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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이효석이 1936년 『신동아(新東亞)』 2·3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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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이 1936년 『신동아(新東亞)』 2·3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자연 친화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를 활용하여, 생명의 근원인 들에 대한 찬미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에 대해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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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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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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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인위적 세계를 벗어난 자연환경 속에서의 본능적인 생활에 희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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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들녘에서 개 한 쌍이 벌이는 교미 장면을 우연히 함께 보게 된 나와 옥분은 달빛이 쏟아지는 딸기밭에서 자신들도 마치 자연의 일부분이 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정사를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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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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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 이 소설의 화자이다. 정확한 사연은 잘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학교에서의 일 때문에 퇴학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는 인물이다. ‘나’는 도시적인 삶보다는 자연적인 야성에 가까운 인물이다. 옥분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민하지만, 문수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누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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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 : 화자인 ‘나’의 친구. 학교문제로 퇴학을 당하고 결국은 학교 사건으로 인하여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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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분 : 군청고원 득추와의 파혼으로 인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여인. 들과도 같은 야성을 의미한다. 화자인 ‘나’와, ‘문수’와 정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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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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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적 → 강과 들이 어우러진 시골(작가 이효석의 고향인 봉평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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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적 → 일제 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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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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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 소설 화자인 ‘나’의 들에 대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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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옥분과의 만남(둑에서 한쌍의 자웅이 농탕치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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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 옥분과 정을 통하고, 문수는 학교에서 퇴학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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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정 : 문수가 학교 사건의 마무리로 끌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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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 : 화자인 ‘나’의 자연에 대한 생각
  
===해석===
 
'''일본 제국주의'''의 압정, 착취와 가난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고국을 뒤로한 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행 국제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일제의 손이 미치지 않는 땅,노동자의 천국,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다 같이 살기 좋은 나라 소비에트 러시아.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여객선 역시 '''부조리한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노령근해 3부작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러시아행 국제여객선에 숨어든 청년의 이야기로 살롱에서 벌어지는 사치스런 연회와 배 밑바닥 보일러실과 석탄창고의 풍경을 통해 '''빈부, 계급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 '노령근해'에서는 [[동반자적 경향]]을 띄는 당시의 [[이효석]]이 세상을 보는 시선과 날카로운 안목을 볼 수 있다.
 
  
 
