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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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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metadata" style="background:#f2f2f2; width:320px; margin: 5px 5px 5px 5px;" cellspacing="10" align="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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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FFB6C1; color:#ffffff; font-size:130%; text-align:center;" | '''현대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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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현대평론.jp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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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분야'''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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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성격''' || 잡지,종합문예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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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제작시기''' || 1927년 1월(창간), 1928년 1월(종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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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발행처''' || 현대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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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창간자''' || [[이관용]], [[이긍종]], [[하준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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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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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현대평론사에서 이관용·이긍종 등이 정치·경제·사회평론 등을 다룬 잡지·종합문예잡지.
  
1927년에 창간되었던 평론중심의 종합 월간잡지.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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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27년 1월에 창간되어 1928년 1월에 종간되었다. [[이관용]](李灌鎔)·[[이긍종]](李肯種)·[[하준석]](河駿錫)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신문지법]](新聞紙法)」에 의한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통권 제11호로 폐간되었다(그 중 제10호는 압수되었음). “민족의 자각과 단결은 환기”하고 “산업의 만회와 진흥을 기도”함을 목표로 하고, “현대를 과학적으로 해부하여 우리의 방향과 진로를 밝히는 것”으로 사명을 삼아 창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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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월에 창간되어 1928년 1월에 종간되었다.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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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李灌鎔)·[[이긍종]](李肯種)·[[하준석]](河駿錫)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신문지법]](新聞紙法)」에 의한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통권 제11호로 폐간되었다(그 중 제10호는 압수되었다).
  
편집경향은 다소 보수적이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거의 매호마다 20∼30면, 심할 때는 50여면씩 삭제를 당하면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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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경향은 다소 보수적이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거의 매호마다 20∼30면, 심할 때는 50여면씩 삭제를 당하면서 간행되었다.
  
「출판법」에 의하여 간행되는 잡지가 아니라 「신문지법」에 의하여 간행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문화 등 시사문제(時事問題)를 논평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조선사정연구회]](조선민중의 사정을 과학적 태도로 조사, 연구함을 목적으로 1925년 9월에 창립된 단체)의 기관지적 성격을 띤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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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법」에 의하여 간행되는 잡지가 아니라 「신문지법」에 의하여 간행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문화 등 시사문제(時事問題)를 논평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조선사정연구회(조선민중의 사정을 과학적 태도로 조사, 연구함을 목적으로 1925년 9월에 창립된 단체)의 기관지적 성격을 띤 잡지였다.
  
'사람답게 살자, 날로 새롭자, 정의로 나가자'를 3대 정신으로 삼고, '민족의 자각과 단결을 환기하고 산업의 만회와 진흥을 기도한다'는 것을 2대 목표로 하여 모든 문제를 대할 때 오직 민중의 요구를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표명했다. 특히 농민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농민의 운동 방향을 자각시키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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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방면에도 관심을 가져 문예란에 이병기(李秉岐)의 시조 「으스름 달밤」, [[나도향]](羅稻香)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 실리기도 하였다.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잡지사상 『[[개벽]]』과 더불어 2대언론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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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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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평론의 창간자 [[이긍종]](李肯鍾)은〈창간에 제하여〉에서 《현대평론》의 목표를 밝혔다.
  
문학방면에도 관심을 가져 문예란에 이병기(李秉岐)의 시조 「으스름 달밤」, 나도향(羅稻香)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 실리기도 하였다.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잡지사상 『개벽』과 더불어 2대언론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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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 《현대평론》의 사명은 이 복잡한 현대를 과학적으로 해부하여 써 우리의 향방과 전로(前路)를 비취임에 있나니,《현대평론》은 대중의 친한 벗이요, 여론의 밝은 거울이라,‘사람답게 살자'‘날로 새롭자'‘정의(正義)로 나가자’함은 《현대평론》의 3대 정신이요, 우리로 하여금 궁지에서 활로(活路)를 찾기 위하여‘민족의 자각과 단결을 환기(喚起)’하고‘산업의 만회(挽回)와 진흥을 기도(企圖)'함은《현대평론》의 두 가지 목표이다”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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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모진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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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평론》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현대평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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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사》(김근수 저, 1980, 청록출판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병기「으스름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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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호는 1927년 3월 1일에 발행되어 권두언‘우리는 크게 보자’전문(全文)(1면), 한별의 시평(時評) 중‘경계 중의 조선'(12행),‘언론의 탄압’전문, 주요한의 시〈나아가자> 전문,‘정치운동의 일반적 경향' 중 11행, 이찬(李燦)의‘백남운(白南雲) 씨의〈자치운동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읽고' 중 7행, 김형배(金亨培)의‘획일적 교육제도를 배(排)함' 중 10행 등이 삭제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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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호는 1927년 4월 1일에 발행되어, 양건식(梁建植)의‘명기(名妓) 원원(圓圓)’전1면, 김동환(金東煥)의 희곡 〈역천군(逆天群)〉 27행이 삭제당했고, 제4호는 5월 1일 발행, 한별의 ‘시평(時評)’ 전문(3면), 윤기정(尹基鼎)의 소설〈빙고(氷庫)〉전문(19면), 최서해(崔曙海)의 소설〈이중(二重)〉전문(15면), 이종익(李鍾翊) 역 '조선농지문제에 취(就)하여’전문(14면), 복면생(覆面生)의‘유희계(遊戱界) 잡감’중 32행 등이 삭제 당했다.
  
