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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15일 충남 연기군 전동면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는 엄마, 아빠, 언니 둘, 오빠, 그리고 내가 막내. 큰언니랑은 여덟 살, 오빠랑은 다섯 살, 작은언니랑은 세 살 차이가 나는 사 남매였다. 엄마가 결혼을 일찍 하셨다. 스무 살에 결혼하시고, 큰 언니를 낳으셨다. 엄마랑 아빠랑은 일곱 살 차이,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스물여덟 살, 아빠는 서른다섯 살이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1970년대였고, 시골이었기 때문에 당시 부모님은 두 분 다 농사를 짓고 계셨다. 주로 밭농사,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가진 땅이 많지 않아서 다른 사람 땅에 농사를 지으시다가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두 분 다 직장을 다니셨다. 처음에는 두 분 다 공장에 다니시다가 아빠는 농장으로 옮기셨고, 엄마는 계속 공장에 다니셨다.
 
1974년 2월 15일 충남 연기군 전동면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는 엄마, 아빠, 언니 둘, 오빠, 그리고 내가 막내. 큰언니랑은 여덟 살, 오빠랑은 다섯 살, 작은언니랑은 세 살 차이가 나는 사 남매였다. 엄마가 결혼을 일찍 하셨다. 스무 살에 결혼하시고, 큰 언니를 낳으셨다. 엄마랑 아빠랑은 일곱 살 차이,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스물여덟 살, 아빠는 서른다섯 살이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1970년대였고, 시골이었기 때문에 당시 부모님은 두 분 다 농사를 짓고 계셨다. 주로 밭농사,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가진 땅이 많지 않아서 다른 사람 땅에 농사를 지으시다가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두 분 다 직장을 다니셨다. 처음에는 두 분 다 공장에 다니시다가 아빠는 농장으로 옮기셨고, 엄마는 계속 공장에 다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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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유치원이 있긴 했다. 학교 병설 유치원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언니 오빠들 모두 유치원은 가지 못했다. 우리 남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유치원을 다닌 아이가 없었다. 나도 유치원은 건너뛰었다. 어릴 때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는데, 크면서 이사를 가는 집은 많고 오는 집은 거의 없어서, 사람이 차츰 줄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이름은 조혜영. 그 친구도 고학년 때 전학을 갔다.
 
어릴 때, 유치원이 있긴 했다. 학교 병설 유치원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언니 오빠들 모두 유치원은 가지 못했다. 우리 남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유치원을 다닌 아이가 없었다. 나도 유치원은 건너뛰었다. 어릴 때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는데, 크면서 이사를 가는 집은 많고 오는 집은 거의 없어서, 사람이 차츰 줄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이름은 조혜영. 그 친구도 고학년 때 전학을 갔다.
 
학교 다닐 때는, 나름 모범생이었다. 당시는 학교에서 체벌이 용인되는 때였지만 단체 기합 등을 빼고는 선생님께 맞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때는 한 반에 애들이 드글드글 했다. 52명, 53명 해서 한 학년에 4반, 5반 정도. 시골이다 보니 전체 학생 수는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요즘 학교 한 반에 20명, 30명 있는 거에 비하면 교실도 적고 학교 자원 규모가 한정적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성장이 빨라서 나보다 키 큰 남자애들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63cm로, 지금의 키에 가까워졌다. 좋아했던 이성 친구는 없었고, 학교생활의 기억 대부분이 친구와의 기억이다. 한 반에서 다섯 명 정도 해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서 간식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같이 다녔다.
 
학교 다닐 때는, 나름 모범생이었다. 당시는 학교에서 체벌이 용인되는 때였지만 단체 기합 등을 빼고는 선생님께 맞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때는 한 반에 애들이 드글드글 했다. 52명, 53명 해서 한 학년에 4반, 5반 정도. 시골이다 보니 전체 학생 수는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요즘 학교 한 반에 20명, 30명 있는 거에 비하면 교실도 적고 학교 자원 규모가 한정적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성장이 빨라서 나보다 키 큰 남자애들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63cm로, 지금의 키에 가까워졌다. 좋아했던 이성 친구는 없었고, 학교생활의 기억 대부분이 친구와의 기억이다. 한 반에서 다섯 명 정도 해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서 간식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같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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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가정환경이 어려웠지만,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생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가 어려웠다.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집안일을 많이 했고, 엄마가 주·야간으로 일을 다니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밥 짓기는 도맡아서 했다. 학교는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까지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동네 애들도 다 그렇게 다녔다. 이후 교통이 발달하면서 버스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탔다.
 
어릴 때 가정환경이 어려웠지만,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생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가 어려웠다.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집안일을 많이 했고, 엄마가 주·야간으로 일을 다니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밥 짓기는 도맡아서 했다. 학교는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까지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동네 애들도 다 그렇게 다녔다. 이후 교통이 발달하면서 버스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탔다.
 
