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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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5일 (수) 21:08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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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농촌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학생과 학업에 뜻이 있는 지도층이 자발적으로 모여 농촌시민의 의식 고양과 지식 습득, 기술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활동을 말한다.

배경

시대별 농촌계몽운동의 목적 변화
시대 목적
구한말 계몽운동
식민통치 항쟁기 독립기반 형성
광복 이후 농촌사회의 근대화

농촌계몽운동은 구한말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시기에는 지식인 계층의 운동과 민중운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는데 을사조약 이후, 둘이 결합하여 계몽운동의 일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로 전문가들은 민족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였다고 보고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계몽운동은 당시 의병운동과 연합하여 해외의 독립군 양성교육과 같이 국내외 독립운동의 발전을 도모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철회되고, 한국은 민족의 대중적인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일으켰다. 조선본위교육운동(朝鮮本位敎育運動)로 인해 이론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도시의 지식인 계층과 학생들은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진행된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서 민족성을 기반으로 한 교육에 심화시키는데 집중하였다. 또한 일제가 문맹정책우민정책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통제하였는데 농촌계몽운동은 이에 대항하여 농촌의 교육 환경을 발전시켜 나아갔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위의 구호 아래 아동을 모으고 학교교육을 대신하는 야학을 실시하였으며, 문맹자를 위한 성인교육과 여성을 계도(啓導)하기 위한 여성교육을 추진했다. 또, 농촌의 생활개선과 농업의 개량, 사상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내용

농촌계몽운동은 농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것이기에 주로 농사일을 끝낸 야간시간에 강연회·토론회·독서활동·야학 등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또한 농한기인 겨울에는 더욱 폭넓게 실시되었고, 학생의 방학인 한여름과 한겨울에 적극적으로 실시되었다. 방학에 학생과 도시의 지식인들이 계몽운동을 위해 농촌으로 간다고 하여 귀농운동(歸農運動)이라고도 이야기 되기도 했다.

1920년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한민족이 총력을 기울여 독립운동을 한 시기였다. 정치단체들는 지하활동을 진행했으며, 사회·문화 단체는 민족운동을 진행했다. 조선청년회연합회·조선교육회·조선여자교육회·조선학생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농민사·구인회 등의 사회·문화 단체와 천도교청년회·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등의 종교단체까지 농촌계몽운동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이후 1929년부터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등 여러 언론지가 조직적으로 가담했으며, 조선어학회도 참가했다.

1930년대 초에는 농촌계몽운동이 최고조였으며 당시 문화운동의 주류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는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지식 청년과 학생이 농촌으로 피신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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