  
===나도향「벙어리 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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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 3호와 8호 사이에 발행된 것들도 많이 삭제를 당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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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호는 9월 1일 발행되어, 이적효(李赤曉)의‘국제청년데이의 사적(史的) 고찰’1면 12행이 삭제당했고, 제9호는 10월 1일 발행인데, 최독부(崔獨夫)의‘조선공산당사건의 관계자 인물만평(漫評)’전문(23면), 대관생(大觀生)의 시평(時評) 중 11행이 삭제 당했다. 또 제10호는 11월·12월 합병호를 발행했으나 전량 압수되어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2권 제1호가 되는 제11호는 다음해(1928) 1월에 발행했으나, 이것으로써 종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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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F 및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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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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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8%84%EB%8C%80%ED%8F%89%EB%A1%A0&ridx=0&tot=98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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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80656&cid=42192&categoryId=51063 《개벽》 폐간 후에 나온 현대평론]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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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인]]
  
[[분류:개념/용어]]  [[분류:이주영]]  [[분류:현대평론]]  [[분류:최서해]]
+
[[분류:문학잡지]] [[분류: 현대문학]]  [[분류:이관용]] [[분류:이긍종]]  [[분류:현대평론사]]  [[분류:일제강점기 잡지]]

2022년 6월 16일 (목) 00:00 기준 최신판

개요

1927년 현대평론사에서 이관용·이긍종 등이 정치·경제·사회평론 등을 다룬 잡지·종합문예잡지.


내용

1927년 1월에 창간되어 1928년 1월에 종간되었다.

이관용(李灌鎔)·이긍종(李肯種)·하준석(河駿錫)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신문지법(新聞紙法)」에 의한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통권 제11호로 폐간되었다(그 중 제10호는 압수되었다).

편집경향은 다소 보수적이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거의 매호마다 20∼30면, 심할 때는 50여면씩 삭제를 당하면서 간행되었다.

「출판법」에 의하여 간행되는 잡지가 아니라 「신문지법」에 의하여 간행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문화 등 시사문제(時事問題)를 논평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조선사정연구회(조선민중의 사정을 과학적 태도로 조사, 연구함을 목적으로 1925년 9월에 창립된 단체)의 기관지적 성격을 띤 잡지였다.

문학방면에도 관심을 가져 문예란에 이병기(李秉岐)의 시조 「으스름 달밤」, 나도향(羅稻香)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 실리기도 하였다.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잡지사상 『개벽』과 더불어 2대언론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목표

현대평론의 창간자 이긍종(李肯鍾)은〈창간에 제하여〉에서 《현대평론》의 목표를 밝혔다.

그는 “······ 《현대평론》의 사명은 이 복잡한 현대를 과학적으로 해부하여 써 우리의 향방과 전로(前路)를 비취임에 있나니,《현대평론》은 대중의 친한 벗이요, 여론의 밝은 거울이라,‘사람답게 살자'‘날로 새롭자'‘정의(正義)로 나가자’함은 《현대평론》의 3대 정신이요, 우리로 하여금 궁지에서 활로(活路)를 찾기 위하여‘민족의 자각과 단결을 환기(喚起)’하고‘산업의 만회(挽回)와 진흥을 기도(企圖)'함은《현대평론》의 두 가지 목표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일제의 모진 탄압

《현대평론》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한국잡지사》(김근수 저, 1980, 청록출판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제 2호는 1927년 3월 1일에 발행되어 권두언‘우리는 크게 보자’전문(全文)(1면), 한별의 시평(時評) 중‘경계 중의 조선'(12행),‘언론의 탄압’전문, 주요한의 시〈나아가자> 전문,‘정치운동의 일반적 경향' 중 11행, 이찬(李燦)의‘백남운(白南雲) 씨의〈자치운동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읽고' 중 7행, 김형배(金亨培)의‘획일적 교육제도를 배(排)함' 중 10행 등이 삭제 당했다.


제 3호는 1927년 4월 1일에 발행되어, 양건식(梁建植)의‘명기(名妓) 원원(圓圓)’전1면, 김동환(金東煥)의 희곡 〈역천군(逆天群)〉 27행이 삭제당했고, 제4호는 5월 1일 발행, 한별의 ‘시평(時評)’ 전문(3면), 윤기정(尹基鼎)의 소설〈빙고(氷庫)〉전문(19면), 최서해(崔曙海)의 소설〈이중(二重)〉전문(15면), 이종익(李鍾翊) 역 '조선농지문제에 취(就)하여’전문(14면), 복면생(覆面生)의‘유희계(遊戱界) 잡감’중 32행 등이 삭제 당했다.


이렇게 제 3호와 8호 사이에 발행된 것들도 많이 삭제를 당했으며,


제8호는 9월 1일 발행되어, 이적효(李赤曉)의‘국제청년데이의 사적(史的) 고찰’1면 12행이 삭제당했고, 제9호는 10월 1일 발행인데, 최독부(崔獨夫)의‘조선공산당사건의 관계자 인물만평(漫評)’전문(23면), 대관생(大觀生)의 시평(時評) 중 11행이 삭제 당했다. 또 제10호는 11월·12월 합병호를 발행했으나 전량 압수되어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2권 제1호가 되는 제11호는 다음해(1928) 1월에 발행했으나, 이것으로써 종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RDF 및 네트워크 그래프

RDF

주어(S) 목적어(O) 관계:A는 B를 ~하다(P)
현대평론 잡지, 종합문예잡지 이다
현대평론 현대평론사 발행되었다
현대평론 1927년 창간되었다
현대평론 1928년 종간되었다
현대평론 이관용 창간되었다
현대평론 이긍종 창간되었다
현대평론 하준석 창간되었다
현대평론 일제의 언론탄압 받았다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평론

《개벽》 폐간 후에 나온 현대평론

작성자 및 기여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