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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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헌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8일 (목) 10:20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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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1623년(인조 1년) 음력 3월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의 기록이 현존하며, 현재는 인조와 고종 시기의 일기가 번역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후원일기(喉院日記)라고도 한다. 분량은 3,245책, 글자 수 2억4250만 자이다. 1960년부터 1977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초서체였던 승정원일기를 해서체로 고쳐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는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을 진행하여 영인본 1책~111책, 127책~129책에 대한 전산화가 진행되었다.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1년 9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승정원

승정원.jpg[1]


승정원(承政院)은 정삼품아문으로, 조선과 대한제국(승선원으로 개칭)에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행정기관으로 왕과 부서들 간의 소통을 맡아 각종 서류들을 정리해 왕에게 올려 보고하고 왕이 내린 명령을 부서들에 전달하는 비서실의 소임을 맡았다.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기능을 수행하였고, 조보의 발행처라는 점에서 행정안전부의 일부 기능도 수행했다. 정원(政院)·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라고도 불리었다.

편찬

작성방법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고 사서를 만들기 위한 1차 공문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적이었다.

일단 가장 서두엔 일기답게 당연히 날짜가 들어간다. 여기엔 연호, 갑자년, 월일시, 날씨까지 기록하였다. 매시간 대마다 새로 하였으며 날씨의 변화 정도와 측우기를 통한 강수량의 정도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기본적으로는 왕이 거한 궁을 중심으로 기록하지만, 행궁으로 행차 시에는 행궁과 본궁 양쪽을 기록하여 조선의 날씨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해무리가 끼었다 안개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시거리 어느 정도로 끼었다, 몇 시에 개었다 등 날씨의 수준도 대단히 세밀하게 작성했다.

또 임금의 경연 장면에서는 왕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신하들과(모든 참석자 이름을 다 나열함) 경연을 하였고, 저번에 읽다 만 어떤 책의 어디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읽었으며, 임금이 평한 내용과 신하가 평한 내용, 그리고 왕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책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공부하는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러한 기사에 나온 것을 읊으면 그냥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과 같다. 의원이 임금의 건강을 살피는 대목에서는 어제 왕의 건강상태가 어떠어떠하였으며 요즘 날씨가 환절기라 일찍 기침을 하면 몸에 안 좋을 수가 있다는 내용과 그날 임금의 맥박이 어떠어떠했다는 등 내용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다음 칸에는 이 시간대의 근무한 승지와 일기를 작성한 주서의 이름이 적었는데 이를 좌목(座目)이라고 한다.

좌목의 다음에는 국왕의 위치와 현재 업무 상황이 적히고 중요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왕비, 대비, 세자 등의 안부가 나온다. 날짜와 좌목에 이어서 여기까지도 정형화된 불변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기의 본문인 그날의 국정이 대화와 처결 여부를 포함하여 기록했다. 여기에 포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 관서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와 거기에 대한 국왕의 결재여부와 후속처치
  • 의정부의 인사행정, 여러 상소와 장계
  • 당일에 근무하는 승정원 소속 관리 명단
  • 당일 국왕의 행적
  • 국왕 & 신하 간 모든 토론 대화내용
  • 그 날 임금의 진료여부와 처방받은 약의 약방문

공문서 성격을 띠는 터라 사도세자 신원을 상소하는 유생 1만 57명의 이름을 적어놓은 사례도 있으니 할 말 다한 셈. 이걸 스프레드 시트 없이 쓰셨다고요? 영조대 청계천 공사에 대해선, 실록이 홍봉한 등과 대화한 것을 몇 줄로 간략히 처리했다면 승정원일기에서는 대화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기록 분량만 비교해도 몇 자 vs 몇 장의 차이.

작성과정

이름은 승정원일기라서 승정원의 핵심인 승지가 작성할 것 같지만, 승정원일기는 주서 2명이 주로 작성했다.

두 사람이 2부제로 하루 업무의 반씩을 담당해 국왕의 모든 행정처리와 회의에 참여하여 속기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속기록이 초책(草冊). 당연히 혼자서 하다보니 모자라는 부분이 있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른 승정원 직원들이나 사관들에게 물어서 채워넣었다고 한다. 속기 외에 올라온 상소문과 같은 자료는 주서가 아닌 서리가 베껴서 첨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에 두개씩 나오는 초책들을 모아서 한 달 혹은 반달마다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일월년을 기록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전산화

승정원일기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진행 중이며 위에서도 나왔듯이 수십 년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한다. 1994년부터 시작된 승정원일기 번역은 고종, 인조, 순종 시기 승정원일기 번역을 끝냈으며 지금은 영조시기 승정원일기를 번역 중이다. 현재 해석본은 한국고전종합DB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의의

승정원일기는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승정원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곳으로, 왕과 부서 간의 소통을 맡아 각종 서류를 정리해 왕에게 올려 보고하고 왕이 내린 명령을 부서들에 전달하는 비서실의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당시 승정원에서 왕이나 부서들에서 올라온 일들을 기록한 것이 승정원일기이며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후부터 작성되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도중에 이름이 몇 번 바뀌었지만, 역사가들도 편의를 위해 그냥 승정원일기라고 부른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기록유산이자,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하는 기록물이다. 대략 2억 4250만 자라는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의 모든 국정을 기록한 자료이니만큼 조선사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은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과 더불어 드물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국정의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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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