 발 아래 엎드려 크게 운
| |
− |
| |
− | [페이지] 041
| |
− | 다.
| |
− | [기씨부인] 눈물을 거두고 내 말을 들어요, 할아범.
| |
− |
| |
− | [할아범] ---
| |
− |
| |
− | [기씨부인] 그 칼로 이 손목을 치시게!
| |
− |
| |
− | [할아범] 예?
| |
− |
| |
− | [기씨부인] 선비 집안의 피를 받고 태어나서, 한점 부끄럼없이 살기를 내가
| |
− |
| |
− | 바랬읍니다.
| |
− |
| |
− | [할아범] 무슨 청천벽력의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절대로 불가합니다요,
| |
− |
| |
− | 새아씨.
| |
− |
| |
− | [기씨부인] 아니면, 할아범 앞에서 내가 은장도로 자진하는 꼴을 보고싶다는
| |
− |
| |
− | 말이오?
| |
− |
| |
− | [할아범] 이런 무참하고 망극한 일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어찌 일어날 수
| |
− |
| |
− | 있겠읍니까?
| |
− |
| |
− | [기씨부인] 얼른 칼을 높이 드시게.
| |
− |
| |
− | [할아범] 새아씨, 늙은놈이 이렇게 빕니다!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을
| |
− | 돌리십시오.
| |
− |
| |
− | [기씨부인] (까딱없이) 자, 어서!
| |
− |
| |
− | 할아범이 울며 칼을 치켜든다.
| |
− |
| |
− | 그대로 내리찍는다.
| |
− |
| |
− | 아악-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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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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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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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장]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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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다시 만추정.
| |
− |
| |
− | 맑은 햇빛 속에 강물 소리 샘소리 온화하다.
| |
− |
| |
− | 남편 김남중과 큰오래비 기효증, 오천공이 할아범으로 부터 얘기를 듣고 있다.
| |
− |
| |
− | [할아범] 죄 많은 이 늙은것, 그저 능지처참으로 죽여주십시오, 서방님.
| |
− |
| |
− | [김남중] (비통하여) 그다음 얘기는?
| |
− |
| |
− | [할아범] 예에- 그런 다음에, 가까스로 몇 말씀 하더니만 눈깜짝할 사이에
| |
− |
| |
− | 그만, 저 푸른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셨읍니다.
| |
− |
| |
− | [김남중] 마지막 말은 뭣이라고 헛소?
| |
− |
| |
− | [할아범] 서방님 생사를 모르는 것이 첫째로 슬픈 일이다. 혹 이미 고인이
| |
− |
| |
− | 되어 이 세상 어른이 아니시라면, 백골이라도 찾아서 선영에 모시는 것이
| |
− |
| |
− | 도리이거늘, 그것을 못 이룬 것이 한이라고 하였읍니다.
| |
− |
| |
− | [김남중] (운다)
| |
− |
| |
− | [오천공] 그렇다면, 도련님과 작금이년 얘기는 틀림없으렸다?
| |
− |
| |
− | [할아범] 말씀 올린 그대로입니다, 어르신.
| |
− |
| |
− | [오천공] 허허, 기구한 운명이로고. 애비가 돌아오니가, 자식이 또
| |
− |
| |
− | 잡혀가다니!
| |
− |
| |
− |
| |
− | [페이지] 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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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김남중] 섬나라 왜국 땅덩어리를 임니가 본 데가 없읍니다, 어르신. 고생도
| |
− |
| |
− | 많이 많이 했구요. 그 어느 날이들, 집안 생각 안해 본 때가 있었겠읍니까!
| |
− |
| |
− | 오매불망, 정말로 그립고 그리웠읍니다.
| |
− |
| |
− | [오천공] 알겠다. 내가 알아.
| |
− |
| |
− | [기효증] (그를 위로하며) 어느 날인가 내가 친정 이야기를 꺼냈더니만,
| |
− |
| |
− | 그애가 하는 말이 이랬었네. "지아비가 돌아왔을 때, 집안에서 찬바람이 불면
| |
− |
| |
− | 안되는 일입니다. 어느 날 지아비가 불쑥 찾아들기라도 할라치면, 그 아내와
| |
− |
| |
− | 자식된 자는 다소곳이 집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 도리요, 정 아니겠읍니까,
| |
− |
| |
− | 큰오라버니?" 허허, 말이야 열백번 옳았지. 때에 내가 고집을 부려서라도
| |
− |
| |
− | 친정으로 데려다 놨어야 했네!
| |
− |
| |
− | [오천공] 그건 그렇지 않아요. 선비 집안의 외동딸로서, 그애는 문중법도와
| |
− |
| |
− | 체통을 잘 지키면서 산 것이네. (사이)
| |
− |
| |
− | (김남중이가 유골 상자를 안고 일어난다.)
| |
− |
| |
− | [오천공] 자, 저쪽 선영으로 올라가도록 하자. 비록 시신은 없고 팔뚝 하나만
| |
− |
| |
− | 묻었으니, 후인(後人)은 이를 "팔뚝 무덤"이라고 일컬으리라!
| |
− |
| |
− | 김남중을 선두로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나간다.
| |
− |
| |
− | [페이지]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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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소복 차림의 마을 사람들의 촛불을 켜들고 등장하여 줄줄이 그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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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천천히 움직이는 엄숙한 장례행렬-
| |
− |
| |
− | 晩歌(만가)의 구슬픈 가락이 느리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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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어노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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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어디 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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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황천길이 멀다해도
| |
− |
| |
− | 문지방 너머가 황천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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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어노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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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어디 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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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사람이 살면 천년을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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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육십 평생이 고작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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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서서히 막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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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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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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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년 정유재란 때의 전라도 장성의 안동마을. 여름~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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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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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南重(김남중)(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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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奇氏夫人(기씨부인)(28)......남중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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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련님......기씨부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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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泰仁朴氏(태인박씨)......기씨부인의 손위동서,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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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공 (鰲川公,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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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奇孝曾(기효증)(47)......기시부인의 큰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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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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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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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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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타 도둑 왜병 마을사람 등 5-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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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 및 공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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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 1986년 3월 13일~19일, 문예 회관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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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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