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홍화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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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에 재건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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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등록일===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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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조선 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이며, 안정되고 차분한 인상을 주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대문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는 뜻이다. 창경궁처럼 궁의 정문 역할을 했던 건축물은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덕수궁의 대한문이 있다. 맞은편에 경모궁이 있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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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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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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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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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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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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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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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1483년에 창덕 궁 옆 옛 수강궁터에 창경궁을 지을 정문으로 창건되었다.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는데, "공의 다음이 되어 조화를 넓혀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사람을 보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약 100여년 뒤인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어 1616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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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철거되며 창경원으로 개조될 때 남아있어 창경원의 정문 노릇을 했다. 창경원이 이후 창경궁으로 복원된 뒤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능===
 
홍화문은 조선 후기에 상장례를 위한 문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중종 때부터 이러한 용법이 기록되어 있다. 창경궁은 1515년부터 장경왕후의 혼전을 조성할 때부터 상장례 기사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1530년에는 반우를 위한 문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 정현왕후의 혼전은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1659년에는 효종을 영릉에 장사지내고 돌아와 봉안할 때 역시 홍화문을 거쳤다. 1720년에는 숙종의 반우행렬도 홍화문을 지났다.
 

2023년 6월 15일 (목) 02:13 판

홍화문문.jpg

지정 등록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시대

조선 광해군

문화재 설명

창경궁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