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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 견지에서 보면,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立約協商) 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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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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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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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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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6일 (일) 17: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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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66년,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을 말한다. 병인년에 서양 또는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배경

프랑스 해군 극동 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프 로즈 제독은 병인박해의 생존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분노했고 프랑스 정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1866년 7월 8일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청나라 섭정이자 총리 아문의 수석 대신인 공친왕에게 조선을 정복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다음 조선의 미래와 장래의 왕위를 나폴레옹 3세의 의지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 통보했다. 하지만 이는 벨로네 공사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한편 청나라는 매우 놀라서 조선을 변호하며 프랑스를 진정시키려는 한편 조선에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전개

강화도 공격

결과

의의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立約協商) 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이다.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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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