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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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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옹호'' :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서 정치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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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겠다는 신념의 피력이며, 아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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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의를 존중하는 여론기구로 자임함을 천명한 것입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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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건설'' :  일제 강점기 당시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된 조선 민중의 역사적 소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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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힌 것으로, 민족문화의 발굴 보존 및 문화실력의 양성으로써 민족문화의 발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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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하는 청사진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사시 정신은 일제 강점기의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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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대조 사업, 문자보급 계몽운동, 문화예술 행사의 빈번한 개최나 유별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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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이는 국학기사의 집중 연재로 구체화되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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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발전'' : 민족이 당한 온갖 수모와 수난이 산업부진에 있다는 당시 여론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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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적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먼저 경제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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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구적 소임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정신은 구체적으로 물산장려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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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탑인 조선특산품 전람회를 비롯하여 연례적으로 국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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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찰단을 파견하는 행사, 해외 실업인의 초청, 그리고 국산 우수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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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으로 실천되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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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부당'' :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당시 조선일보의 중립지적 성격을 명확히 밝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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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습니다. 불편은 좌파나 우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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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입니다. 아울러 부당은 어떤 정치력, 지배력 또는 경제력에 의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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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운영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을 표명한 것인데, 이후 이 사시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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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다는 조선일보의 뚜렷한 좌표로 발전됐습니다.<br/>
 
==연혁==
 
==연혁==
  
===1920===
 
1920년 4월 1일 3·1운동 이후에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신문을 허가하였고, 그 중에서 하나가 김성수(金性洙)를 대표로 창간했던 동아일보 였다.
 
창간할 당시부터 민족대변지의 자각에서 출발하여 격렬한 항일필봉을 휘둘렀고 일제의 주요 탄압대상이 되었다.
 
창간한지 2주 만인 4월 15일에 기사 ‘평양에서 만세소요’ 가 문제가 되어 발매·반포 금지를 당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발매·반포의 금지·압수·삭제 등으로 총독부에게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20년 9월 일본 왕실의 상징인 3종신기(三種神器)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다음해 1월까지 정간을 당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조합본부에서 보낸 3·1운동 6주년 기념 축사를 번역하여서 게재했다는 이유로 4월까지 정간을 당하였다,
 
1920년 동안 신문 면수는 창간 때 4면이던 것이 1925년 8월 6면, 1929년 9월 8면 으로 점차 증면하였다.
 
===1930===
 
1930년 4월 한민족의 항쟁을 격려한 미국 언론인 서한을 실었다는 이유로 9월까지 정간을 당하였다.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삭제하였고 그 사진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다음해의 6월까지 정간을 당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동아일보 제호 배면의 무궁화도안 삭제에 관한 명령 등 총독부의 압박이 강화되었다.
 
1930년동안 1934년 9월 10면, 1936년 1월 12면으로 점차 증면되었다.
 
 
===1940===
 
1940년 8월 10일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폐간을 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1일, 강제 폐간을 당한 지 5년 4개월 만에 중간(重刊)되었다. 체재는 타블로이드판의 2면제로 발행하었다. 광복 이후 무수히 나오는 신문계들 사이에 전통 있는 신문의 출현은 민중에 큰 기대를 주는 힘이 되었고,  우익민족진영에게는 더 큰 힘이 되었다.
 
1948년 10월 배대판(倍大版)을 내기 시작했다.
 
===1950===
 
 
1950년 6월 27일, 6·25전쟁으로 인하여 마지막 호외를 낸 후 휴간에 들어갔다.
 
10월 4일 복간하여 타블로이드 2면을 간행하였지만 1951년 1·4후퇴로 인하여 다시 휴간하고, 1월 10일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복간을 하였다. 지방신문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타블로이드 2면을 겨우 발행하였다.
 
1952년 2월 부산 토성동에 임시사옥을 지었고 배대판 2면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3월 15일자 신문에 대통령에 관련된 기사의 표제에 오식(誤植)이 있었다는 이유로 무기정간처분을 받았지만 1개월 만에 해제되었다.
 
===1960===
 
1960년 12월, 4·19혁명 이후 사회혼란 와중에 기사에 대해 불만이 쌓인 박태선장로교(朴泰善長老敎) 신도 1,000여 명에게 습격을 받는 불상사를 겪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언론의 제약이 심해졌고 몇 차례의 필화사건을 겪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주 36면 석간으로 발행되었다. 
 
===1970===
 
1970년 3월 주 48면 석간으로 기존에 비해 증면되었다.
 
1974년 12월 하순부터 ‘광고탄압’이라는 한국신문사상 전무후무 사태를 맞이 하였다. 이듬해 2월, 8명의 임원을 퇴임시키고 일부 기구를 축소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노력하였고, 많은 일반 독자들이 광고란을 구입하여 소규모이지만 재정적인 지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탄압은 1975년 7월에야 풀렸다.
 
===1980===
 
1981년 1월부터 주 72면으로 증면하여 발행하였다. 1984년 4월 2일 새 활자를 채택하였으며 면적이 31% 확대되었다. 기본 체제도 17단에서 15단으로 개선하였다. 1992년 7월 최첨단 인쇄시스템을 가동하였다,
 
===1990===
 
1993년 4월 1일 조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2000년대===
 
2002년 1월 동아일보 모바일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2005년 8월엔 32면 컬러 인쇄 체제를 완료하였다.
 
  
 
==기타==
 
==기타==

2019년 6월 16일 (일) 19: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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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념

정의옹호 :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서 정치적 정의, 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겠다는 신념의 피력이며, 아울러 이러한 정의를 존중하는 여론기구로 자임함을 천명한 것입니다.
문화건설 : 일제 강점기 당시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된 조선 민중의 역사적 소임을 밝힌 것으로, 민족문화의 발굴 보존 및 문화실력의 양성으로써 민족문화의 발전을 기약하는 청사진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사시 정신은 일제 강점기의 전국 향토문화대조 사업, 문자보급 계몽운동, 문화예술 행사의 빈번한 개최나 유별나게 돋보이는 국학기사의 집중 연재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산업발전 : 민족이 당한 온갖 수모와 수난이 산업부진에 있다는 당시 여론에 따라, 자생적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먼저 경제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자구적 소임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정신은 구체적으로 물산장려운동의 금자탑인 조선특산품 전람회를 비롯하여 연례적으로 국내외 산업사찰단을 파견하는 행사, 해외 실업인의 초청, 그리고 국산 우수상품 선정으로 실천되었습니다.
불편부당 :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당시 조선일보의 중립지적 성격을 명확히 밝힌 것이었습니다. 불편은 좌파나 우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부당은 어떤 정치력, 지배력 또는 경제력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운영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을 표명한 것인데, 이후 이 사시는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다는 조선일보의 뚜렷한 좌표로 발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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