===특징===
 
===특징===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등장인물이 없으며, 마땅한 사건도 없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고 ''''서술자''''의 눈으로 선상의 상황과 바다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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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동반자작가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작품으로, 이효석 작품의 개성적 차원이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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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짐승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그 의도를 선명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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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자연친화적인 사상과 생명성에 대한 찬미가 현실의 부정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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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본능적 행위와 인간의 탈윤리적 행위를 아름다운 본능의 표출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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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이전의 순수한 본능으로 보고자 한 이효석의 ‘에덴의식’, 즉 원죄에 대한 찬가는 그가 이데올로기적인 문학에 한때 동조하였고 그것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돌아섰던 만큼 더욱 강하게 그의 문학적 특질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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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이효석 문학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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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문체는 장식적 수사가 많은 서술적 문체이다. 거기에다 서정적인 묘사로 일관되어 있어 수필과 혼동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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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원풍경의 묘사에는 토속어로 된 풀이름·꽃이름 등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목에서 강한 음악적 율동감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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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을 시적 소설이라든가 한편의 서정시라 말하는 이유는 이런 점에서도 기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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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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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big>'''노령근해 蘆嶺近海'''</big></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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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길경이, 나생이, 딸장이, 먼둘네,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초, 씀바구, 돌나물, 비름, 능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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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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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은 것이―---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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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빛에서 초록으로―---이 기막힌 신비에 다시 한번 놀라 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 놓을까. 바닷물을 고래같이 들이켰던가. 하늘의 푸른 정기를 모르는 결에 함빡 마셔 두었던가. 그것을 빗물에 풀어 시절이 되면 땅 위로 솟쳐 보내는 것일까. 그러나 한 포기의 풀을 뽑아 볼 때 잎새만이 푸를 뿐이지 뿌리와 흙에는 아무 물들인 자취도 없음은 웬일일까. 시험관 속 붉은 물에 약품을 넣으면 그것이 금시에 새파랗게 변하는 비밀―---그것과도 흡사하다. 이 우주의 비밀의 약품―---그것은 결국 알 바 없을까. 한 톨의 보리알이 열 낟으로 나는 이치는 가르치는 이 있어도 그 보리알에서 푸른 잎이 돋는 조화의 동기는 옳게 말하는 이 없는 듯하다. 사람의 지혜란 결국 신비의 테두리를 뱅뱅 돌 뿐이요, 조화의 속의 속은 언제까지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일 듯싶다. 초록 풀에 덮인 땅 속의 뜻은 초록 옷을 입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엿볼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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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들얀들 나부끼는 초목의 양자는 부드럽게 솟는 음악. 줄기는 굵고 잎은 연한 멜로디의 마디마디이다. 부피 있는 대궁은 나팔 소리요, 가는 가지는 거문고의 음률이라고도 할까.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그것이 봄의 걸음이다. 풀 위에 누워 있으면 은근한 음악의 율동에 끌려 마음이 너볏너볏 나부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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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질경이, 민들레…… 가지가지 풋나물을 뜯어 먹으면 몸이 초록으로 물들 것 같다. 물들어야 될 것 같다. 물들어야 옳을 것 같다. 물들지 않음이 거짓말이다. 물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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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지저귄다. 꾀꼬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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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이 아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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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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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든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으면 나중에는 현기증이 나며 눈이 둘러빠질 듯싶다. 두 눈을 뽑아서 푸른 물에 채웠다가 라무네병 속의 구슬같이 차진 놈을 다시 살 속에 박아 넣은 것과도 같이 눈망울이 차고 어리어리하고 푸른 듯하다. 살과는 동떨어진 유리알이다. 그렇게도 하늘은 맑고 멀다. 눈이 아픈 것은 그 하늘을 발칙하게도 오랫동안 우러러본 벌인 듯싶다. 확실히 마음이 죄송스럽다. 반나절 동안 두려움 없이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착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장 용기 있는 악한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도 푸른 하늘은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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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면 눈물이 푹 쏟아진다. 벌판이 새파랗게 물들어 눈앞에 아물아물한다. 이런 때에는 웬일인지 구름 한 점도 없다. 곁에는 한 묶음의 꽃이 있다. 오랑캐꽃, 고들뱅이, 노고초, 새고사리, 가처무릇, 대게, 맛탈, 차치광이. 나는 그것을 섞어 틀어 꽃다발을 겯기 시작한다. 각색 꽃판과 꽃술이 무릎 위에 지천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헤어지는 석류알보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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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졌는지를 모른다. 지금에는 한 그릇의 밥, 한 권의 책과 똑같은 지위를 마음속에 차지하게 되었다. 책에서 읽은 이론도 아니요, 얻어들은 이치도 아니요, 몇 해 동안 하는 일 없이 들과 벗하고 지내는 동안에 이유 없이 그것은 살림 속에 푹 젖었던 것이다. 어릴 때에 동무들과 벌판을 헤매며 찔레를 꺾으러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고 소똥버섯을 따다 화로 속에 굽고, 메를 캐러 밭이랑을 들치며 골로 말을 만들어 끌고 다니노라고 집에서보다도 들에서 더 많이 날을 지우던―---그때가 다시 부활하여 돌아온 셈이다. 사람은 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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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벗하게 됨은 생활에서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까. 식물적 애정은 반드시 동물적 열정이 진한 곳에 오는 것일까. 학교를 쫓기어 서울을 물러오게 된 까닭으로 자연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동무들과 골방에서 만나고 눈을 기여 거리를 돌아치다 붙들리고 뛰다 잡히고 쫓기고―---하였을 때의 열정이나 지금에 들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일반이다. 지금의 이 기쁨은 그때의 그 기쁨과도 흡사한 것이다. 신념에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라고 인간 이상이 아닐 것과 같이 들을 사랑하는 졸부라고 인간 이하는 아닐 것이다. 아직도 굳은 신념을 가지면서 지난날에 보던 책들을 들척거리다가도 문득 정신을 놓고 의미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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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 이제는 고향이 마음에 붙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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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조롱도 아니요 치사도 아닌 이런 말을 던지게 되었고, 동구 밖에서 만나는 이웃집 머슴은 인사 대신에 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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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 늪에 붕어떼 많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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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사냥 갈 궁리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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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정 보리 고개 숙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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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곡식의 소식을 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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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보다도 내가 더 들과 친하고 곡식의 소식을 잘 알게 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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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외듯이 벌판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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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는 들의 지도가 세밀히 박혀 있고 사철의 변화가 표같이 적혀 있다. 나는 들사람이요 들은 내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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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논두덩의 청대콩이 가장 진미이며 어느 이랑의 감자가 제일 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발고사리가 많이 피어 있는 진펄과 종달새 뜨는 보리밭을 짐작할 수 있다. 남대천 어느 모퉁이를 돌 때 가장 고기가 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개리, 쇠리, 불거지가 덕실덕실 끓는 여울과 미여기, 뚜구뱅이가 잠겨 있는 웅덩이와 쏘가리 꺽지가 누워 있는 바위 밑과―---매재와 고들매기를 잡으려면 철교께서도 몇 마장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과 쇠치네와 기름종개를 뜨려면 얼마나 벌판을 나가야 될 것을 안다. 물 건너 귀룽나무 수풀과 방치골 으름덩굴 있는 곳을 아는 것은 아마도 나뿐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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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퇴학맞고 처음으로 도회를 쫓겨 내려왔을 때에 첫걸음으로 찾은 곳은 일갓집도 아니요, 동무집도 아니요, 실로 이 들이었다. 강가의 사시나무가 제대로 있고 버들숲 둔덕의 잔디가 헐리지 않았으며 과수원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이란 형언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란 곧 산천을 사랑하고 벌판을 반가워하는 심정이 아닐까. 이런 자연의 풍물을 내놓고야 고향의 그림자가 어디에 알뜰히 남아 있는가. 헐리어 가는 초가지붕에 남아 있단 말인가. 고향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면서도 그리운 것은 더 많이 들과 시냇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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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은 만물을 허랑하게 만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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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은 드러내놓고 모든 것을 들의 품속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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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풀 숲에서 새 둥우리를 발견한 것을 나는 알 수 없이 기쁘게 여겼다. 거룩한 것을―---아름다운 것을―---찾은 느낌이다. 집과 가족들을 송두리째 안심하고 땅에 맡기는 마음씨가 거룩하다. 풀과 깃을 모아 두툼하게 결은 둥우리 안에는 아직 까지 않은 알이 너덧 알 들어 있다. 아롱아롱 줄이 선 풋대추만큼씩 한 새알. 막 뛰어나려는 생명을 침착하게 간직하고 있는 얇은 껍질―---금시에 딸깍 두 조각으로 깨뜨려질 모태―---창조의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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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요한 보금자리가 행여나 놀라고 어지럽혀질까를 두려워하여 둥우리 기슭에 손가락 하나 대기조차 주저되어 나는 다만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풀포기를 제대로 덮어놓고 감쪽같이 발을 옮겨 놓았다. 금시에 알이 쪼개지며 생명이 돋아날 듯싶다. 등뒤에서 새가 푸드득 날아 뜰 것 같다. 적막을 깨뜨리고 하늘과 들을 놀래며 푸드득 날았다! 생각에 마음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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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늦게 까는 것이 무슨 새일까. 청새일까. 덤불지일까. 고요하게 뛰노는 기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목소리를 내서 노래라도 부를까 느끼며 둑 아래로 발을 옮겨 놓으려다 문득 주춤하고 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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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한 것이 눈에 뜨인 까닭이다. 껄껄 웃고 싶은 것을 참고 풀 위에 주저앉았다. 그 웃고 싶은 마음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던 마음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 맹랑한 풍경이 나의 마음을 결코 노엽히거나 모욕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까와 똑같은 기쁨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일반으로 창조의 기쁨을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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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겁내지 않고 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꺼리는 법 없이 자웅은 터놓고 마음의 자유를 표현할 뿐이다. 부끄러운 것은 도리어 이쪽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중없이 오랫동안 그 요절할 광경을 바라보기가 몹시도 겸연쩍었다. 확실히 시절의 탓이다. 가령 추운 겨울 벌판에서 나는 그런 장난을 목격한 일이 없다. 역시 들이 푸를 때 새가 늦은 알을 깔 때 자웅도 농탕치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성내서는 비웃어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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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동안에 어디서부터인지 자웅에게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킬킬킬킬 웃음 소리가 나며 두 번째 것이 날았다. 가제나 몸이 떨어지지 않는 자웅은 그제야 겁을 먹고 흘금흘금 눈을 굴리며 어색한 걸음으로 주체스런 두 몸을 비틀거렸다. 나는 나 이외에 그 광경을 그때까지 은근히 바라보고 있던 또 한 사람이 부근에 숨어 있음을 비로소 알고 더한층 부끄러운 생각이 와락 나며 숨도 크게 못 쉬고 인기척을 죽이고 잠자코만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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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돌멩이가 날리더니 이윽고 호담스런 웃음 소리가 왈칵 터지며 아래편 숲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덥석 뛰어나왔다. 빨래함지를 인 채 한 손으로는 연해 자웅을 쫓으면서 어깨를 떨며 웃음을 금할 수 없다는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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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돌연한 인물에 나는 놀랐다. 한편 엉겼던 마음이 풀리기도 하였다. 옥분이었다. 빨래를 하고 나자 그 광경이매 마음속 은밀히 흠뻑 그것을 즐기고 난 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의 놀람보다도 옥분이가 문득 나를 보았을 때의 놀람―---그것은 몇 곱절 더 큰 것이었다. 별안간 웃음을 뚝 그치고 주춤 서는 서슬에 머리에 이었던 함지가 왈칵 떨어질 판이었다. 얼굴의 표정이 삽시간에 검붉게 질려 굳어졌다. 눈알이 땅을 향하고 한편 손이 어쩔 줄 몰라 행주치마를 의미 없이 꼬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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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깊은 구렁이에 빠진 것과도 같은 그의 궁착한 처지와 덴 마음을 건져 주기 위하여 나는 마음에도 없는 목소리를 일부러 자아내어 관대한 웃음을 한바탕 웃으면서 그의 곁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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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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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도 없는 책망이었으나 옥분의 마음을 풀어 주자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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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추녀석쯤이 너를 싫달 법 있니. 주제넘은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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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다짜고짜로 그의 일신의 이야기를 집어낸 것은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자는 생각이었다. 군청고원 득추는 일껀 옥분과 성혼이 된 것을 이제 와서 마다고 투정을 내고 다른 감을 구하였다. 옥분의 가세가 빈한하여 들고날 판이므로 혼인한 뒤에 닥쳐올 여러 가지 귀치않은 거래를 염려하여 파혼한 것이 확실하다. 득추의 그런 꾀바른 마음씨를 나무라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개 고원의 불신을 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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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을 당하고 분하지도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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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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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분은 도리어 짜증을 내며 발을 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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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 한번 해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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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지 그에게로 쏠리는 동정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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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짓 할 것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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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의 눈치를 알면서도 시침을 떼는 옥분의 마음씨에는 말할 수 없이 그윽한 것이 있어 그것이 은연중에 마음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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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멀어지는 그의 민출한 자태가 가슴속에 새겨진다. 검은 치마폭 밑으로 드러난 불그레한 늠츳한 두 다리―---자작나무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헐벗기 때문에 한결 빛나는 것, 세상에도 가지고 싶은 탐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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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까닭에 오래간만에 문수와 함께 둑 위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날마다 거리의 학교에 가야 하는 그를 자주 붙들어 낼 수는 없다. 일요일이 없는 나에게도 일요일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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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둑에 오르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이 시원하다. 바닷바람이 아직 조금 차기는 하나 신선한 맛이다. 잔디밭에는 간간이 피지 않은 해당화 봉오리가 조촐하게 섞였으며 둑 맞은편에 군데군데 모여 선 백양나무 잎새가 햇빛에 반짝반짝 나부껴 은가루를 뿌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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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는 빌려 갔던 몇 권의 책을 돌려 주고 표해 두었던 몇 구절의 뜻을 질문하였다. 나는 그에게는 하루의 선배인 것이다. 돈독하게 뛰어 주는 것이 즐거운 의무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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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끝난 다음 책을 덮어 두고 잡담에 들어갔을 때에 문수는 탄식하는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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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점점 틀려 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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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실례를 가지가지 들고 나중에는 그 한 사람의 협착한 처지를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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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것까지 들키었네. 자네 책도 뺏길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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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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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사귀는 것이 불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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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걸은 길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뻔하지. 차라리 그편이 시원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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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궁박한 현실 이야기만도 멋없어 두 사람은 무릎을 툭 털고 일어서 기분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아는 말 아는 곡조를 모조리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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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진하면 번갈아 서서 연설을 하였다. 눈앞에 수많은 대중을 가상하고 목소리를 다하여 부르짖어 본다. 바닷물이 수물거리나 어쩌나, 새들이 놀라서 떨어지나 어쩌나를 시험하려는 듯이도 높게 고함쳐 본다. 박수하는 사람은 수만의 대중 대신에 한 사람의 동무일 뿐이나 지껄이는 동안에 정신이 흥분되고 통쾌하여 간다. 훌륭한 공부 이외 단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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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착한 땅 위에 그렇게 자유로운 벌판이 있음이 새삼스러운 놀람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말을 외쳐도 거기에서만은 '중지'를 당하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땅 위는 좁으면서도 넓은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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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은 속 풀리는 시원한 곳이며 문수와 보내는 하루는 언제든지 다시없이 즐거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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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철망 너머로 엿보이는 철늦은 딸기―---잎새 사이로 불긋불긋 돋아난 송이 굵은 양딸기―---지날 때마다 건강한 식욕을 참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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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달빛에 젖은 딸기의 양자란 마치 크림을 끼얹은 것과도 같아서 한층 부드럽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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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열매에 눈독을 보내며 철망을 넘기에 나는 반드시 가책과 반성으로 모질게 마음을 매질하지는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누구의 과수원이든 간에 철망을 넘는 것은 차라리 들사람의 일종의 성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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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은 또한 한편 그것을 용납하고 묵인하는 아량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해 동안에 완전히 이 야취의 성격을 얻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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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송이를 정신없이 따서 입에 넣으면서도 철망 밖에서 다만 탐내고 보기만 할 때보다 한층 높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됨은 도리어 웬일일까. 입의 감동이 눈의 감동보다 떨어지는 탓일까. 생각만 할 때의 감동이 실상 당하였을 때의 감동보다 항용 더 나은 까닭일까. 나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는 불과 몇 송이의 딸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차라리 벌판에 지천으로 열려 언제든지 딸 수 있는 들딸기 편이 과수원 안의 양딸기보다 나음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철망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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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딸기, 중딸기, 장딸기, 나무딸기, 감대딸기, 곰딸기, 닷딸기, 배암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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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나무 그늘에 난데없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자 황급히 뛰어넘다 철망에 걸려 나는 옷을 찢었다. 그러나 옷보다도 행여나 들키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가 앞서 허둥허둥 풀 속을 뛰다가 또 공교롭게도 그가 옥분임을 알고 마음이 일시에 턱 놓였다. 그 역 딸기밭을 노리고 있던 터가 아닐까. 철망 기슭을 기웃거리며 능금나무 아래 몸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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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개천 둑에서 기묘하게 만난 후 두 번째의 공교로운 만남임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퍽으나 헐하게 놓여졌다. 가까이 가서 시룽시룽 말을 건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그 역시 스스러워하지 않고 수월하게 말을 받고 대답하고 하였다. 전날의 기묘한 만남이 확실히 두 사람의 마음을 방긋이 열어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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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따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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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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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나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른다. 나는 떨리는 그의 팔을 붙들고 풀밭을 지나 버드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술은 딸기보다도 더 붉다. 확실히 그는 딸기 이상의 유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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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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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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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달래기는 하였으나 기실 딸기를 훔치러 철망을 넘을 때와 똑같이 가슴이 후둑후둑 떨림을 어쩌는 수 없었다. 버드나무 잎새 사이로 달빛이 가늘게 새어들었다. 옥분은 굳이 거역하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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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딸기 맛이 아니요, 확실히 들딸기 맛이었다. 멍석딸기 나무딸기의 신선한 감각에 마음은 흐뭇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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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야취의 습관에 젖었기로 철망 너머 딸기를 딸 때와 일반으로 아무 가책도 반성도 없었던가. 벌판서 장난치던 한 자웅의 짐승과 일반이 아닌가. 그것이 바른가, 그래서 옳을까 하는 한 줄기의 곧은 생각이 한결같이 뻗쳐 오름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판단은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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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귀치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뱅 돈다. 어수선한 마음을 활짝 씻어 버릴 양으로 아침부터 그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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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후릴 곳을 찾으면서 남대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간 것이 시적시적 걷는 동안에 어느덧 철교께서도 근 십 리를 올라가게 되었다. 아무 고기나 닥치는 대로 잡으려던 것이 그렇게 되고 보니 불현듯이 고들매기를 후려 볼 욕심이 솟았다. 고기사냥 중에서도 가장 운치 있고 흥 있는 고들매기 사냥에 나는 몇 번인지 성공한 일이 있어 그 호젓한 멋을 잘 안다. 그중 많이 모여 있을 듯이 보이는 그럴듯한 여울을 점쳐 첫 그물을 던져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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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오목하게 둘러싸인 개울―---물도 맑거니와 물소리도 맑다. 돌을 굴리는 여울 소리가 티끌 한 점 있을 리 없는 공기와 초목을 영롱하게 울린다. 물 속에 노는 고기는 산신령이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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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활짝 벗어붙이고 그물을 메고 물 속에 뛰어들었다. 넉넉히 목욕을 할 시절임에도 워낙 산골물이라 뼈에 차다. 마음이 한꺼번에 씻겨졌다느니보다도 도리어 얼어붙을 지경이다. 며칠 내로 내려오던 어수선한 생각이 확실히 덜해지고 날아갔다고 할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가지 생각이 아직도 철사같이 가늘게 꿰뚫고 흐름을 속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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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이란 그렇게 수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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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분과의 그날 밤 인연이 어처구니없게 쉽사리 맺어진 것이 의심쩍은 것이었다. 아무 마음의 거래도 없던 것이 달빛과 딸기에 꼬임을 받아 그때 그 자리에서 금방 응낙이 되다니. 항용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두 사람의 마음의 교섭이란 이야기 속에서 읽을 때에는 기막히게 장황하고 지리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수월할 리 있을까. 들 복판에서는 수월한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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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문제는 생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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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다시 솔솔 풀린다. 물이 찰수록 생각도 점점 차게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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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다리목을 넘게 되었을 때 그쯤에서 한 훌기 던져 보려고 그물을 펴들고 물 속을 가늠해 보았다. 속물이 꽤 세어 다리를 훌친다. 물때 낀 돌멩이가 몹시 미끄러워 마음대로 발을 디딜 수 없다. 누르칙칙한 물 속이 적확히 보이지 않는다. 몇 걸음 아래편은 바위요 바위 아래는 소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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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던질 때의 호흡이란 마치 활을 쏠 때의 그것과도 같이 미묘한 것이어서 일종의 통일된 정신과 긴장된 자세를 요구하는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그러면서도 그때 자칫하여 기어이 실수를 하게 된 것은 필시 던지는 찰나까지도 통일되지 못한 마음이 어수선하고 정신이 까닥거렸음이 확실하다. 몸이 휘뚱하고 휘더니 휭하게 날아야 할 그물이 물 위에 떨어지자 어지럽게 흩어졌다. 발이 미끄러져 센 물결에 다리가 쓸리니까 그물은 손을 빠져 달아났다. 물 속에 넘어져 흐르는 몸을 아무리 버둥거려야 곧추 일으키는 장사 없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히나 별수없이 몸은 흐를 대로 흐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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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부딪쳐 기어코 소에 빠졌다. 거품을 날리는 폭포 속에 송두리째 푹 잠겼다가 휘엿이 솟으면서 푸른 물속을 뱅 돌았다. 요행 헤엄의 습득이 약간 있던 까닭에 많은 고생 없이 허부적거리고 소를 벗어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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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상과 어깻죽지에 몇 군데 상처가 있었다. 피가 돋았다. 다리에는 군데군데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음을 보았다. 잃어버린 그물은 어느 줄기에 묻혀 흐르는지 알 바도 없거니와 찾을 용기도 없었다. 고들매기는 물론 한 마리도 손에 쥐어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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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메이고 코에서는 켰던 물이 줄줄 흘렀다. 우연히 욕을 당하게 된 몸동아리를 훑어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별안간 옥분의 몸이―---향기가 눈앞에 흘러왔다. 비밀을 가진 나의 몸이 다시 돌아보이며 한동안 부끄러운 생각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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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는 기어코 학교를 쫓겨났다. 기한 없는 정학처분이었으나 영영 몰려난 것과 같은 결과이다. 덕분에 나도 빌려 주었던 책권을 영영 뺏긴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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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시원하다고 문수는 거드름 부렸으나 시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들볶는 바람에 그는 집을 피하여 더 많이 나와 지내게 되었다. 원망의 물줄기는 나에게까지 튀어 왔다. 나는 애매하게도 그를 타락시켜 놓은 안된 놈으로 몰릴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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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수없이 나날을 들과 벗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들의 동무를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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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 서면 경주를 하고 시냇가에 서면 납작한 돌을 집어 물 위에 수제비를 뜨기가 일쑤다. 돌을 힘껏 던져 그것이 물 위를 뛰어가는 뜀수를 세는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이 최고 기록이다. 돌은 굴러갈수록 걸음이 좁아지고 빨라지다 나중에는 깜박 물 속에 꺼진다. 기차가 차차 멀어지고 작아지다 산모퉁이에서 깜박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재미있는 장난이다. 나는 몇 번이고 싫지 않게 돌을 집어 시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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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축 처지게 되면 다시 기운을 내어 모래밭에 겨루고 서서 씨름을 한다. 힘이 비등하여 승패가 상반이다. 떠밀기도 하고 샅바씨름도 하고 잡아나꾸기도 하고―---다리걸이 딴죽치기―---기술도 차차 늘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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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장하고 제일 크고 제일 아름답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바른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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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말고 수수께끼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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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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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껄껄껄껄 웃으면 오장육부가 물에 헤운 듯이 시원한 것이다. 힘! 무슨 힘이든지 좋다. 씨름을 해가는 동안에 우리는 힘에 대한 인식을 한층 새롭혀 갔다. 조직의 힘도 장하거니와 그것을 꾸미는 한 사람의 힘이 크다면 더한층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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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와 천렵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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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잃은 나는 하는 수 없이 족대를 들고 쇠치네 사냥을 하러 시냇물을 훑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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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 냄비를 걸고 뜬 고기를 끓이고 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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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거의 준비되었을 때, 더운 판에 목욕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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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씻고 때를 밀고는 깊은 곳에 들어가 물장구와 갸닥질이다. 어린아이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이 방울방울 날리는 물방울과 함께 하늘을 휘덮었다가는 쏟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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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 나와 얼굴을 씻고 물을 들일 때에 문수는 다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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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의 상처가 웬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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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의 어깨의 군데군데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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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뜨끔하면서 그때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고들매기 사냥과 거기에 관련된 옥분과의 일건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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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에게까지 기일 바 못 되어 기어코 고기잡이 이야기와 따라서 옥분과의 곡절을 은연중 귀띔하여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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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것은 그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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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부상일세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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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고는 걱실걱실 웃는 것이다. 웃다가 문득 그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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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말이 났으니 나도 내 비밀을 게울 수밖에는 없게 되었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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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하고 말을 풀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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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분이―--- 나도 그와는 남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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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한 나의 어깨를 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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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득추와 파혼된 후로부터는 달뜬 마음이 허랑해진 모양이데. 일종의 자포자기야. 죽일놈은 득추지. 옥분의 형편이 가엾기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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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이상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문수에게 대하여 노염과 질투를 느끼는 대신에―---도리어 일종의 안심과 감사를 느끼는 것이었다. 괴롭던 책임이 모면된 것 같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이도 감정이 가벼워지고 엉겼던 마음이 풀리는 것이다. 이것은 교활하고 악한 심보일까. 그러나 나를 단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옥분의 허랑한 태도에 해결의 열쇠는 있다. 그의 태도가 마지막 책임을 져야 될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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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이 없나? 거짓말로 알아듣나? 자네가 버드나무숲에서 만났다면 나는 풀밭에서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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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잠자코만 있으면서 나는 속으로 한결같이 들의 성격과 마술과도 같은 자연의 매력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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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이야기가 장황하였던지 밥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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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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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 마을은 더한층 지내기 어렵고 역시 들이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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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낮으로 해두고 밤을―---하룻밤을 온전히 들에서 보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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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논하고 하룻밤을 들에서 야영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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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밤은 두려운 것일까―---이런 의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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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의가 통한 후이니 이후로는 옥분이도 데려다가 세 사람이 일단의 '들의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문수의 의견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일종의 악취미라고 배척하였다. 과거의 피차의 정의는 정의로 하여 두고 단체생활에는 역시 두 사람이 적당하며 수효가 셋이면 어떤 경우에든지 반드시 기울고 불안정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나의 야성이 철저치 못한 까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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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두 사람은 들 복판에서 해를 넘기고 어둡기를 기다리고 밤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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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피우고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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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장황하기 때문에 불이 마저 스러질 때에는 마을의 등불도 벌써 다 꺼지고 개 짖는 소리도 수습된 뒤였다. 별만이 깜박거리고 바닷소리가 은은할 뿐이다.
  
