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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봉건제(封建制)는 정치·사회 체제의 한 형태이다. 고대 중국과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는 일부 공통성이 있지만 서로 상이한 제도이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하여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 정부가 지방에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달리 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이다.
 
봉건제(封建制)는 정치·사회 체제의 한 형태이다. 고대 중국과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는 일부 공통성이 있지만 서로 상이한 제도이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하여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 정부가 지방에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달리 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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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봉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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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서 작위가 보이는 걸로 보아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 했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건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 주나라가 사용한 제도다. 봉토를 하사하여 나라를 이루게 한다는 뜻으로 '봉건(封建)' 제도라고 불렀다. 후세의 사람들은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봉건을 봉방건국(封邦建國)으로 풀어쓰기도 한다. 방국에 분봉하고 나라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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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주인 천자가 공훈을 세운 자,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를 봉(封土)하여 나라를 세우게 한다(建國)는 개념이다. 왕은 중앙의 직할지(왕기, 기내, 중국)만 직접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제후에게 나눠주어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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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은 중세~근세에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여지는 Feudalism 통치와는 전혀 다른데, 사실 이 봉토라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주나라의 땅이 아닌, 화하족이 아닌 이민족이 들끓는 낯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즉, 땅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기 가서 식민지를 세워라. 잘 세워지면 대대로 거기 지배권을 줄게' 하는 것. 이렇게 분봉된 제후는 주나라의 가부장적 질서, 즉 종법 질서에 따라 주나라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문원이었으므로, 동성(同姓) 제후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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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주나라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이성(異姓) 제후라고 불리며 가문은 다르지만 주나라의 종법 질서에 편입되어 주나라 중심의, 중국 특유의 천하관에 끼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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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봉건"이라는 용어는 근대에 다시 언급되는데, 이때는 고대 중국사의 개념이 아니라 구미권의 의회정치에 대한 동아시아적 이해라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전제군주적 통치는 "군현"으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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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봉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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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봉건제는 헤이안 시대 율령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공지공령제 원칙에 따라 농민이 군사로 징집되어야하는데, 일본 조정의 행정 경험은 영 미숙했다. 지방관의 수탈이나 노역, 강한 세부담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본적지를 벗어나고 도망하거나 유력자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결국 율령제가 붕괴되어 토지의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개간지를 영구히 면세 시켜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결국 대귀족과 호족들이 장원을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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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정이 통제할 수 있는 농민들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붕괴되자, 지방 곳곳에 해적과 군당이 날뛰게 됐는데, 조정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하급 귀족 계층을 군정 일치의 지방관인 국사로써 파견했다. 이 중하급 귀족들은 일족 전체가 직업적인 전사 집단이 되었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무사의 시조가 된다. 또한 지방관으로써 파견된 이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형성하고 지방의 봉건 귀족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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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체제의 초창기 다이묘들도, 무로마치 체제의 슈고 다이묘들도, 에도 체제의 신반 ~ 도자마 다이묘들도 모두 막부라는 구심점하에 자신의 영지를 인정받고 협력하며 세습하는 봉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로마치와 에도 시대 사이 전국 다이묘 정도가 예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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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 대신 일본의 봉건제가 유럽처럼 쌍무계약의 형태로 존재했는가를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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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봉건제 당시 유럽 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일본의 농노제 다만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중국의 군국제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쇼군의 직할 영지가 300~400만석에 달한데다가 여기에 또 쇼군의 직속부하인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봉지도 그쯤 되었는데 전국시대 기준으로 일본 전토의 석고지만 그 당시에는 1700만석이었음을 감안하면 전국의 반 가까이 휘두르다시피 했다. 이는 봉건 제후를 세우지만 봉건 제후들은 몽땅 왕족들로만 세우고 또 기존의 봉건제와는 달리 직할지를 상당히 많이 늘렸던 군국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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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질적인 석고는 조금 달라서 예시를 들면 대마도는 실제 석고는 1만이 안 되었지만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감암해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고 홋카이도의 마츠마에 번은 너무 추워 쌀농사 자체가 안 되었지만 에조와의 무역으로 수익을 냈기에 마찬가지로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다. 이 외에는 많은 번들이 개간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실제 석고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심지어 조슈 번은 메이지 유신 즈음에는 공식 석고보다 실제 석고는 3배 가까이 되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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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군현과 더불어 사용되었는데, 이쪽은 정반대로 기존 정치구조를 "봉건"으로 칭하고 "군현"을 추구해야 할 새 정치제로 보았다. 이는 쇼군 하 다이묘로 권력이 분화되었던 점을 봉건에 대입하고, 근대 유럽의 중앙화 국가를 군현에 대입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심상은 "폐번치현"을 비롯한 관련 용어에도 반영되었다.

