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신동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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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신동엽 |
출생년도 | 1930년 8월 18일 |
사망년도 | 1969년 4월 7일 (38세) |
출생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
직업 | 시인 |
수상 | 은관문화훈장 (2003년) |
기본정보
- 이름
- 신동엽/ 申東曄/ 호(號)는 석림(石林)
- 학력
학력 | 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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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시기 | 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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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 충남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 |
1961년 | 명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
1966년 | 〈그 입술에 파인 그늘〉 국립극장 상연 |
1968년 | 오페라타 〈석가탑〉 드라마센터 상연 |
생애
- 생애 초기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같은 해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김응교 시인이 쓴 민족시인 신동엽(사계절)에 따르면 신동엽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부친 신연순이었다. 성격이 차분한 아들을 보면서 글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6살때부터 글을 가르쳤으며, 없는 살림이었지만 책과 붓을 마련하였다. 또한 사범학교 시절에 독서에 힘씀으로써 아나키즘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갔다.
- 학창 시절
그는 1948년 11월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 미청산에 항의하는 동맹 휴학으로 학교에서 퇴학되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사범학교에서 퇴학되었지만 교원자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부친은 사법 서사로 노동을 해서 버는 돈으로는 학비를 대지 못했기 때문에 밭을 내놓았다. 학문을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한 것이었다.
- 한국 전쟁 시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였다. 전쟁으로 민중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서울에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말해주었다. 1950년 7월 15일 인민군이 부여를 점령하였다. 인민군은 토지개혁과 조직사업으로써 공산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동엽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동엽의 지식을 조직사업에 활용하려는 인민군의 요구로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주청년동맹(민청)선전부장으로 일하였다. 그런데 이는 그가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었다. 동엽은 세상을 바꿔가야 한다는 공산주의의 주장에 동의했지만 생각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였다.
1950년 말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오다 굶주림 때문에 게를 먹는 바람에 디스토마에 감염되고 말았다.
- 학창 시절
공지영은 반에서 1등도 하는 등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학업에만 전념하던 학생이었는데,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러한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공지영이 대학 생활을 하던 시절은 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공지영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춰 고3 대입시험 직전까지도 성당에서 가톨릭 포콜라레 운동에 참가하여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성당과 빈민촌에서 보내며 가난한 이들을 만났다고 한다. 공지영은 천주교를 가진 유명인 중 한명이기도 하다. 공지영은 '수도원기행2' 출간 간담회에서 "예전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 막시즘이 이미 그 봉사활동 안에 녹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게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 활동을 얘기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대학시절 및 이후
공지영은 1981학번, 386세대의 첫 세대로 민주화 열기가 가득했던 시대에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생활을 하며 공지영은 연세대학교 방송국 아나운서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문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는데 연세대학교의 문학회에는 기형도 시인과, 성석제 소설가도 있었다. 공지영은 무릎팍도사 TV 프로그램에서 당시에 학생 식당에서 밥 먹을 돈이 없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래서 선배들이 곱게 자라온 공지영 에게 싫은 내색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기형도 시인의 책을 보면서 가난의 문제를 알게 되었고 자신은 먹고 싶은대로 먹고 자랐는데, 친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 미안함을 느꼈다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책을 쓸 때도 미안함을 갖고 쓰게 되었다. 공지영의 작품에는 동료 대학생들이 가졌던 신념과 자신의 성향이 자연스레 반영됐다. 공지영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자신이 돈이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공지영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아버지와 이념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 부정개표 반대시위에 갔다가 시위를 진압하러 온 경찰에 붙잡혀 1주일간 구치소에 수감됐다.
- 작가로서의 활동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제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에 지원, 합격을 했으나 발령은 받지 못했다. 그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1] 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었다. 이와 함께 신동엽 또한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그리고 훗날 4·19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하고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7일 간암이 악화되어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작품활동
- 시
출판년도 | 제목 | 발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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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 진달래 산천(山川) | 조선일보 |
Domain(A) | Range(B) | 관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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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 창작했다 | A가 B를 창작했다. |
- 온톨로지
작성자
작성자: 안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