  동해안의 마지막 항구를 떠나 북으로 북으로! 밤을 새우고 날을 지나니 바다는 더욱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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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깊고 넓고 무한하다.
  하늘은 차고 수평선은 멀고.
 
  뱃전을 물어뜯는 파도의 흰 이빨을 차면서 배는 비장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마스트 위에 깃발이 높이 날리고 연기가 찬바람에 가리가리 찢겨 날린다.
 
  두만강 넓은 하구를 건너 국경선을 넘어서니 노령연해의 연봉이 바라보인다.――하얗게 눈을 쓰고 북극 석양에 우뚝우뚝 빛나는 금자색 연봉이.
 
  
  저물어가는 갑판 위는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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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전의 혼돈의 세계는 이러하였을까.
  살롱에서 술타령하는 일등 선객들의 웃음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올 뿐이요 그 외에는 인기척조차 없다.
 
  배꼬리 살롱 뒤 갑판 은은한 뱃전에 의지하여 무언지 의론하는 두 사람의 선객이 있다――한 사람은 대모테 쓴 청년이요 한사람은 코 높은 ''''마우자''''<ref>마우자: 고려말로 '러시아인'을 뜻한다.</ref>이다.
 
  낙타빛 가죽 샤쓰 위에 띤 검은 에나멜 혁대이며 온 세상을 구를만한 굵은 발소리를 생각게 하는 툽툽한 구두가 창 빠른 모자와 아울러 그를 한층 영웅적으로 보이게 한다.
 
  연해주의 각지를 위시하여 넬진스크 치타 방면을 끊임없이 휘돌아치느니만큼 그들에게는 슬라브족다운 큼직한, 호활한 풍모가 떠돈다.
 
  ‘마우자’는 대모테 청년과 조선말 아닌 말로 은은히 지껄인다.
 
  냄새 잘 맡는……는 빨빨거리며 어디든지 안 좇아오는 곳이 없다.
 
