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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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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선생은 1906년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영기(全泳基)이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무관출신이고 배오개(종로구 종로 4가동 · 예지동 · 인의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인의동 112번지 동쪽에 있던 고개)에서 미곡상을 경영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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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개화를 선도한 개화파이면서도 천도교인으로서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였다.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적통으로 이어받았고 한학에서도 대학자로서, 우리 민족문화재 수집과 서화사를 총정리했으며 그 결과물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과 『근역화휘(槿域畵彙)』이다. 여기서 "근역(槿域)"이란 무궁화가 많은 땅, 즉 우리나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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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창이 정리한 화첩들은 단순히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무명의 그림들까지 수록했다. 민족정신의 변천과 각 시대적 특질을 누가 보더라도 체계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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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의 간송이 43세의 춘곡을 따라 65세의 노대가 위창을 찾은 것은 우리나라 고미술사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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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에게 그 맑음에서 ‘물 흐를 간(澗)’ 자를,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뜻을 기리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명문에서 ‘소나무 송(松)’을 써 간송이라는 호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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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위창을 방문하며 지도를 받으며 조선의 중요한 서화를 수집하면서 안목을 키워나갔고 스승 오세창의 지도와 조언을 받아 문화재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시공간'''=
 
='''전시공간'''=

2022년 11월 30일 (수) 18:00 판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06년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영기(全泳基)이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무관출신이고 배오개(종로구 종로 4가동 · 예지동 · 인의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인의동 112번지 동쪽에 있던 고개)에서 미곡상을 경영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개화를 선도한 개화파이면서도 천도교인으로서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였다.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적통으로 이어받았고 한학에서도 대학자로서, 우리 민족문화재 수집과 서화사를 총정리했으며 그 결과물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과 『근역화휘(槿域畵彙)』이다. 여기서 "근역(槿域)"이란 무궁화가 많은 땅, 즉 우리나라라는 뜻이다. 위창이 정리한 화첩들은 단순히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무명의 그림들까지 수록했다. 민족정신의 변천과 각 시대적 특질을 누가 보더라도 체계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3세의 간송이 43세의 춘곡을 따라 65세의 노대가 위창을 찾은 것은 우리나라 고미술사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었다.

간송에게 그 맑음에서 ‘물 흐를 간(澗)’ 자를,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뜻을 기리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명문에서 ‘소나무 송(松)’을 써 간송이라는 호를 선사했다.

간송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위창을 방문하며 지도를 받으며 조선의 중요한 서화를 수집하면서 안목을 키워나갔고 스승 오세창의 지도와 조언을 받아 문화재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시공간

전시공간 설명
알리다 서울디자인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기획. 주요 유물 15점을 디지털화한 작품으로 선보이고, 간송미술관의 모습을 가상현실로 구현했다. 2014년 처음으로 외부에서 개최한 <간송문화전>의 지난 5년간의 DDP 나들이를 갈무리하는 구간으로서 의의를 가진다.
전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흔적이 보인다. 보성학교3·1운동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폐교위기에 처하자, 간송이 황해도의 3000석지기 땅을 처분해 보성학교를 인수한 이야기 등을 만날 수 있다.
모으다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우리나라 최초 사립박물관 보화각이 탄생한 이야기가 펼쳐진다.‘청자상감운학문매병’고려청자도 이곳에 전시되었다.
지키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고미술품을 경매한 유일한 단체인 경성미술구락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간송이 경성미술구락부를 통해 사들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국보 제294호), 예서대련(보물 제1978호), 침계(보물 제1980호) 등을 만날 수 있다.
되찾다 간송이 1937년 영국 귀족 출신 변호사 존 개스비에게 수집한 도자기 컬렉션 스무 점을 선보인다. 일본 정세가 불안해지자 개스비는 컬렉션을 처분하려 했고, 간송은 집안 대대로 내려왔던 충남 공주 일대의 땅 1만 마지기를 팔아 개스비 컬렉션을 사들였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과 바꾼 도자기들은 ‘고려청자기린형향로', '고려청자원숭이형연적’ 등으로 훗날 국보 4점과 보물 5점으로 지정됐다.

기타

작성자: 김서연