초등학교 1학년 때가 80년이었는데, TV를 보면 맨날 대학생들 데모하는 게 나왔다. 그때는 상황을 잘 몰라서, 주변 어르신들이 나쁘게 얘기하고, 또 언론의 자유가 없던 때다 보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인가보다 했다.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냥 ‘아, 저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을 하나 보다’ 생각하다가, 사춘기 이후에 교육을 통해 생각을 바꾸게 됐다. 당시 정권 때문에 선생님들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지는 못했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잘리거나, 권고를 받을 수 있어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하셨지만, 우리가 ‘이게 잘못됐구나’라고 알 수는 있었다. 기억나는 건, 중학교 1학년 때 전교조인 선생님이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기피하고 따돌리고는 했었다. 일 이년 후에 결국 그만두셨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분이 한 일과 사상이 옳더라.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
 
초등학교 1학년 때가 80년이었는데, TV를 보면 맨날 대학생들 데모하는 게 나왔다. 그때는 상황을 잘 몰라서, 주변 어르신들이 나쁘게 얘기하고, 또 언론의 자유가 없던 때다 보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인가보다 했다.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냥 ‘아, 저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을 하나 보다’ 생각하다가, 사춘기 이후에 교육을 통해 생각을 바꾸게 됐다. 당시 정권 때문에 선생님들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지는 못했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잘리거나, 권고를 받을 수 있어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하셨지만, 우리가 ‘이게 잘못됐구나’라고 알 수는 있었다. 기억나는 건, 중학교 1학년 때 전교조인 선생님이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기피하고 따돌리고는 했었다. 일 이년 후에 결국 그만두셨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분이 한 일과 사상이 옳더라.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

2020년 6월 22일 (월) 19:07 판




소개

박선주에게 삶은 ( 드라마 )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십 대의 감성인 것 같아요. 해가 바뀔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데 나의 생각은 아직도 똑같아요.”


박선주

1974년생, 1남 3녀 중 막내, 슬하에 2녀.



박선주 씨의 주요 일과


6:30 고양이 밥 주고 다시 취침

7:20 기상

8:20 출근

17:30 퇴근하고 고양이 밥 주기

18:30 저녁 식사

20:00 실내자전거 운동

22:00 넷플릭스 시청

24:00 취침



일생

요약
연도 나이 주요사건
1974년 1세 연기군 전동면에서 태어남
1986년 13세 현재 키 163cm 달성
1990년 27세 작은언니와 함께 천안에서 자취 시작
1996년 23세 대학교 입학, 농협 입사
1997년 24세 한 살 연상의 입사 동기와 결혼, 첫째 딸 출산
2001년 28세 둘째 딸 출산, 내 집 마련


어린 시절

1974년 2월 15일 충남 연기군 전동면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는 엄마, 아빠, 언니 둘, 오빠, 그리고 내가 막내. 큰언니랑은 여덟 살, 오빠랑은 다섯 살, 작은언니랑은 세 살 차이가 나는 사 남매였다. 엄마가 결혼을 일찍 하셨다. 스무 살에 결혼하시고, 큰 언니를 낳으셨다. 엄마랑 아빠랑은 일곱 살 차이,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스물여덟 살, 아빠는 서른다섯 살이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1970년대였고, 시골이었기 때문에 당시 부모님은 두 분 다 농사를 짓고 계셨다. 주로 밭농사,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가진 땅이 많지 않아서 다른 사람 땅에 농사를 지으시다가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두 분 다 직장을 다니셨다. 처음에는 두 분 다 공장에 다니시다가 아빠는 농장으로 옮기셨고, 엄마는 계속 공장에 다니셨다.

어릴 때, 유치원이 있긴 했다. 학교 병설 유치원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언니 오빠들 모두 유치원은 가지 못했다. 우리 남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유치원을 다닌 아이가 없었다. 나도 유치원은 건너뛰었다. 어릴 때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는데, 크면서 이사를 가는 집은 많고 오는 집은 거의 없어서, 사람이 차츰 줄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이름은 조혜영. 그 친구도 고학년 때 전학을 갔다. 학교 다닐 때는, 나름 모범생이었다. 당시는 학교에서 체벌이 용인되는 때였지만 단체 기합 등을 빼고는 선생님께 맞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때는 한 반에 애들이 드글드글 했다. 52명, 53명 해서 한 학년에 4반, 5반 정도. 시골이다 보니 전체 학생 수는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요즘 학교 한 반에 20명, 30명 있는 거에 비하면 교실도 적고 학교 자원 규모가 한정적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성장이 빨라서 나보다 키 큰 남자애들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63cm로, 지금의 키에 가까워졌다. 좋아했던 이성 친구는 없었고, 학교생활의 기억 대부분이 친구와의 기억이다. 한 반에서 다섯 명 정도 해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서 간식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같이 다녔다.

어릴 때 가정환경이 어려웠지만,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생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가 어려웠다.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집안일을 많이 했고, 엄마가 주·야간으로 일을 다니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밥 짓기는 도맡아서 했다. 학교는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까지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동네 애들도 다 그렇게 다녔다. 이후 교통이 발달하면서 버스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탔다. 초등학교 1학년 때가 80년이었는데, TV를 보면 맨날 대학생들 데모하는 게 나왔다. 그때는 상황을 잘 몰라서, 주변 어르신들이 나쁘게 얘기하고, 또 언론의 자유가 없던 때다 보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인가보다 했다.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냥 ‘아, 저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을 하나 보다’ 생각하다가, 사춘기 이후에 교육을 통해 생각을 바꾸게 됐다. 당시 정권 때문에 선생님들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지는 못했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잘리거나, 권고를 받을 수 있어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하셨지만, 우리가 ‘이게 잘못됐구나’라고 알 수는 있었다. 기억나는 건, 중학교 1학년 때 전교조인 선생님이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기피하고 따돌리고는 했었다. 일 이년 후에 결국 그만두셨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분이 한 일과 사상이 옳더라.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