  정신없이 의론하다가도 그들은 가끔 말을 그치고 살롱 쪽을 흘끗흘끗 돌아본다.
 
  ――거기에는 확실히 ……에서 좇아오는 친구가 있을 것이다.
 
  푸른 바다는 안개 속으로 저물어 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흰 갈매기 두어 마리 끽끽 소리치며 배 앞을 건너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갈매기 소리 사라지니 갑판 위는 더한층 고요하다.
 
  
  페인트 냄새 새로운 살롱에서는 육지 부럽지 않은 잔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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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적막―---지구의 자전 공전의 소리도 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국경선을 넘어서 외지에 한 걸음 들여놓았을 때에 꺼릴 것 없이 진탕으로 마시고 얼근히 취하는 것이 그들의 하는 상습이다.
 
  흰 탁자 위에는 고기와 과일접시가 수없이 놓였고 술병과 유리잔이 쉴새없이 돌아다닌다.
 
  대개가 상인인 만치 그들 사이에는 주권 이야기, 미두 이야기가 꽃피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유리한 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싫도록 돈을 짜내볼까 하는 것이 대머리를 기름지게 번쩍이는 그들의 똑같은 공론이다.
 
  “서의 명령이니 좇아만 오면 그만이지 바득바득 애쓰며 직무를 다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의 친구도 한편 구석에서 은근히 어떻게 하면 배를 좀 불려 볼까 하는 생각에 똑같이 취하고 있다.
 
  유쾌한 취흥과 ‘유쾌한’ 생각에 그들은 마음껏 즐겁다.
 
  술병이 쉴새없이 거품을 쏟는다.
 
  유리잔이 쉴새없이 기울어진다.
 
  흰옷 입은 보이가 쉴새없이 휘돌아친다.
 
  “놈들 도야지<ref>도야지: 돼지</ref>같이 처먹기도 한다.”
 
  취사장에서 요리접시를 나르던 보이는 중얼거리며 윈치 옆을 돌아올 때에 남몰래 요리접시 두엇을 감쪽같이 빼서 윈치 뒤에 감춰 두었다.
 
  “놈들의 양을 줄여서 나의 동무를 살려야겠다.”
 
  
  살롱 갑판에서 몇길 밑 쇠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곳에 기관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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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두려움이란 어디서 오는 감정일까.
  흰 식탁 위에 술이 있고 해가 비취고 페인트 냄새 새로운 선창에 푸른 바다가 보이고 간혹 달빛조차 비끼는 살롱이 선경이라면 초열과 암흑의 기관실은 온전히 지옥이다――육지의 이 그릇된 대조를 바다 위의 이 작은 집합 안에서도 역시 똑같이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다.
 
  어둡고 숨차고 ‘보일러’의 열로 찌는 듯한 이 지옥은 이브를 꼬이다가 아흐레<ref>아흐레: 아홉째 되는 날</ref> 동안이나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 사탄의 귀양간 불 비오는 지옥에야 스스로 비길 바가 아니겠지만 그러나 또한 이 시인의 환영으로 짜놓은 상상의 지옥이 이 세상의 간교로 짜놓은 현실의 지옥에야 어찌 비길바 되랴.
 
  얼굴을 익혀가며 아궁 앞에서 불때는 화부들, 마치 지옥에서 불장난치는 악마들같이도 보이고 어둠 속에 웅크린 반나체의 그들은 마치 원시림 속에 웅크린 고릴라와도 흡사하다.
 
  교체한지 몇 분이 못되어 살은 이그러지고 땀은 멋대로 쏟아진다.
 
  폭이 두 간에 남지 않은 좁은데서 두 간에 남는 긴 화저로 아궁을 쑤시면 화기와 석탄재가 보얗게 화실을 덮는다.
 
  다 탄 끄르터기를 바케쓰에 그뜩그뜩 담아내고 그 뒤에 삽으로 석탄을 퍼 던지면 널름거리는 독사의 혀끝 같은 불꽃이 확확 붙어 오른다.
 
  둘째 아궁과 셋째 아궁마저 이렇게 조절하여 놓으면 기관실은 온전히 불붙는 지옥이다.
 
  아궁 위의 여섯 개의 보일러는 백 파운드가 넘는 증기를 올리면서 용솟음친다.
 
  불을 쑤시고 또 석탁을 넣고…….
 
  땀은 쏟아지고 전신은 글자대로 발갛게 익는다.
 
  양동이에 떠온 물이 세 사람의 화부 사이에서 볼 동안에 사라지고 만다. 사실 물이라도 안 마시면 잠시라도 견뎌 나갈 수가 없다.
 
  북국의 바다 오히려 이러하니 적도 직하의 인도양을 넘을 때에야 오죽하랴.
 
  ――이렇게 하여 배는 움직이는 것이다. 살롱은 취흥을 돋우리만치 경쾌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교체한지 반시간만 넘으면 화부의 체력은 낙지다리같이 느른해진다. 부삽 하나 쳐들 기맥조차 없어진다. 보일러의 파운드가 내리기 시작한다.
 
  먼 브리지에서 항구의 계집을 몽상하던 선장은 전화통으로 소리친다.
 
  “기관에 주의!”
 
  “속력을 늘여라!”
 
  역시 항구 계집의 젖가슴을 환상하던 기관장은 이 명령에 벌떡 일어나 화실로 좇아온다.
 
  “무엇들 하느냐!”
 
  화부는 느릿느릿 아궁에 석탄을 집어 넣는다.
 
  “무엇해 일하지. 너이들같이 편한 줄 아니.”
 
  그러나 이것이 입밖에 나오지는 않았다. 폭발은 마땅한 때를 얻어야 할 것이다.
 
  “부지런히 해라 이놈들아!”
 
  기관장의 무서운 시선이 화부들의 등날을 재촉질한다.
 
  “부삽으로 쳐서 아궁 속에 태워 버릴까. 삼분이 못되어 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 똑같은 생각이 세 사람의 머리 속에 똑같이 솟아올랐다.
 
  
  깊은 암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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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도 적막에서도 오지는 않는다.
  이 세상과는 인연을 끊어 놓은 듯한 암흑의 공간.
 
  ――철벽으로 네모지게 이 세상을 막은 석탄고 속은 영원의 밤이다.
 
  간단없는 동요, 기관소리가 어렴풋이 흘러올 따름.
 
  이 죽음 속에 확실히 허부적거리는 동체가 있다. 허부적거릴 때마다 석탄덩이가 와르르 흩어진다.
 
  “으――”
 
  “아――”
 
  이 원시적 모임의 발성은 구원을 부르는 소리라느니 보다는 자기의 목소리를 시험하려는, 즉 생명이 아직 남아 있나 없나를 시험하여 보려는 듯한 목소리이다.
 
  “으――”
 
  “아――”
 
  기맥이 쇠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졌는지 잠시 고용하다.
 
  와르르 흩어지는 석탄더미 위에 성냥불이 켜졌다.
 
  푸른 인광은 석탄더미 위에 네 활개를 펴고 엎드린 청년의 초췌한 얼굴을 비취인다.
 
  허벅숭이 밑에 끄스른 얼굴은 푸른빛을 받아 처참하고 저 혼자 살아 있는 듯한 말똥한 눈동자에는 찬바람이 휙휙 돈다.
 
  “물!”
 
  절망적으로 외치면서 다시 불을 그었다.
 
  불빛에 조각조각 부서진 빵조각과 물병이 보인다.
 
  흔드는 물병 속에는 한 방울의 물도 없다.
 
  물병을 던지고 청년은 허둥지둥 일어서 또 외친다.
 
  “물!”
 
  “물!”
 
  “무――ㄽ!”
 
  어둠 속에서 미친놈같이 그는 싸움의 대상도 없이 혼자 날뛴다. 아니 싸움의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요 기갈뿐이다.
 
  석탄덩이가 어둠 속에서 날린다.
 
  두 주먹으로 철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세상과 담쌓은 이 암흑의 공간에서 아무리 들볶아친다 하여도 그것은 결국 이 버림받은 공간에서의 헛된 노력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독에 빠진 쥐의 필사적 노력이 독 밖의 세상과는 아무 인연을 가지지 못한 것같이.
 
  “아――ㅅ!”
 
  “물 물 무――ㄽ!”
 
  그는 몸을 철벽에 부딪히면서 마지막 힘을 내었다.
 
  급한 걸음으로 쇠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발자취가 있다.
 
  발자취소리는 석탄고 앞에서 그쳤다.
 
  회중전등의 광선이 달덩이 같은 윤곽을 석탄고 문 위에 어지럽게 던진다.
 
  광선은 칠 벗은 검붉은 페인트 위에 한 점을 노리더니 그곳이 마침 열쇠로 열렸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어둠이 앞을 협박한다. 회중전등의 광선이 석탄고 속을 어지럽게 비취더니 나중에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처참한 청년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물!”
 
  “물!”
 
  두 팔을 내밀면서 그는 부르짖는다.
 
  세상과 인연 끊겼던 이 암흑으 공간에 한 줄기의 광명을 인도한 사람은 살로의 보이였다.
 
  “미안하에.”하면서 그는 청년을 붙들고 그의 입에 물병을 기울인다.
 
  “술을 따러라 잔을 날러라 하면서 놈들이 잠시라도 놓아야지.”
 
  보이는 사과하는 듯이 그를 위로한다.
 
  정신없이 물을 켜던 청년은 입을 씻고 숨을 내쉬인다.
 
  “정신을 차리고 이것을 먹게!”
 
  보이는 가져왔던 바스켓을 열고 가지가지의 먹을 것을 낸다.
 
  고기, 빵, 과일, 그리고 금빛 레테르 붙은 이름모를 고급 양주――일등 선객의 요리를 감춘 것이니 범연할 리 없다.
 
  “그들의 한 때의 양을 줄이면 우리의 열 때의 양은 찰 걸세.”
 
  고마운 권고에 청년은 신선한 식욕으로 빵조각을 뜯으면서 동무에게 묻는다.
 
  “대관절 몇 리나 남었나?”
 
  “눈 꾹 감고 하루만 더 참게.”
 
  “또 하루?”
 
  “하루만 참으면 목적한 곳에, 그리로 자네 일상 꿈꾸던 나라에 감쪽같이 내리게 되네.”
 
  “오―― 그 나라에!”
 
  청년은 빵조각을 떨어트리고 비장한 미소를 띠우면서 꿈꾸는 듯이 잠시 명상을 잠겼다가 감동에 넘쳐 흘러내리는 한 줄기 눈물을 부끄러운 듯이 손등으로 씻는다.
 
  “그곳에 가면 나도 이 놈의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까지의 생활을 버리겠네.”
 
