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대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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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171 양지수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2월 1일 (일) 01:41 판 (경복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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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대 궁궐

주제 선정 이유

팀 콘텐츠로 성북구의 문화재를 조사했었는데 성북구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조선시대 문화재가 우리 주위에 많이 남아있다는 걸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과정 중에 떠오른 것이 궁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하여 역사 유물이나 장소를 유적지를 보기 위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녔었다. 그 중 경복궁, 덕수궁 등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고궁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와 이름만 알 뿐 다른 정보들은 알고 있지 못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우가 대다수 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서울에 위치한 조선의 4대 궁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파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주제로 선정하였다.




경복궁

경복궁 이야기

  •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처져, 왕도인 한양(서울)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경복구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의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 경복궁의 특징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느껴보자.

경복궁의 명칭 :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광화문

근정전

동궁전

경회루

위치



덕수궁

덕수궁 이야기

  •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으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군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덕수궁의 특징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관헌은 고종이 러시아 건축가를 불러 새롭게 지은 연회와 휴식의 공간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고 커피 애호가가 된 고종은 정관헌을 자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정관헌이 서양 건축에 전통양식을 섞어 지은 전각이라면, 석조전은 서양식으로만 지은 건물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한문

중화전

이화학당

성공회성당

위치

창덕궁

창덕궁 이야기

돈화문

인정전

인정문

부용정

위치

창경궁

창경궁 이야기

홍화문

옥천교

팔각칠층석탑

앙부일구

위치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