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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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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3ca9a9; color:#ffffff; font-size:130%; text-align:center;" | '''극예술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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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극예술연구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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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이름''' || 극예술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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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한자이름''' || 劇藝術硏究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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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분야''' ||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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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설립시기''' || 1931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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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해체시기''' || 1938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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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설립자''' || 서항석·유치진·홍해성·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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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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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과 역할==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사적 의미는 근대 서구 사실주의의 도입·정착을 통한 본격적 신극 수립이었다. 이 극단은 1920년대의 토월회가 신파극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이룩한 공적을 이어받아 신극운동을 본격화시켰으며, 시대배경, 창립동인의 인적구성 및 자질, 운동 목표의 명확한 인식, 상업주의의 비타협적 배격, 범문화계적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해서 토월회식 좌절과 변질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의의==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사적 의미는 근대 서구 사실주의의 도입 · 정착을 통한 본격적 신극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의 토월회가 신파극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이룩한 공적을 이어받아 신극운동을 본격화시켰으며, 시대배경, 창립동인의 인적구성 및 자질, 운동목표의 명확한 인식, 상업주의의 비타협적 배격, 범문화계적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해서 토월회식 좌절과 변질을 극복할 수 있었다. 8년이라는 장기간(극연좌까지 합쳐)의 활동을 지속했던 것은 그간 큰 변질 없이 운동을 지속해 나갔으며, 극단 내부의 중대한 의견대립 또는 분파작용이 나타나지 않았고, 재정적 안정기반 없이도 극단을 운영하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다각적으로 연극운동을 펼쳐나갔다는 데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말기의 가혹한 문화탄압의 일환으로 연극계의 여러 숙제를 미처 풀지 못한 채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것은 우리나라 신극사상 가장 큰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던 이 극단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나라 신극의 발전에 적지 않은 불행이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극예술연구회 [劇藝術硏究會]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극예술연구회와 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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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진]] || [[극예술연구회]] || 설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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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및 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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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4일 (일) 15:46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