  “아! 그곳에 가면 동무가 있다. 마우자와 같이 일하는 동무가 있다!”
 
  울려오는 배의 동요에 석탄덩이가 굴러 내린다.
 
  파도소리와 기관소리가 새롭게 을려 온다.
 
  “그럼 난 그만 가보겠네. 종일 동안만은 충실해야 하잖겠나.”
 
  동무는 자리를 일어선다.
 
  “하루! 배나 든든히 채우고 하루만 꾹 참게. 틈나는 대로 그들의 눈을 피해 내 또 한번 오리.”
 
  회중전등을 청년의 손에 쥐이고 입었던 속옷을 한 꺼풀 벗어 몸을 둘러주고는 그는 석탄고를 나갔다.
 
  
  두 층으로 된 삼등 선실은 층 위나 층 아래가 다 만원이다.
+
우리는 일부러 두려운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로 마음을 떠보았으나 이렇듯한 새삼스러운 공포의 감정이라는 것은 솟지 않았다.
  오래지 않은 항해이지만 동요와 괴롬에 지친 수많은 얼굴들이 생기를 잃고 떡잎같이 시들었다.
 
  누덕 감발에 머리를 질끈 동이고 ‘돈 벌러’ 가는 사람이 있다. ――돈 벌기 좋다던  ‘부령 청진 가신 낭군’이 이제 또다시 ‘돈 벌기 좋은’ 북으로 가는 것이다. 미주 동부 사람들이 금 나는 서부 캘리포니아를 꿈꾸듯이 그는 막연히 ‘금덩이 구는’ 북국을 환상하고 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다 같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막연히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 중에는 ‘삼년 동안이나 한 잎 두 잎 모아 두었던 동전’으로 마지막 뱃삯을 삼아서 떠난 오십이 넘은 노인도 있다.
 
  ‘서울로 공부 간다고 집 떠난지 열세 해만에 아라사에 가서 객사한’ 아들의 뼈를 추리러 가는 불쌍한 어머니도 있다.
 
  색달리 옷 입고 분 바른 젊은 여자는 역시 ‘돈 벌기 좋은 항구’를 찾아 가는 항구의 여자이다. ‘돈 많은 마우자는 빛깔 다른 조선계집을 유달리 좋아한다’니 ‘그런 나그네는 하룻밤에 둘만 겪어도 한달 먹을 것은 넉넉히 생긴다’는 ‘돈 많은 항구’를 찾아가는 여자이다.
 
  이 여러 가지 층의 사람 숲에 섞여서 입으로 무엇인지 중얼중얼 외는 청년이 있다.
 
  품에 지닌 만국지도 한 권과 손에 든 로서아어의 회화책 한 권이 그의 전 재산이다.
 
  거개 배에 취하여 악취에 코를 박고 드러누운 그 가운데에서 그만은 말끔한 정신을 가지고 로서아어 단어를 한마디 한마디 외워간다.
 
  ‘가난한 노동자’ ―― ‘베드느이 라보――취이’
 
  ‘역사’ ―― ‘이스트――리야’
 
  ‘전쟁’ ―― ‘보이나’
 
  책을 덮고 눈을 감고 다시 한마디 한마디 속으로 외워간다.
 
  ‘깃발’ ―― ‘즈나――먀’
 
  ‘아름다운 내일’ ―― ‘크라시브이 자브트라’
 
  창구멍같이 뽕 뚫린 선창에는 파도가 출렁출렁 들이친다.
 
  흐린 유리창 밖으로 안개 깊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젊은 여자 그에게는 며칠 전 항구를 떠날 때의 생각이 가슴속에 떠오른다.
 
  ――윈치가 덜컥덜컥 닻 감는 소리 항구 안에 요란히 울렸다. 닻이 감기자 출범의 기적소리 뚜――하고 길게 울리며 배가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부두와 갑판에서 보내고 가는 사람 손 흔들며 소리 지르며 수건 날렸다. 어머니도 오빠도 이웃 사람도 자기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배와 부두의 거리가 멀어지자 그에게는 눈물이 푹 솟았다. 어쩐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것 같아서 배가 항구를 벗어나 산모롱이를 돌 때까지 정든 산천을 돌아보며 그는 눈물지었다. 눈물지었다! 눈물을 담뿍 뿜은 깊은 안개 선창 밖에 서리었고 개일 줄 모르는 애수 흐린 가슴속에 서리었다.
 
  대모테와 ‘마우자’는 무언지 여전히 은근히 지껄이며 삼등선실 안으로 들어와 각각 자리로 간다.
 
  로서아어에 정신없던 청년은 ‘마우자’를 보자 웃음을 띠우며 무언지 말하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는 듯하다.
 
  "'''루스키 하라쇼'''!"<ref>루스키 하라쇼: '러시아(인) 좋아요!'라는 뜻이다.</ref>
 
  "'''루스키 하라쇼'''!"
 
  능치 못한 말로 되구말구 그는 이렇게 호의를 표한다.
 
  ‘마우자’ 역시 반가운 듯이 웃음을 띠우며 그에게로 손을 내민다.
 
  
  밤은 깊었다.
+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풀이요―---주위에 어둠이 있을 뿐이지 모두가 결국 낮 동안의 계속이요 연장이다. 몸에 소름이 돋는 법도 마음이 떨리는 법도 없다.
  바다도 깊고 하늘도 깊고.
 
  깊은 하늘 먼 한편에 별 하나 반짝반짝.
 
  연해의 하늘에 굽이친 연봉도 깊은 잠 속에 그의 윤곽을 감추었다.
 
  높은 마스트 위에 붉은 불 푸른 불이 잠자는 밤의 아련한 숨소리같이 날 뿐이요 갑판 위는 고요하다. 고요한 갑판 난간에 의지하여 얕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으니 대모테와 마우자이다.
 
  인기척 없고 발자취소리 끊어진 갑판 위에서 그래도 그들은 가끔 뒤를 둘러보며 무언지 은근히 의론한다.
 
  뱃전을 고요히 스치는 파도소리가 때때로 그들의 회화를 끊을 뿐이다.
 
</blockquote>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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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눈만 말똥거리다가 피곤하여 어느결엔지 잠이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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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잠을 깨었을 때는 아침 해가 높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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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의 밤은 시원하였을 뿐이요, 공포의 새는 결국 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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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포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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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들에서 온 것이 아니요 마을에서―---사람에게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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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를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요 사람의 사회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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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가 돌연히 끌려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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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사건의 뒤맺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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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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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에 대하여 혹은 문수와 관련되어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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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밤을 지우고 쉽게 나왔으나 문수는 소식이 없다. 오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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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재미있는 여름의 계획도 세웠으나 혼자서는 하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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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졌던 동무를 잃었을 때의 고독이란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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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서 무료히 지내는 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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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파적으로 옥분을 데려올까도 생각되나 여러 가지로 거리끼고 주체스런 일이다. 깨끗한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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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수없이 녀석이 하루라도 속히 나오기를 충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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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거든 풋콩을 실컷 구워 먹이고 기름종개를 많이 떠먹이고 씨름해서 몸을 불려 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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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는 도라지꽃이 피고 개나리꽃이 장하다.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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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900" height="600" src="https://hwiki.eumstory.co.kr/work/N/2111207/sample1.htm/노령근해최종이라고.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html>
 
  
==작성자 및 기여자==
+
진펄의 새발고사리도 어느덧 활짝 피었다.
[[그레이색이야조]]의
 
[[김선영]]
 
  
==각주==
+
해오라기가 가끔 조촐한 자태로 물가에 내린다.
<references/>
 
  
==출처==
+
시절이 무르녹았다.
[기사]
 
  
안영옥, '도시 빈민층 현실·사회 부조리 고발', [http://www.kado.net 강원도민일보], 2016.07.09
 
  
[작품]
+
==네트워크 그래프==
  
노령근해,[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7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일: 2022.06.03.
+
==작성자 및 기여자==
 +
[[그레이색이야조]]의
 +
[[김예람]]
  
노령근해, 공유마당, 이효석, 만료 저작물
 
노령근해 해설, [http://ko.kliterature.wikidok.net/wp-d/57a9bec0582734cf0f4111df/View WIKIDOK]
 
  
<a href="https://www.flaticon.com/kr/free-icons/" title="규모 아이콘">규모 아이콘  제작자: Freepik - Flaticon</a>
+
==참고문헌==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59235&cid=46645&categoryId=46645 네이버 지식백과 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s://ko.wikisource.org/wiki/%EB%93%A4 위키문헌 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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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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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빈부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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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자연찬미적]]
[[분류: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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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정적]]
[[분류:러시아]]
 
[[분류:이효석 단편집]]
 

2022년 6월 15일 (수) 17:48 판




개요

이효석이 1936년 『신동아(新東亞)』 2·3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자연 친화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를 활용하여, 생명의 근원인 들에 대한 찬미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에 대해 서술했다.

내용

줄거리 요약 주인공 ‘나’는 인위적 세계를 벗어난 자연환경 속에서의 본능적인 생활에 희열을 느낀다. 그러던 중에 들녘에서 개 한 쌍이 벌이는 교미 장면을 우연히 함께 보게 된 나와 옥분은 달빛이 쏟아지는 딸기밭에서 자신들도 마치 자연의 일부분이 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정사를 벌이게 된다.

등장인물 - 나 : 이 소설의 화자이다. 정확한 사연은 잘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학교에서의 일 때문에 퇴학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는 인물이다. ‘나’는 도시적인 삶보다는 자연적인 야성에 가까운 인물이다. 옥분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민하지만, 문수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누그러진다. - 문수 : 화자인 ‘나’의 친구. 학교문제로 퇴학을 당하고 결국은 학교 사건으로 인하여 끌려간다. - 옥분 : 군청고원 득추와의 파혼으로 인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여인. 들과도 같은 야성을 의미한다. 화자인 ‘나’와, ‘문수’와 정을 통한다.

