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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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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詩)」·「거울」 등 발표  
 
'''1933년''':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詩)」·「거울」 등 발표  
 
  
 
'''1934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1934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1936년''':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날개」(1936)·「지주회시(蜘蛛會豕)」발표  
 
'''1936년''':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날개」(1936)·「지주회시(蜘蛛會豕)」발표  
  
 
'''1937년''':  「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 하지만 사상불온혐의로 구속.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
 
'''1937년''':  「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 하지만 사상불온혐의로 구속.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

2022년 6월 2일 (목) 02:29 판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로 일하며 시와 소설 등을 발표했다. 작품 내에 수학 기호를 포함하고 문법을 무시하는 등 기존의 문학적 체계를 뒤엎는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개척한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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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10년: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김연창(金演昌)[12]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곧바로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 유교적인 가풍 아래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 졸업

1926년: 동광학교(東光學校)주 졸업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 1930년:『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작품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의 유희」·「공복」·「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

1933년: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詩)」·「거울」 등 발표

1934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1936년: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날개」(1936)·「지주회시(蜘蛛會豕)」발표

1937년: 「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 하지만 사상불온혐의로 구속.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