2022년 6월 14일 (화) 02:07 판


정의

봉건제(封建制)는 정치·사회 체제의 한 형태이다. 고대 중국과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는 일부 공통성이 있지만 서로 상이한 제도이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하여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 정부가 지방에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달리 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이다.

중국의 봉건제

갑골문에서 작위가 보이는 걸로 보아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 했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건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 주나라가 사용한 제도다. 봉토를 하사하여 나라를 이루게 한다는 뜻으로 '봉건(封建)' 제도라고 불렀다. 후세의 사람들은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봉건을 봉방건국(封邦建國)으로 풀어쓰기도 한다. 방국에 분봉하고 나라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천하의 주인 천자가 공훈을 세운 자,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를 봉(封土)하여 나라를 세우게 한다(建國)는 개념이다. 왕은 중앙의 직할지(왕기, 기내, 중국)만 직접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제후에게 나눠주어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중세~근세에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여지는 Feudalism 통치와는 전혀 다른데, 사실 이 봉토라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주나라의 땅이 아닌, 화하족이 아닌 이민족이 들끓는 낯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즉, 땅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기 가서 식민지를 세워라. 잘 세워지면 대대로 거기 지배권을 줄게' 하는 것. 이렇게 분봉된 제후는 주나라의 가부장적 질서, 즉 종법 질서에 따라 주나라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문원이었으므로, 동성(同姓) 제후라고 불린다.

한편 주나라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이성(異姓) 제후라고 불리며 가문은 다르지만 주나라의 종법 질서에 편입되어 주나라 중심의, 중국 특유의 천하관에 끼어들게 된다.

흥미롭게도 "봉건"이라는 용어는 근대에 다시 언급되는데, 이때는 고대 중국사의 개념이 아니라 구미권의 의회정치에 대한 동아시아적 이해라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전제군주적 통치는 "군현"으로 일컬어졌다.

일본의 봉건제

일본의 봉건제는 헤이안 시대 율령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공지공령제 원칙에 따라 농민이 군사로 징집되어야하는데, 일본 조정의 행정 경험은 영 미숙했다. 지방관의 수탈이나 노역, 강한 세부담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본적지를 벗어나고 도망하거나 유력자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결국 율령제가 붕괴되어 토지의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개간지를 영구히 면세 시켜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결국 대귀족과 호족들이 장원을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렇게 조정이 통제할 수 있는 농민들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붕괴되자, 지방 곳곳에 해적과 군당이 날뛰게 됐는데, 조정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하급 귀족 계층을 군정 일치의 지방관인 국사로써 파견했다. 이 중하급 귀족들은 일족 전체가 직업적인 전사 집단이 되었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무사의 시조가 된다. 또한 지방관으로써 파견된 이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형성하고 지방의 봉건 귀족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가마쿠라 체제의 초창기 다이묘들도, 무로마치 체제의 슈고 다이묘들도, 에도 체제의 신반 ~ 도자마 다이묘들도 모두 막부라는 구심점하에 자신의 영지를 인정받고 협력하며 세습하는 봉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로마치와 에도 시대 사이 전국 다이묘 정도가 예외적.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 대신 일본의 봉건제가 유럽처럼 쌍무계약의 형태로 존재했는가를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봉건제 당시 유럽 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일본의 농노제 다만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중국의 군국제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쇼군의 직할 영지가 300~400만석에 달한데다가 여기에 또 쇼군의 직속부하인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봉지도 그쯤 되었는데 전국시대 기준으로 일본 전토의 석고지만 그 당시에는 1700만석이었음을 감안하면 전국의 반 가까이 휘두르다시피 했다. 이는 봉건 제후를 세우지만 봉건 제후들은 몽땅 왕족들로만 세우고 또 기존의 봉건제와는 달리 직할지를 상당히 많이 늘렸던 군국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물론 실질적인 석고는 조금 달라서 예시를 들면 대마도는 실제 석고는 1만이 안 되었지만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감암해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고 홋카이도의 마츠마에 번은 너무 추워 쌀농사 자체가 안 되었지만 에조와의 무역으로 수익을 냈기에 마찬가지로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다. 이 외에는 많은 번들이 개간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실제 석고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심지어 조슈 번은 메이지 유신 즈음에는 공식 석고보다 실제 석고는 3배 가까이 되었을 정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군현과 더불어 사용되었는데, 이쪽은 정반대로 기존 정치구조를 "봉건"으로 칭하고 "군현"을 추구해야 할 새 정치제로 보았다. 이는 쇼군 하 다이묘로 권력이 분화되었던 점을 봉건에 대입하고, 근대 유럽의 중앙화 국가를 군현에 대입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심상은 "폐번치현"을 비롯한 관련 용어에도 반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