배경 - 공간적 → 강과 들이 어우러진 시골(작가 이효석의 고향인 봉평으로 추정) - 시간적 → 일제 치하

이야기 구성 -발단 : 소설 화자인 ‘나’의 들에 대한 찬양 - 전개 : 옥분과의 만남(둑에서 한쌍의 자웅이 농탕치고 있을 때) - 위기 : 옥분과 정을 통하고, 문수는 학교에서 퇴학당함. - 절정 : 문수가 학교 사건의 마무리로 끌려감 - 결말 : 화자인 ‘나’의 자연에 대한 생각


특징

<들>은 동반자작가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작품으로, 이효석 작품의 개성적 차원이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짐승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그 의도를 선명히 드러낸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자연친화적인 사상과 생명성에 대한 찬미가 현실의 부정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잘 나타나고 있다. 동물들의 본능적 행위와 인간의 탈윤리적 행위를 아름다운 본능의 표출로 표현하고 있다. 성(性)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이전의 순수한 본능으로 보고자 한 이효석의 ‘에덴의식’, 즉 원죄에 대한 찬가는 그가 이데올로기적인 문학에 한때 동조하였고 그것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돌아섰던 만큼 더욱 강하게 그의 문학적 특질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이효석 문학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문체는 장식적 수사가 많은 서술적 문체이다. 거기에다 서정적인 묘사로 일관되어 있어 수필과 혼동하기 쉽다. 특히, 전원풍경의 묘사에는 토속어로 된 풀이름·꽃이름 등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목에서 강한 음악적 율동감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시적 소설이라든가 한편의 서정시라 말하는 이유는 이런 점에서도 기인할 것이다.


전문

1


꽃다지, 길경이, 나생이, 딸장이, 먼둘네,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초, 씀바구, 돌나물, 비름, 능쟁이.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은 것이―---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흙빛에서 초록으로―---이 기막힌 신비에 다시 한번 놀라 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 놓을까. 바닷물을 고래같이 들이켰던가. 하늘의 푸른 정기를 모르는 결에 함빡 마셔 두었던가. 그것을 빗물에 풀어 시절이 되면 땅 위로 솟쳐 보내는 것일까. 그러나 한 포기의 풀을 뽑아 볼 때 잎새만이 푸를 뿐이지 뿌리와 흙에는 아무 물들인 자취도 없음은 웬일일까. 시험관 속 붉은 물에 약품을 넣으면 그것이 금시에 새파랗게 변하는 비밀―---그것과도 흡사하다. 이 우주의 비밀의 약품―---그것은 결국 알 바 없을까. 한 톨의 보리알이 열 낟으로 나는 이치는 가르치는 이 있어도 그 보리알에서 푸른 잎이 돋는 조화의 동기는 옳게 말하는 이 없는 듯하다. 사람의 지혜란 결국 신비의 테두리를 뱅뱅 돌 뿐이요, 조화의 속의 속은 언제까지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일 듯싶다. 초록 풀에 덮인 땅 속의 뜻은 초록 옷을 입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엿볼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이다.

얀들얀들 나부끼는 초목의 양자는 부드럽게 솟는 음악. 줄기는 굵고 잎은 연한 멜로디의 마디마디이다. 부피 있는 대궁은 나팔 소리요, 가는 가지는 거문고의 음률이라고도 할까.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그것이 봄의 걸음이다. 풀 위에 누워 있으면 은근한 음악의 율동에 끌려 마음이 너볏너볏 나부낀다.

꽃다지, 질경이, 민들레…… 가지가지 풋나물을 뜯어 먹으면 몸이 초록으로 물들 것 같다. 물들어야 될 것 같다. 물들어야 옳을 것 같다. 물들지 않음이 거짓말이다. 물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새가 지저귄다. 꾀꼬리일까.

지평선이 아롱거린다.

들은 내 세상이다.


2


언제까지든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으면 나중에는 현기증이 나며 눈이 둘러빠질 듯싶다. 두 눈을 뽑아서 푸른 물에 채웠다가 라무네병 속의 구슬같이 차진 놈을 다시 살 속에 박아 넣은 것과도 같이 눈망울이 차고 어리어리하고 푸른 듯하다. 살과는 동떨어진 유리알이다. 그렇게도 하늘은 맑고 멀다. 눈이 아픈 것은 그 하늘을 발칙하게도 오랫동안 우러러본 벌인 듯싶다. 확실히 마음이 죄송스럽다. 반나절 동안 두려움 없이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착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장 용기 있는 악한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도 푸른 하늘은 거룩하다.

눈을 돌리면 눈물이 푹 쏟아진다. 벌판이 새파랗게 물들어 눈앞에 아물아물한다. 이런 때에는 웬일인지 구름 한 점도 없다. 곁에는 한 묶음의 꽃이 있다. 오랑캐꽃, 고들뱅이, 노고초, 새고사리, 가처무릇, 대게, 맛탈, 차치광이. 나는 그것을 섞어 틀어 꽃다발을 겯기 시작한다. 각색 꽃판과 꽃술이 무릎 위에 지천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헤어지는 석류알보다도 많다.

나는 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졌는지를 모른다. 지금에는 한 그릇의 밥, 한 권의 책과 똑같은 지위를 마음속에 차지하게 되었다. 책에서 읽은 이론도 아니요, 얻어들은 이치도 아니요, 몇 해 동안 하는 일 없이 들과 벗하고 지내는 동안에 이유 없이 그것은 살림 속에 푹 젖었던 것이다. 어릴 때에 동무들과 벌판을 헤매며 찔레를 꺾으러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고 소똥버섯을 따다 화로 속에 굽고, 메를 캐러 밭이랑을 들치며 골로 말을 만들어 끌고 다니노라고 집에서보다도 들에서 더 많이 날을 지우던―---그때가 다시 부활하여 돌아온 셈이다. 사람은 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에 있는 것 같다.

자연과 벗하게 됨은 생활에서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까. 식물적 애정은 반드시 동물적 열정이 진한 곳에 오는 것일까. 학교를 쫓기어 서울을 물러오게 된 까닭으로 자연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동무들과 골방에서 만나고 눈을 기여 거리를 돌아치다 붙들리고 뛰다 잡히고 쫓기고―---하였을 때의 열정이나 지금에 들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일반이다. 지금의 이 기쁨은 그때의 그 기쁨과도 흡사한 것이다. 신념에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라고 인간 이상이 아닐 것과 같이 들을 사랑하는 졸부라고 인간 이하는 아닐 것이다. 아직도 굳은 신념을 가지면서 지난날에 보던 책들을 들척거리다가도 문득 정신을 놓고 의미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때가 많다.

"학보, 이제는 고향이 마음에 붙는 모양이지."

마을 사람들은 조롱도 아니요 치사도 아닌 이런 말을 던지게 되었고, 동구 밖에서 만나는 이웃집 머슴은 인사 대신에 흔히,

"해동지 늪에 붕어떼 많던가."

고기사냥 갈 궁리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십리정 보리 고개 숙었던가."

하고 곡식의 소식을 묻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보다도 내가 더 들과 친하고 곡식의 소식을 잘 알게 된 증거이다.

나는 책을 외듯이 벌판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외고 있다.

마음속에는 들의 지도가 세밀히 박혀 있고 사철의 변화가 표같이 적혀 있다. 나는 들사람이요 들은 내 것과도 같다.

어느 논두덩의 청대콩이 가장 진미이며 어느 이랑의 감자가 제일 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발고사리가 많이 피어 있는 진펄과 종달새 뜨는 보리밭을 짐작할 수 있다. 남대천 어느 모퉁이를 돌 때 가장 고기가 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개리, 쇠리, 불거지가 덕실덕실 끓는 여울과 미여기, 뚜구뱅이가 잠겨 있는 웅덩이와 쏘가리 꺽지가 누워 있는 바위 밑과―---매재와 고들매기를 잡으려면 철교께서도 몇 마장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과 쇠치네와 기름종개를 뜨려면 얼마나 벌판을 나가야 될 것을 안다. 물 건너 귀룽나무 수풀과 방치골 으름덩굴 있는 곳을 아는 것은 아마도 나뿐일 듯싶다.

학교를 퇴학맞고 처음으로 도회를 쫓겨 내려왔을 때에 첫걸음으로 찾은 곳은 일갓집도 아니요, 동무집도 아니요, 실로 이 들이었다. 강가의 사시나무가 제대로 있고 버들숲 둔덕의 잔디가 헐리지 않았으며 과수원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이란 형언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란 곧 산천을 사랑하고 벌판을 반가워하는 심정이 아닐까. 이런 자연의 풍물을 내놓고야 고향의 그림자가 어디에 알뜰히 남아 있는가. 헐리어 가는 초가지붕에 남아 있단 말인가. 고향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면서도 그리운 것은 더 많이 들과 시냇물이다.


3


시절은 만물을 허랑하게 만드는 듯하다.

짐승은 드러내놓고 모든 것을 들의 품속에 맡긴다.

새풀 숲에서 새 둥우리를 발견한 것을 나는 알 수 없이 기쁘게 여겼다. 거룩한 것을―---아름다운 것을―---찾은 느낌이다. 집과 가족들을 송두리째 안심하고 땅에 맡기는 마음씨가 거룩하다. 풀과 깃을 모아 두툼하게 결은 둥우리 안에는 아직 까지 않은 알이 너덧 알 들어 있다. 아롱아롱 줄이 선 풋대추만큼씩 한 새알. 막 뛰어나려는 생명을 침착하게 간직하고 있는 얇은 껍질―---금시에 딸깍 두 조각으로 깨뜨려질 모태―---창조의 보금자리!

그 고요한 보금자리가 행여나 놀라고 어지럽혀질까를 두려워하여 둥우리 기슭에 손가락 하나 대기조차 주저되어 나는 다만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풀포기를 제대로 덮어놓고 감쪽같이 발을 옮겨 놓았다. 금시에 알이 쪼개지며 생명이 돋아날 듯싶다. 등뒤에서 새가 푸드득 날아 뜰 것 같다. 적막을 깨뜨리고 하늘과 들을 놀래며 푸드득 날았다! 생각에 마음이 즐겁다.

그렇게 늦게 까는 것이 무슨 새일까. 청새일까. 덤불지일까. 고요하게 뛰노는 기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목소리를 내서 노래라도 부를까 느끼며 둑 아래로 발을 옮겨 놓으려다 문득 주춤하고 서버렸다.

맹랑한 것이 눈에 뜨인 까닭이다. 껄껄 웃고 싶은 것을 참고 풀 위에 주저앉았다. 그 웃고 싶은 마음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던 마음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 맹랑한 풍경이 나의 마음을 결코 노엽히거나 모욕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까와 똑같은 기쁨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일반으로 창조의 기쁨을 보여 준 것이다.

개울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겁내지 않고 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꺼리는 법 없이 자웅은 터놓고 마음의 자유를 표현할 뿐이다. 부끄러운 것은 도리어 이쪽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중없이 오랫동안 그 요절할 광경을 바라보기가 몹시도 겸연쩍었다. 확실히 시절의 탓이다. 가령 추운 겨울 벌판에서 나는 그런 장난을 목격한 일이 없다. 역시 들이 푸를 때 새가 늦은 알을 깔 때 자웅도 농탕치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성내서는 비웃어서는 안 되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 어디서부터인지 자웅에게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킬킬킬킬 웃음 소리가 나며 두 번째 것이 날았다. 가제나 몸이 떨어지지 않는 자웅은 그제야 겁을 먹고 흘금흘금 눈을 굴리며 어색한 걸음으로 주체스런 두 몸을 비틀거렸다. 나는 나 이외에 그 광경을 그때까지 은근히 바라보고 있던 또 한 사람이 부근에 숨어 있음을 비로소 알고 더한층 부끄러운 생각이 와락 나며 숨도 크게 못 쉬고 인기척을 죽이고 잠자코만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세 번째 돌멩이가 날리더니 이윽고 호담스런 웃음 소리가 왈칵 터지며 아래편 숲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덥석 뛰어나왔다. 빨래함지를 인 채 한 손으로는 연해 자웅을 쫓으면서 어깨를 떨며 웃음을 금할 수 없다는 자세였다.

그 돌연한 인물에 나는 놀랐다. 한편 엉겼던 마음이 풀리기도 하였다. 옥분이었다. 빨래를 하고 나자 그 광경이매 마음속 은밀히 흠뻑 그것을 즐기고 난 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의 놀람보다도 옥분이가 문득 나를 보았을 때의 놀람―---그것은 몇 곱절 더 큰 것이었다. 별안간 웃음을 뚝 그치고 주춤 서는 서슬에 머리에 이었던 함지가 왈칵 떨어질 판이었다. 얼굴의 표정이 삽시간에 검붉게 질려 굳어졌다. 눈알이 땅을 향하고 한편 손이 어쩔 줄 몰라 행주치마를 의미 없이 꼬깃거렸다.

별안간 깊은 구렁이에 빠진 것과도 같은 그의 궁착한 처지와 덴 마음을 건져 주기 위하여 나는 마음에도 없는 목소리를 일부러 자아내어 관대한 웃음을 한바탕 웃으면서 그의 곁으로 내려갔다.

"빌어먹을 짐승들."

마음에도 없는 책망이었으나 옥분의 마음을 풀어 주자는 뜻이었다.

"득추녀석쯤이 너를 싫달 법 있니. 주제넘은 녀석!"

이어 다짜고짜로 그의 일신의 이야기를 집어낸 것은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자는 생각이었다. 군청고원 득추는 일껀 옥분과 성혼이 된 것을 이제 와서 마다고 투정을 내고 다른 감을 구하였다. 옥분의 가세가 빈한하여 들고날 판이므로 혼인한 뒤에 닥쳐올 여러 가지 귀치않은 거래를 염려하여 파혼한 것이 확실하다. 득추의 그런 꾀바른 마음씨를 나무라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개 고원의 불신을 책하였다.

"배반을 당하고 분하지도 않으냐."

"모른다."

옥분은 도리어 짜증을 내며 발을 떼놓았다.

"그 녀석 한번 해내 줄까."

웬일인지 그에게로 쏠리는 동정을 금할 수 없다.

"쓸데없는 짓 할 것 있니."

동정의 눈치를 알면서도 시침을 떼는 옥분의 마음씨에는 말할 수 없이 그윽한 것이 있어 그것이 은연중에 마음을 당긴다.

눈앞에 멀어지는 그의 민출한 자태가 가슴속에 새겨진다. 검은 치마폭 밑으로 드러난 불그레한 늠츳한 두 다리―---자작나무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헐벗기 때문에 한결 빛나는 것, 세상에도 가지고 싶은 탐나는 것이다.


4


일요일인 까닭에 오래간만에 문수와 함께 둑 위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날마다 거리의 학교에 가야 하는 그를 자주 붙들어 낼 수는 없다. 일요일이 없는 나에게도 일요일이 있는 것이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둑에 오르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이 시원하다. 바닷바람이 아직 조금 차기는 하나 신선한 맛이다. 잔디밭에는 간간이 피지 않은 해당화 봉오리가 조촐하게 섞였으며 둑 맞은편에 군데군데 모여 선 백양나무 잎새가 햇빛에 반짝반짝 나부껴 은가루를 뿌린 것 같다.

문수는 빌려 갔던 몇 권의 책을 돌려 주고 표해 두었던 몇 구절의 뜻을 질문하였다. 나는 그에게는 하루의 선배인 것이다. 돈독하게 뛰어 주는 것이 즐거운 의무도 되었다.

'공부'가 끝난 다음 책을 덮어 두고 잡담에 들어갔을 때에 문수는 탄식하는 어조였다.

"학교가 점점 틀려 가는 모양이다."

구체적 실례를 가지가지 들고 나중에는 그 한 사람의 협착한 처지를 말하였다.

"책 읽는 것까지 들키었네. 자네 책도 뺏길 뻔했어."

짐작되었다.

"나와 사귀는 것이 불리하지 않은가."

"자네 걸은 길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뻔하지. 차라리 그편이 시원하겠네."

너무 궁박한 현실 이야기만도 멋없어 두 사람은 무릎을 툭 털고 일어서 기분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아는 말 아는 곡조를 모조리 불렀다.

노래가 진하면 번갈아 서서 연설을 하였다. 눈앞에 수많은 대중을 가상하고 목소리를 다하여 부르짖어 본다. 바닷물이 수물거리나 어쩌나, 새들이 놀라서 떨어지나 어쩌나를 시험하려는 듯이도 높게 고함쳐 본다. 박수하는 사람은 수만의 대중 대신에 한 사람의 동무일 뿐이나 지껄이는 동안에 정신이 흥분되고 통쾌하여 간다. 훌륭한 공부 이외 단련이다.

협착한 땅 위에 그렇게 자유로운 벌판이 있음이 새삼스러운 놀람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말을 외쳐도 거기에서만은 '중지'를 당하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땅 위는 좁으면서도 넓은 셈인가.

둑은 속 풀리는 시원한 곳이며 문수와 보내는 하루는 언제든지 다시없이 즐거운 날이다.


5


과수원 철망 너머로 엿보이는 철늦은 딸기―---잎새 사이로 불긋불긋 돋아난 송이 굵은 양딸기―---지날 때마다 건강한 식욕을 참을 수 없다.

더구나 달빛에 젖은 딸기의 양자란 마치 크림을 끼얹은 것과도 같아서 한층 부드럽게 빛난다.

탐나는 열매에 눈독을 보내며 철망을 넘기에 나는 반드시 가책과 반성으로 모질게 마음을 매질하지는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누구의 과수원이든 간에 철망을 넘는 것은 차라리 들사람의 일종의 성격이 아닐까.

들사람은 또한 한편 그것을 용납하고 묵인하는 아량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해 동안에 완전히 이 야취의 성격을 얻어 버린 것 같다.

흐뭇한 송이를 정신없이 따서 입에 넣으면서도 철망 밖에서 다만 탐내고 보기만 할 때보다 한층 높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됨은 도리어 웬일일까. 입의 감동이 눈의 감동보다 떨어지는 탓일까. 생각만 할 때의 감동이 실상 당하였을 때의 감동보다 항용 더 나은 까닭일까. 나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는 불과 몇 송이의 딸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차라리 벌판에 지천으로 열려 언제든지 딸 수 있는 들딸기 편이 과수원 안의 양딸기보다 나음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철망을 넘었다.

멍석딸기, 중딸기, 장딸기, 나무딸기, 감대딸기, 곰딸기, 닷딸기, 배암딸기…….

능금나무 그늘에 난데없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자 황급히 뛰어넘다 철망에 걸려 나는 옷을 찢었다. 그러나 옷보다도 행여나 들키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가 앞서 허둥허둥 풀 속을 뛰다가 또 공교롭게도 그가 옥분임을 알고 마음이 일시에 턱 놓였다. 그 역 딸기밭을 노리고 있던 터가 아닐까. 철망 기슭을 기웃거리며 능금나무 아래 몸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던가.

언제인가 개천 둑에서 기묘하게 만난 후 두 번째의 공교로운 만남임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퍽으나 헐하게 놓여졌다. 가까이 가서 시룽시룽 말을 건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그 역시 스스러워하지 않고 수월하게 말을 받고 대답하고 하였다. 전날의 기묘한 만남이 확실히 두 사람의 마음을 방긋이 열어 놓은 것 같다.

"딸기 따줄까?"

"무서워!"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나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른다. 나는 떨리는 그의 팔을 붙들고 풀밭을 지나 버드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술은 딸기보다도 더 붉다. 확실히 그는 딸기 이상의 유혹이었다.

"무서워."

"무섭긴."

하고 달래기는 하였으나 기실 딸기를 훔치러 철망을 넘을 때와 똑같이 가슴이 후둑후둑 떨림을 어쩌는 수 없었다. 버드나무 잎새 사이로 달빛이 가늘게 새어들었다. 옥분은 굳이 거역하려고 하지 않았다.

양딸기 맛이 아니요, 확실히 들딸기 맛이었다. 멍석딸기 나무딸기의 신선한 감각에 마음은 흐뭇이 찼다.

아무리 야취의 습관에 젖었기로 철망 너머 딸기를 딸 때와 일반으로 아무 가책도 반성도 없었던가. 벌판서 장난치던 한 자웅의 짐승과 일반이 아닌가. 그것이 바른가, 그래서 옳을까 하는 한 줄기의 곧은 생각이 한결같이 뻗쳐 오름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판단은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


6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귀치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뱅 돈다. 어수선한 마음을 활짝 씻어 버릴 양으로 아침부터 그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물을 후릴 곳을 찾으면서 남대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간 것이 시적시적 걷는 동안에 어느덧 철교께서도 근 십 리를 올라가게 되었다. 아무 고기나 닥치는 대로 잡으려던 것이 그렇게 되고 보니 불현듯이 고들매기를 후려 볼 욕심이 솟았다. 고기사냥 중에서도 가장 운치 있고 흥 있는 고들매기 사냥에 나는 몇 번인지 성공한 일이 있어 그 호젓한 멋을 잘 안다. 그중 많이 모여 있을 듯이 보이는 그럴듯한 여울을 점쳐 첫 그물을 던져 보기로 하였다.

산속에 오목하게 둘러싸인 개울―---물도 맑거니와 물소리도 맑다. 돌을 굴리는 여울 소리가 티끌 한 점 있을 리 없는 공기와 초목을 영롱하게 울린다. 물 속에 노는 고기는 산신령이나 아닐까.

옷을 활짝 벗어붙이고 그물을 메고 물 속에 뛰어들었다. 넉넉히 목욕을 할 시절임에도 워낙 산골물이라 뼈에 차다. 마음이 한꺼번에 씻겨졌다느니보다도 도리어 얼어붙을 지경이다. 며칠 내로 내려오던 어수선한 생각이 확실히 덜해지고 날아갔다고 할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가지 생각이 아직도 철사같이 가늘게 꿰뚫고 흐름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람의 사이란 그렇게 수월할까.'

옥분과의 그날 밤 인연이 어처구니없게 쉽사리 맺어진 것이 의심쩍은 것이었다. 아무 마음의 거래도 없던 것이 달빛과 딸기에 꼬임을 받아 그때 그 자리에서 금방 응낙이 되다니. 항용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두 사람의 마음의 교섭이란 이야기 속에서 읽을 때에는 기막히게 장황하고 지리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수월할 리 있을까. 들 복판에서는 수월한 법인가.

'책임 문제는 생기지 않는가?'

생각은 다시 솔솔 풀린다. 물이 찰수록 생각도 점점 차게만 들어간다.

물이 다리목을 넘게 되었을 때 그쯤에서 한 훌기 던져 보려고 그물을 펴들고 물 속을 가늠해 보았다. 속물이 꽤 세어 다리를 훌친다. 물때 낀 돌멩이가 몹시 미끄러워 마음대로 발을 디딜 수 없다. 누르칙칙한 물 속이 적확히 보이지 않는다. 몇 걸음 아래편은 바위요 바위 아래는 소가 되어 있다.

그물을 던질 때의 호흡이란 마치 활을 쏠 때의 그것과도 같이 미묘한 것이어서 일종의 통일된 정신과 긴장된 자세를 요구하는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그러면서도 그때 자칫하여 기어이 실수를 하게 된 것은 필시 던지는 찰나까지도 통일되지 못한 마음이 어수선하고 정신이 까닥거렸음이 확실하다. 몸이 휘뚱하고 휘더니 휭하게 날아야 할 그물이 물 위에 떨어지자 어지럽게 흩어졌다. 발이 미끄러져 센 물결에 다리가 쓸리니까 그물은 손을 빠져 달아났다. 물 속에 넘어져 흐르는 몸을 아무리 버둥거려야 곧추 일으키는 장사 없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히나 별수없이 몸은 흐를 대로 흐르고야 말았다.

바위에 부딪쳐 기어코 소에 빠졌다. 거품을 날리는 폭포 속에 송두리째 푹 잠겼다가 휘엿이 솟으면서 푸른 물속을 뱅 돌았다. 요행 헤엄의 습득이 약간 있던 까닭에 많은 고생 없이 허부적거리고 소를 벗어날 수는 있었다.

면상과 어깻죽지에 몇 군데 상처가 있었다. 피가 돋았다. 다리에는 군데군데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음을 보았다. 잃어버린 그물은 어느 줄기에 묻혀 흐르는지 알 바도 없거니와 찾을 용기도 없었다. 고들매기는 물론 한 마리도 손에 쥐어 보지 못하였다.

귀가 메이고 코에서는 켰던 물이 줄줄 흘렀다. 우연히 욕을 당하게 된 몸동아리를 훑어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별안간 옥분의 몸이―---향기가 눈앞에 흘러왔다. 비밀을 가진 나의 몸이 다시 돌아보이며 한동안 부끄러운 생각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7


문수는 기어코 학교를 쫓겨났다. 기한 없는 정학처분이었으나 영영 몰려난 것과 같은 결과이다. 덕분에 나도 빌려 주었던 책권을 영영 뺏긴 셈이 되었다.

차라리 시원하다고 문수는 거드름 부렸으나 시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들볶는 바람에 그는 집을 피하여 더 많이 나와 지내게 되었다. 원망의 물줄기는 나에게까지 튀어 왔다. 나는 애매하게도 그를 타락시켜 놓은 안된 놈으로 몰릴 수밖에는 없다.

별수없이 나날을 들과 벗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들의 동무를 얻은 셈이다.

풀밭에 서면 경주를 하고 시냇가에 서면 납작한 돌을 집어 물 위에 수제비를 뜨기가 일쑤다. 돌을 힘껏 던져 그것이 물 위를 뛰어가는 뜀수를 세는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이 최고 기록이다. 돌은 굴러갈수록 걸음이 좁아지고 빨라지다 나중에는 깜박 물 속에 꺼진다. 기차가 차차 멀어지고 작아지다 산모퉁이에서 깜박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재미있는 장난이다. 나는 몇 번이고 싫지 않게 돌을 집어 시험하는 것이었다.

팔이 축 처지게 되면 다시 기운을 내어 모래밭에 겨루고 서서 씨름을 한다. 힘이 비등하여 승패가 상반이다. 떠밀기도 하고 샅바씨름도 하고 잡아나꾸기도 하고―---다리걸이 딴죽치기―---기술도 차차 늘어 가는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장하고 제일 크고 제일 아름답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바른 것이 무엇이냐?"

되고말고 수수께끼를 걸고,

"힘이다!"

라고 껄껄껄껄 웃으면 오장육부가 물에 헤운 듯이 시원한 것이다. 힘! 무슨 힘이든지 좋다. 씨름을 해가는 동안에 우리는 힘에 대한 인식을 한층 새롭혀 갔다. 조직의 힘도 장하거니와 그것을 꾸미는 한 사람의 힘이 크다면 더한층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8


문수와 천렵을 나섰다.

그물을 잃은 나는 하는 수 없이 족대를 들고 쇠치네 사냥을 하러 시냇물을 훑어 내려갔다.

벌판에 냄비를 걸고 뜬 고기를 끓이고 밥을 지었다.

먹을 것이 거의 준비되었을 때, 더운 판에 목욕을 들어갔다.

땀을 씻고 때를 밀고는 깊은 곳에 들어가 물장구와 갸닥질이다. 어린아이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이 방울방울 날리는 물방울과 함께 하늘을 휘덮었다가는 쏟아지는 것이다.

물가에 나와 얼굴을 씻고 물을 들일 때에 문수는 다따가,

"어깨의 상처가 웬일인가?"

하고 나의 어깨의 군데군데를 가리켰다.

나는 뜨끔하면서 그때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고들매기 사냥과 거기에 관련된 옥분과의 일건이 생각났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에게까지 기일 바 못 되어 기어코 고기잡이 이야기와 따라서 옥분과의 곡절을 은연중 귀띔하여 주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태도였다.

"명예의 부상일세그려."

놀리고는 걱실걱실 웃는 것이다. 웃다가 문득 그치더니,

"이왕 말이 났으니 나도 내 비밀을 게울 수밖에는 없게 되었네그려."

정색하고 말을 풀어 냈다.

"옥분이―--- 나도 그와는 남이 아니야."

어안이 벙벙한 나의 어깨를 치며,

"생각하면 득추와 파혼된 후로부터는 달뜬 마음이 허랑해진 모양이데. 일종의 자포자기야. 죽일놈은 득추지. 옥분의 형편이 가엾기는 해."

나에게는 이상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문수에게 대하여 노염과 질투를 느끼는 대신에―---도리어 일종의 안심과 감사를 느끼는 것이었다. 괴롭던 책임이 모면된 것 같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이도 감정이 가벼워지고 엉겼던 마음이 풀리는 것이다. 이것은 교활하고 악한 심보일까. 그러나 나를 단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옥분의 허랑한 태도에 해결의 열쇠는 있다. 그의 태도가 마지막 책임을 져야 될 터이니까.

"왜 말이 없나? 거짓말로 알아듣나? 자네가 버드나무숲에서 만났다면 나는 풀밭에서 만났네."

여전히 잠자코만 있으면서 나는 속으로 한결같이 들의 성격과 마술과도 같은 자연의 매력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얼마나 이야기가 장황하였던지 밥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9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이런 때 마을은 더한층 지내기 어렵고 역시 들이 한결 낫다.

낮은 낮으로 해두고 밤을―---하룻밤을 온전히 들에서 보낸 적이 없다.

우리는 의논하고 하룻밤을 들에서 야영하기로 하였다.

들의 밤은 두려운 것일까―---이런 의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왕 의가 통한 후이니 이후로는 옥분이도 데려다가 세 사람이 일단의 '들의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문수의 의견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일종의 악취미라고 배척하였다. 과거의 피차의 정의는 정의로 하여 두고 단체생활에는 역시 두 사람이 적당하며 수효가 셋이면 어떤 경우에든지 반드시 기울고 불안정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나의 야성이 철저치 못한 까닭이 아닐까.

어떻든 두 사람은 들 복판에서 해를 넘기고 어둡기를 기다리고 밤을 맞이하였다.

불을 피우고 이야기하였다.

이야기가 장황하기 때문에 불이 마저 스러질 때에는 마을의 등불도 벌써 다 꺼지고 개 짖는 소리도 수습된 뒤였다. 별만이 깜박거리고 바닷소리가 은은할 뿐이다.

어둠은 깊고 넓고 무한하다.

창조 이전의 혼돈의 세계는 이러하였을까.

무한의 적막―---지구의 자전 공전의 소리도 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공포―---두려움이란 어디서 오는 감정일까.

어둠에서도 적막에서도 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일부러 두려운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로 마음을 떠보았으나 이렇듯한 새삼스러운 공포의 감정이라는 것은 솟지 않았다.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풀이요―---주위에 어둠이 있을 뿐이지 모두가 결국 낮 동안의 계속이요 연장이다. 몸에 소름이 돋는 법도 마음이 떨리는 법도 없다.

서로 눈만 말똥거리다가 피곤하여 어느결엔지 잠이 들어 버렸다.

단잠을 깨었을 때는 아침 해가 높은 후였다.

야영의 밤은 시원하였을 뿐이요, 공포의 새는 결국 잡지 못하였다.


10


그러나 공포는 왔다.

그것은 들에서 온 것이 아니요 마을에서―---사람에게서 왔다.

공포를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요 사람의 사회인 듯싶다.

문수가 돌연히 끌려간 것이다.

학교 사건의 뒤맺이인 듯하다.

이어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나 혼자에 대하여 혹은 문수와 관련되어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사흘 밤을 지우고 쉽게 나왔으나 문수는 소식이 없다. 오랠 것 같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여름의 계획도 세웠으나 혼자서는 하릴없다.

가졌던 동무를 잃었을 때의 고독이란 큰 것이다.

들에서 무료히 지내는 날이 많다.

심심파적으로 옥분을 데려올까도 생각되나 여러 가지로 거리끼고 주체스런 일이다. 깨끗한 것이 좋을 것 같다.

별수없이 녀석이 하루라도 속히 나오기를 충심으로 바랄 뿐이다.

나오거든 풋콩을 실컷 구워 먹이고 기름종개를 많이 떠먹이고 씨름해서 몸을 불려 줄 작정이다.

들에는 도라지꽃이 피고 개나리꽃이 장하다.

진펄의 새발고사리도 어느덧 활짝 피었다.

해오라기가 가끔 조촐한 자태로 물가에 내린다.

시절이 무르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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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그레이색이야조김예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